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 시민들.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시민 해커들이 만든 공적 마스크 앱들이 시민들의 마스크 구입 불편을 덜어줬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식당과 카페 등 다중이용시설의 방문객 연락처 수기 명부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상태로 사실상 방치돼 있는 것을 보며 “스팸 문자메시지 발송과 텔레마케팅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기로 남겨진 연락처 가운데 절반 가량이 허위로 기재돼 방역 효과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개인안심번호’(이하 안심번호)로 이 문제가 해결했다. 안심번호는 숫자 4자와 한글 2자 등 총 6자로 구성됐다. ‘12가34나’ 모양이다. 휴대전화번호별로 하나씩 자동 발급된다. 스마트폰 디지털무늬(QR) 체크인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중이용시설 방문 시 수기 장부에 연락처를 남겨야 할 때는 전화번호 대신 안심번호를 남기면 된다.
안심번호는 ‘시빅 해커’(Civic Hacker)들의 ‘시빅 해킹’으로 탄생했다. 개인정보위는 “권오현·손성민·진태양·유경민·김성준·오원석·심원일 등 코드포코리아(codefor.kr)에 모여 활동 중인 시빅 해커 7명의 시빅 해킹으로 안심번호가 탄생했다”고 뒷얘기를 공개하며 “안심번호를 쓸 때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나서준 시민들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시빅 해커들이 시빅 해킹으로 안심번호를 탄생시킨 과정을 소개하는 영상도 만들어지고 있다.
시빅 해커란 사회문제나 일상생활 속 불편사항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해결하자고 나선 시민 개발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시민 해커’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빅 해킹은 시빅 해커들의 문제 해결 행위를 말한다. “책임감 있게 화내는 행위”로 표현되기도 한다. 코드포코리아·코드나무(codenamu.org)·널채움(nullfull.kr) 같은 모임에 참여해 함께 사회문제와 불편사항에 분노하고, 기술을 활용해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윤종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위원장이 개인안심번호를 개발한 시빅 해커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심원일, 오원석, 손성민, 윤종인 위원장, 권오현, 진태양.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제공
안심번호 탄생 뒷얘기에 등장하는 코드포코리아 시빅 해커들은 ‘슬랙’이란 채팅 프로그램을 활용해 시빅 해킹을 벌인다. “다중이용시설의 방문객 연락처 수기장부 방치 행태에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윤종인 개인정보보호위원장이 대안을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빅 해커들과 논의를 거쳐 9가지 아이디어를 전달했는데, 안심번호가 채택됐다. 예산 고민을 하길래, 시빅 해킹으로 하겠다고 했다.” 코드포코리아에서 대외 소통창구 역할을 하는 권오현(사회적 협동조합 빠띠 이사장) 오거나이저(코드포코리아에서는 파워 활동가를 이렇게 부른다)는 <한겨레>와 만나 “시민들이 사회 문제나 생활 속 불편사항에 대해 함께 화를 내고, 클라우드 방식의 기술 소싱을 통해 해결하는 시빅 해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 안심번호 아이디어를 내고 개발에 참여한 7명 중에는 공무원과 중학생도 있다”고 말했다.
코드포코리아 시빅 해커들은 지난해 2월 마스크 대란 때는 정부에 공적 마스크 데이터를 공개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또한 정부가 공개한 마스크 공급·재고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적 마스크 재고량을 약국별로 확인할 수 있는 앱을 만들어 시민들의 마스크 구입을 돕고 공적 마스크 공급 정책의 효용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권 오거나이저는 “정부가 마스크 데이터를 공개한 지 4일 만에 앱이 만들어졌다. 목마른 사람이 직접 우물을 파는 시빅 해킹이라 가능했다”고 말했다.
다중이용시설 방문객이 수기장부에 연락처를 적고 있다. 연합뉴스
시빅 해킹은 정치·사회 문제나 생활 속 불편사항을 기술을 활용해 직접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을 몰라도 된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문제로 여기며 함께 분노하고 아이디어와 의견을 보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권 오거나이저는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시빅 해킹이 크게 활성화하고 있다. 코드포코리아에 모여 시빅 해킹을 하는 시빅 해커만도 380여명에 이른다”며 “공무원, 회사원,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고민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해 찾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기술의 사회적 활용 성격을 갖는 시빅 해킹은 재난이 발생하거나 정치·사회 혁신에 대한 요구가 커질 때 활성화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광우병 사태,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탄핵, 촛불집회, 코로나19 대유행 등이 계기가 됐다. 시빅 해킹을 벌이는 시빅 해커 모임(네트워크)만도 전국적으로 수십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결같이 정부가 내놓는 데이터 가운데 표나 수치로 돼 있는 것을 동네 지도 위에 표시해 쉽게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등 시민 눈높이에서 답답하고 불편한 부분을 고치고 바꿔보는 활동을 한다.
시빅 해킹은 국외에서도 활성화하고 있다. 미국에선 2009년 창의적이고 디지털 기술 개발 능력을 갖춘 시민들을 공무원들과 연결해 공공의 난제를 해결할 앱과 시스템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출발한 비정부기구 형태의 ‘코드포아메리카’가 대표적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보스턴 시민들을 위해 폭설 때도 소화전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앱을 내놨고, 하와이 주민들을 위해 쓰나미 경보 앱을 만들었다. 게임 개발자 출신으로 코드포아메리카 창립을 이끈 제니퍼 팔카는 강연에서 “시빅 해킹으로 정부 공무원들을 긴장시킬 수 있다. 탁상공론으로 몇 년이 걸릴 일을 시민들이 단 며칠 만에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코드포저팬’은 대지진, 대만의 ‘거부제로’는 해바라기 학생 운동(대만 대학생들이 중국과 무역협정 체결을 선언한 입법원을 점거 농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30대 천재 해커 출신 장관으로 알려진 오드리 탕 대만 디지털총괄 무임소 장관은 시빅 해커 출신이다. 탕 장관은 자신의 집무실 일지, 방문자들과 나눈 대화 내용 등을 모두 인터넷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열린 정부를 지향하는 시빅 해킹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김재섭 선임기자 겸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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