1992년 3월 22일 밤 육군 9사단 소속 이지문 중위가 14대 총선 군 부재자 투표에서 국군 기무사의 선거 개입으로 부정투표가 이뤄졌다고 폭로하고 있다. 유창하 기자
“보병 9사단의 장교인데 군 부재자 투표에 문제가 많아 제보하려고 합니다.”
1992년 3월 20일 밤 11시, 한겨레신문 사회부에서 야근 중이던 이병효 기자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스물넷의 중위 이지문이었다.
“전화 상으로는 자세한 말을 나누기 어려우니 가능하면 회사로 직접 와주셨으면 합니다.”
서울 광화문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었던 이지문이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 도착하기까지는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30여 분 뒤에 이지문(24) 중위가 한겨레신문사에 도착했다. 이병효는 이지문의 신분을 먼저 확인했다. 이지문은 육군 9사단 28연대의 현역 보병 소대장이었다. 이지문은 3월 24일 치러질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 부대에서 진행되는 부재자 투표에 기무사령부가 갖가지 방법으로 개입해 여당 지지표를 만들어 냈다는 내용을 털어놨다. 이병효는 1시간 30분 동안 이지문의 이야기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3월 18~20일 정신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연대장이 ‘북한 대남방송에서 현 대통령(노태우 대통령)이 32%밖에 지지를 얻지 못해 정상회담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선전하고 있으므로 이번 선거에서는 집권 여당에 투표해 정치 안정과 통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대장은 하사관급 이상이 모은 간부회의에서 군의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므로 군은 대통령이 속해 있는 여당에 투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무대 파견 장교가 선거개입을 꺼리는 일부 중대장들을 만나 여당표가 80% 이상 나오도록 하라고 회유,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 장병들이 이러한 투표 부정을 양심선언 등을 통해 공개할까 두려워 지난 2주일 동안 사병들의 외출외박을 금지했다.”
이병효 기자는 확인취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인 3월 22일 오후 3시께, 이지문이 다시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이미 기사 초고를 작성해놓은 이병효는 증언이 공신력을 가지려면, 기자회견 형태로 공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이 중위가 조금이라도 꺼리는 점이 있다면 기사를 쓰지 않겠습니다.”
기자는 양심선언 이후 겪게 될 상황을 이지문 중위에게 설명했다. 이지문은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자청해 열었다. 3월 22일 밤에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지문은 “이것은 양심선언이 아니라 상식과 양심에 따른 지극히 당연한 사실 보고”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 공공연한 비밀로 취급되었던 군 부재자 부정선거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당시 안기부 직원 4명이 야당 후보에 대해 비방하는 선전물을 배포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은 대대적인 ‘흑색’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군 부재자 투표의 부정성을 처음으로 알린 1992년 3월 23일치 한겨레 1면.
1992년 3월23일치 한겨레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난 16일부터 현역 장병 56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군 일부 부대의 부재자 투표에서 국군기무사(사령관 서완수 중장)의 개입으로 공개 기표, 중간 검표 등 선거 부정행위가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다고 한 현역장교가 폭로했다.
육군 9사단 28연대의 보병 소대장 이지문(24) 중위는 22일 밤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전국본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중대별로 실시된 이번 군 부재자 투표를 앞두고 ‘남북대화를 하려면 30% 지지 가지고는 북한이 상대로 삼지 않으려 하니 여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아 정치 안정을 이뤄야 한다’는 내용의 정신교육이 계급별, 중대별로 있었으며, 단위 부대에 따라서는 중대장이나 인사계 등이 지켜보는 앞에서 찍도록 하는 등 공개 기표행위가 공공연히 이뤄졌다”고 밝혔다. (중략)
1992년 3월 22일 밤 14대 총선 군 부재자 부정투표를 폭로한 이지문 중위가 기자회견을 마친 뒤 수도방위사령부 수사관들에게 연형되고 있다. 유창하 기자
당시 한겨레에 실린 1문1답 기사에서 이지문 중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러한 사실을 밝히게 된 동기는?
= 현재 군에서는 사전 정신교육과 공개 기표 등 선거 부정행위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지만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는 양심의 집단 무감각층에 사로잡혀 있어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군의 정상적 지휘계통을 통해서는 개선책을 건의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아 직접 국민들에게 알려 시민운동을 통해 제도적 개선책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 방법을 택했다.
이와 별도로 육군 제1사단 이아무개(24) 병장은 한겨레에 서면으로 제보하였다.
“소속 중대장이 투표지에서 기호 2, 3, 4번은 손으로 가리고 1번을 찍도록 했다.”
“기무사의 서신검열용 기계로 누구를 찍었는지 모두 확인할 수 있으니 알아서 잘 찍으라고 강요했다.”
이지문 중위는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인 22일 밤 11시10분께 공선협 사무실 앞에서 ‘근무지 이탈’을 이유로 수방사 헌병대 소속 수사관 20여 명에 의해 동작구 사당동 수도방위사령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은 뒤 구속되었다. 수사관들은 이지문을 ‘빨갱이’, ‘운동권 출신’으로 공격하다가 여의치않자 나중에는
“한겨레신문이 양심선언을 사주했다”고 몰아붙였다. 1987년 대학에 입학한 이지문은 시위에 나가지 않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한겨레는 이지문에게 “이 사건을 끝까지 보도하는 방식으로 관심을 갖고 돕겠다”고 약속했을 뿐이었다.
이지문 중위의 양심 선언과 한겨레의 보도가 미친 파장은 컸다.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안기부, 기무사 선거개입 및 관건,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었다. 민주당은 3월 23일 긴급성명을 내어 군 부재자 투표를 전면 재시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김대중 당시 민주당 공동대표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은 30개 지역 정도의 당락을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일개 사단 차원이 아니라 대통령이나 국방 장관이 계획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진상 규명과 함께 국민 앞에 사과하고 기무사령관 구속과 국방장관, 참모총장 해임을 요구한다.”
한겨레는 군 부재자 투표 뿐만 아니라 신병 대기소에서도 투표 용지를 당시 여당인 민자당 후보의 기호인 1번 칸만 보이도록 접어서 나눠주는 등 선거 부정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3월 24일치 1면에도 연이어 특종 보도했다.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306보충대에 입소했다가 정밀신체검사 대상자로 분류되어 귀가조처된 김아무개(22)씨는 한겨레에 다음과 같은 ‘정신교육’을 받은 사실을 밝혔다.
“야당보다는 여당이 우리 군대의 생계를 좌우한다. 여러분들도 군인인 이상 여당을 찍는 게 좋지 않겠느냐.”
1993년 12월 31일, 한겨레는 이지문 중위에 대한 파면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 기사를 1면에 실었다. 12월 30일, 서울고법 특별2부(재판장 김종배)는 ‘군 부재자 투표 부정선거’를 알린 이지문 중위가 근무지 이탈 및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파면된 뒤에 사단장을 상대로 낸 파면처분 취소소송에 대해 “당시 이씨의 행위가 징계사유에 해당하지만 파면처분을 내린 것은 징계권의 남용”이라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지문 중위는 양심선언 이후인 1992년 4월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불명예 제대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지문 중위의 근무지 무단 이탈행위는 당시 군 부대 안 부재자 투표가 혼탁하게 진행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군 부재자 투표 제도가 공정한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졌으며, 근무시간이 끝난 저녁 비번 시간을 골라 근무지를 이탈한 점으로 볼 때 파면처분은 재량권을 넘어선 위법행위“라고 지적했다.
양심선언을 한 대가는 컸다. 이지문은 군에서 파면된 이후에 공무원이 될 수도, 대기업에 취업할 수도 없었다. 이씨는 전역한 뒤에 서울시 의원을 거쳐 참여연대 공익제보자지원단 실행위원,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 등을 역임했다. 1999년에는 ‘공직사회 내 내부고발에 대한 조사연구’로 정책대학원 석사 학위도 받았다.
“양심선언을 하면 그 이익은 사회 전체로 돌아가지면, 결국 양심선언한 개인에게 돌아가는 건 아무 것도 없거나 오히려 피해를 입는 게 현실이죠.”(
▶2014년 이지문 ‘공익신고 지원센터’ 소장 인터뷰 기사 바로보기)
이지문이 1992년 4월 15일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나면서 한겨레에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통과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말하려고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양심’과 ‘진실’ 때문이었습니다.”
1993년 12월 31일치 한겨레 1면. 이지문 중위 파면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 기사를 썼다.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