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부산 남구 해군작전사령부 부산작전기지에 미국의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SSBN) 켄터키함이 입항해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한·미와 북이 서로를 향해 내뱉는 ‘핵 위협’의 수준이 한반도가 전쟁의 ‘벼랑 끝’까지 갔던 1994년과 2017년의 수준을 넘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쪽에서 상대의 핵을 견제하려 ‘핵근육’을 자랑하자, 저쪽에서도 핵 위협 수준을 끌어올리며 맞서는 ‘핵 위협의 딜레마’에 한반도 전체가 포위된 모습이다.
북은 최근 남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미 핵협의그룹(NCG)의 18일 첫 회의를 앞두고 핵 위협 수위를 높였다. 13일엔 고체연료를 사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포-18을 쏘아 올렸고, 14·17일엔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거듭 담화를 공개하며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강하게 견제했다. 실제 미국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SSBN)이 18일 부산에 기항하자 이튿날 동해로 단거리 탄도미사일 두발을 쏘아 올렸다. 북이 미사일을 쏜 평양 순안에서 부산까지 거리는 미사일의 비행거리와 똑같은 550㎞였다. 미국의 전략자산을 핵으로 응징하겠다는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북의 대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강순남 국방상은 20일 담화를 내어 미국이 “40여년 만에 처음 조선반도에 전략핵무기를 전개하는 가장 노골적이고 직접적 핵 위협을 감행”했다며 이는 “우리 국가 핵무력 정책 법령에 밝혀진 핵무기 사용조건에 해당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동안 북이 한·미를 상대로 ‘서울 불바다’ 발언이나 “늙다리 미치광이를 불로 다스릴 것”(김정은 국무위원장, 2017년 9월) 등 도발적 발언을 한 적은 많지만, 자신들의 ‘핵 독트린’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핵 위협을 가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한반도는 1993년 북핵 위기가 시작된 뒤 ‘핵 위협’에 가장 취약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전 이후 한반도가 전쟁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1994년 여름은 북한이 핵무기를 본격 보유하기 전이었고, 무모한 충돌을 막으려는 이성이 살아 있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그해 6월16일 북을 방문해 김일성(1912~1994) 주석과 만나며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
두번째 위기는 북·미가 서로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핵 단추’를 언급하며 강하게 충돌했던 2017년이었다. 제임스 매티스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워싱턴 국립대성당에 들어가 홀로 기도했다. 일본 자위대도 한반도에서 유사사태(전쟁)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자신들의 대응 방안을 고민했다. 이 상황에서 빛을 발한 것은 ‘전쟁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는 한국 정부의 일관된 자세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해 8·15 경축사에서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에 반응하며 이듬해인 2018년 1월부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됐다.
당시 위기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핵 위기가 ‘제도화’됐다는 점이다. 북한은 지난해 9월 제정한 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에서 △핵무기 또는 기타 대량살륙무기 공격 △국가 지도부 등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 △국가 중요전략적 대상에 대한 치명적 군사적 공격 등이 ‘감행’됐을 때뿐 아니라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핵을 쓸 수 있게 했다. 강순남 국방상은 미국 “전략자산이 너무도 위험한 수역에 들어왔음을 깨달아야 한다”며 이 법에 따라 핵으로 ‘예방 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위협했다.
한·미는 북의 핵 위협을 일축했지만, 위기를 완화할 해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국방부는 21일 입장을 내어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부산 기항은 “한-미 동맹의 정당한 방어적 대응조치”라고 밝혔다. 사브리나 싱 미 국방부 부대변인도 20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의) 레토릭은 도움이 되지 않고 극히 위험한 것”이라면서 이번 기항은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철통같은 관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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