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가운데 하나로 주목 받고 있는 블록체인이 적용될 수 있는 여러 분야 중의 하나가 정치입니다. 한번 기록한 정보를 훼손할 수 없고, 해킹이 어려우며, 기록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블록체인의 특징이 정치와 잘 맞는 면이 분명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공직선거를 관장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최근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 투표 시스템’ 개발에 나섰습니다. 정치와 블록체인이 어떤 궁합인지 살펴볼까요.
블록체인이 정치에 접목된 시기는 예상 외로 꽤 이른 편이다. 아직 암호화폐 투기 열풍이 불기 전,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이란 단어가 일반인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전인 2017년 2월23일, 경기도에서 지역공동체에 예산을 배분하는 작업에 블록체인이 활용됐다. 신기술이 적용된 사업의 공식 명칭은 ‘2017 경기도 따복공동체 주민제안 공모사업’이었다. 매년 30억원 이상의 도 예산이 편성돼 각 주민공동체에 500만원~2000만원씩 배분되던 사업이다.
기존에 국비가 지원되는 공모사업의 경우 대부분 소수의 전문가들이나 공무원들이 모여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에서 탈락한 당사자는 혹시 심사위원들이 다른 지원자와 유착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따라서 심사작업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경기도는 심사위원 외에 공모사업을 신청한 주민공동체 대표들도 심사에 참여토록 했고, 아예 주민공동체 전원을 참여시킬 계획을 세웠다.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투표가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참여자들이 결과에 납득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비용과 불신이었다. 모두가 오프라인 투표를 하는 건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고, 그렇다고 온라인 투표를 하자니 해킹이나 조작 우려로 결과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할 대안이 블록체인이었다.
당시 블록체인 기반 투표시스템을 만들었던 스타트업 블로코의 김한석 홍보매니저는 “2017년 2월 경기도 따복공동체 주민공모 사업 투표에 총 7300여명이 참여했다. 일산 킨텍스 행사장에선 814개 지역 공동체에서 2명씩 대표가 나와 직접 사업에 대해 발표를 하고 투표를 진행했고, 생중계를 통해 발표를 지켜본 나머지 5000여명 이상의 구성원들도 온라인으로 투표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경기도는 전체 구성원이 참여하는 투표 방식으로 총 36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450개 단체에 배분했다.
해외에서는 더 일찍부터 블록체인을 투표에 접목한 시도가 다수 있었다. 2014년에 창당한 스페인의 개혁정당 포데모스는 당 집행부 26명을 선출하는 온라인 투표에 블록체인을 적용했다. 덴마크의 자유당은 2014년에 지역부서 연례회의에서, 미국 공화당은 2016년 유타주에서 진행된 대선 경선에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시범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온라인 투표의 장점과 한계
우리 정부는 암호화폐와 ICO에 대해선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지만, 암호화폐와 연계되지 않은 블록체인 분야는 재정을 지원해 육성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개발하는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투표 시스템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18년 블록체인 시범사업으로 선정됐다. 선관위는 지난 5월부터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고, 11월까지 개발을 완료할 계획이다. 총 예산은 7억5천만원이고, 이 중 정부 예산이 5억6천만원이다. 1억7천만원은 이 시스템 개발을 수주한 핸디소프트컨소시엄(핸디소프트, 엑스블록시스템즈, 해바라기소프트)이 부담한다. 정부 사업을 수주했는데도 기업들이 비용을 부담해가며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신승미 핸디소프트 신기술팀장은 “이번 개발을 계기로 향후 공공사업과 사물인터넷 분야의 블록체인 사업에 본격 뛰어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선관위는 2013년부터 온라인 투표 시스템 ‘케이보팅(K-voting)’을 운영해오고 있다. 케이보팅은 지난 6월까지 5년여 간 총 3788건의 선거에 활용됐다. 아파트 조합투표, 대학교 총장선거 등을 비롯해 주주사원의 투표로 선출하는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선거에도 활용됐다. 최근엔 높은 공공성이 요구되는 정당 경선에도 활용 사례가 늘고 있다. 2016년 정의당 총선 후보자 경선, 지난해 바른정당 대선후보 경선에 이어 올해 자유한국당도 지방선거 경선에 케이보팅을 이용했다.
케이보팅의 장점은 명확하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투표 참여가 가능하다. 지난해 1월 한겨레신문사의 대표이사 선거에서도 각자 출입처에 나가 일하는 기자들이 회사에 들어오지 않고도 투표를 진행했다. 손쉬운 투표 참여는 투표율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 비용이 줄어든다는 점도 장점이다. 선관위는 종이 투표의 경우 1인당 투개표 비용이 약 5000원 들어가는 데 반해, 케이보팅의 1인당 비용은 약 770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온라인 투표에는 결정적인 위험이 있다. 투표를 총괄하는 기관이 해킹을 당하거나, 해당 기관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투표를 조작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다. 이런 이유로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대통령이나 총리 등 공직선거에 온라인 투표를 활용하는 국가는 아직 거의 없다. 한국 정부도 2005년 8월 공직선거법에 전자투표 도입 근거 규정을 마련했으나, 이후 공직선거에 직접 도입하려고 추진한 적은 없다. 영국과 네덜란드 등도 온라인 투표의 공직선거 도입을 추진하다가 유보했다. 일부 선거구에서 전자투표 결과를 인정했던 프랑스조차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 해커들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2017년 6월 총선부터 전자투표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민이 권력을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공직선거의 투표 결과가 왜곡된다면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다.
투개표 참관인 대신하는 ‘노드’
블록체인이 적용된 온라인 투표에는 오프라인 투표와 비슷한 요소가 있다. 공직선거에서 각 정당의 관계자들이 투표소와 개표소마다 상주하며 투개표 과정을 ‘참관’하는 것처럼,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 투표에선 이해관계자들이 ‘노드’(node)로 참여한다. 노드란 본래 나무줄기의 마디를 의미하고, 컴퓨터 분야에선 ‘연결점’을 뜻한다. 블록체인에선 네트워크 참여자(컴퓨터)를 일컫는다. 비트코인의 경우 2018년 7월 기준 만개 이상의 노드가 똑같이 장부를 10분마다 갱신한다.
선관위가 만드는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 투표는 ‘컨소시엄 블록체인’이고, 현재 구상중인 노드의 숫자는 5개다. 중앙선관위 선거2과 김한나 사무관은 “블록체인에선 노드가 많을수록 좋긴 하지만, 시범사업이기 때문에 이 시스템이 제대로 구현되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는 노드 5개로 충분하다”고 밝혔다. 선관위는 선거의 이해관계자들을 노드로 참여시킨다는 구상이다. 노드로 참여하면 각자가 소유한 컴퓨터(혹은 클라우드 컴퓨팅 자원)에 실시간으로 투표 결과가 저장된다. 예를 들어 500명이 투표한다면, 한 명 한 명이 투표할 때마다 그 내역이 선관위의 서버 컴퓨터 이외에 4개의 노드에도 똑같이 저장된다. 선관위는 이 데이터가 암호화되어 있고, 투표자의 개인정보와도 분리된다고 설명했다. 신승미 핸디소프트 팀장은 “암호화된 투표 결과값은 선거가 진행되는 도중에 열람할 수 없고, 선거가 종료된 이후에만 조회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각 노드 참여자는 각자의 개표 결과를 선관위의 집계 결과와 비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프라인 투표의 참관인이 블록체인 기술 덕분에 온라인 투표로 옮겨올 수 있다는 건 큰 혁신이다. 하지만 블록체인에도 한계가 있다. 일단 블록체인은 온라인 투표의 중대한 단점인 ‘본인인증’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2012년 통합진보당에선 비례대표 후보자를 선출하는 자체 온라인 투표시스템에서 조직적인 ‘대리투표’가 이뤄졌다. 온라인에서도 비밀번호, 공인인증서 등 본인임을 인증하는 여러 방법이 있으나, 대리투표를 완벽하게 차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블록체인 기술 자체도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미래엔 실시간 홍채인식, 지문인식 등으로 본인인증 기술이 발전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기술이 난해하다는 점도 블록체인이 가진 한계다. 선관위가 구축하는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 투표 시스템에서도 이해관계자가 전문가 수준이 아니면 자신의 노드로 데이터가 제대로 들어오고, 그 데이터가 훼손되지 않는지 등을 검증하기 어렵다. 유훈옥 중앙선관위 선거2과장은 “종이투표의 경우 유권자들이 투표함에 직접 투표용지를 넣고, 투표함을 열어 하나하나 개표하는 과정을 참관인들이 두 눈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자투표의 경우 어떤 수단을 강구해도 투개표 과정을 두 눈으로 볼 수 없고, 본 것이 전부도 아니다. 따라서 노드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들이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검증 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방선거 투표일이었던 지난달 1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중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직접민주주의, 선거자금 투명화에도 도움
블록체인을 온라인 선거에 적용하는 시범사업을 완료하면 선관위는 ‘선거 여론조사의 신뢰성 제고’, ‘정치자금 투명화’ 등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는 중장기 과제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현행 선거 여론조사의 경우 후보자와 조사기관의 공모로 여론조사 결과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고, 여론조사 응답률이 너무 낮거나 조사비용이 과도하다는 문제가 있다. 블록체인으로 설문대상자의 정보, 여론조사 내용 등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면 해당 정보를 누구도 훼손하거나 위변조할 수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여론조사의 신뢰도를 높이면 참여도 역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수시로 신뢰할 수 있는 여론조사가 가능해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변모할 수도 있다. 기술이 뒷받침된다면 다수가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출하고 제도와 대책에 반영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직접 민주주의가 늘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많은 다수가 납득하는 결정을 이끌어낼 순 있다.
정치후원금 역시 블록체인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다. 현행 제도로는 후원인이 선관위를 직접 방문하거나, 일정한 절차를 밟아 정보공개를 청구해야만 정치인의 후원금 사용 내역을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블록체인을 이용하면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고도 누가 얼마만큼의 후원금을 모아서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코인데스크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국회의원에게 후원한 분들에게 블록체인 기술로 들여다 볼 수 있게 (권한을) 드리는 것이 어떻냐”며 “장부를 드려서 정치후원금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면 정치적 불신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블록체인 기술은 아직 현실보다는 가능성의 영역에 남아있다. 정치와 궁합이 잘 맞는지도 올해부터 검증이 시작된다.
윤형중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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