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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실행은 인공지능에 맡기고, 문제해결형 인재 키워라

등록 2017-01-24 08:49수정 2017-01-24 10:41

[4차 산업혁명] 인간혁명의 갈림길 ④
디지스트의 ‘4차 산업혁명’ 교육 실험

학문 간 접경서 혁신 도출하는 시대
‘무학과 단일학부’ 국내 첫 시도
수학부터 자동제어까지 가르쳐
여러 학문 통합한 시각 갖게 된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디지스트) 학생들이 삼면에 칠판이 설치된 ‘문제중심학습’(PBL) 강의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학부 3학년 학생들은 주제별로 팀을 이뤄 융복합·협업 연구를 하는 ‘학부생공동연구프로젝트’(UGRP)를 1년 동안 진행한다. 디지스트 제공
대구경북과학기술원(디지스트) 학생들이 삼면에 칠판이 설치된 ‘문제중심학습’(PBL) 강의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학부 3학년 학생들은 주제별로 팀을 이뤄 융복합·협업 연구를 하는 ‘학부생공동연구프로젝트’(UGRP)를 1년 동안 진행한다. 디지스트 제공
대구시에서 자동차로 40분쯤 서남쪽으로 달리면 비슬산이 나온다. 비파와 거문고라는 이름은 산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이라 하여 붙었다. 공교롭게 두 한자가 모두 임금 ‘왕’ 자를 2개씩 갖고 있어 임금이 4명 나올 상서로운 땅이라는 속설이 내려왔다. 그 기슭에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대구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고, 공장 건물들 사이를 지나면 대구경북과학기술원(디지스트)에 닿는다.

대학 중앙에는 기다란 건물이 멋지게 들어서 있다. 컨실리언스홀(통섭관)이라는 이름의 기초학부를 중심으로 5개의 대학원 연구동이 공항 계류장처럼 뻗어 있다. 2014년 완공된 이 건물은 그해 국내 5대 신축 건물로 선정되고, 다음해에는 대구시 건축대전에서 은상에 뽑혔다. 강의실과 교수 연구실 벽이 투명한 유리로 돼 있고 건물 이름처럼 모든 수업과 연구가 한 건물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독특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학과를 나타내는 팻말이나 학과 사무실이 없다는 점이다. 2014년부터 학부 과정을 개설한 디지스트는 4년 무학과 단일학부의 학사과정(기초학부)을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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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스트가 무학과 단일학부를 운영하는 이유는 사회가 더는 전문지식인을 바라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신성철 디지스트 총장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경영진과 얘기해보면 재교육 없이 기업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지식인을 더는 바라지 않는다.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전문지식인보다는 이를 따라갈 수 있도록 기초과학 지식이 탄탄한 융합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고 말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이 중심이 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새로운 발명과 발견이 학문 간 접경인 융복합 영역에서 도출될 것이기에 특정 학과나 지식에 집중하는 교육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 교사와 학생의 연구공동체를 뜻하던 신학부 중심의 유니버시티(대학)는 18세기 1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전문직 양성을 위한 전문학의 학습과 연구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19세기 말 2차 산업혁명은 멀티버시티 시대(대학의 대중화·매머드화)를 가져와 모든 교과과정이 ‘산업화’ 과학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분화하고 전문화했다. 지난 세기 말 디지털 중심의 3차 산업혁명 때는 기존 학문의 한 영역에 다른 학문의 방법론을 도입해 새 영역으로 재편성하는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가 주요하게 강조됐다. 문제일 디지스트 교무처장은 “4차 산업혁명에서는 물리적 결합인 학제간 연구로는 부족하다. 화학적 결합, 연금술처럼 들어간 것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나오는 그런 융합형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디지스트는 학부생을 2000자 자기소개서만으로 뽑는다. 면접 과정에 스스로 사회를 정해 토론을 벌이는 그룹 토론은 디지스트 입시의 아이콘이다. 평가자는 내신 성적을 볼 수 없다. 초기에 일부 과학고에서는 성적이 뒤바뀌어 합격한 일로 항의를 해오기도 했다. 신생 학교에 대한 부모의 거부감도 합격생들 대다수가 겪은 공통점이다. 제주중앙여고 출신으로 2014년에 1기로 입학한 부혜리씨는 “총장님이 대학 소개 설명회에서 창의적 인재(크리에이티브), 기여(컨트리뷰션), 배려(케어)라는 ‘3C 인재상’을 제시하셨는데 매력을 느껴 지원했다. 하지만 반대하시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오래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학부생들은 수학·물리·화학·생물학 등 기초과학과 컴퓨터·통계·자동제어 등 공학 과목을 학습해야 하고 인문소양과 리더십, 기업가정신 등 공통과목을 모두 소화해야 한다. 신 총장은 “기업가정신은 돈 버는 것, 곧 성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뒤 어떤 의미로 돈을 쓸 것인지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성공한 뒤 멋있게 쓰는 법을 배워야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다. 2015년 입학한 김도연씨는 “처음 무학과라는 게 우려도 됐지만 2년 정도 공부해보니 확신이 드는 것 같다. 융복합이라는 게 모든 걸 얕게 배우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고교 때 배우지 않았던 생물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물리학적, 수학적 접근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최근 외부 워크숍에서 만난 고교 동창들과 그룹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새 물리와 생물을 넘나들며 다각적인 시각을 가진 내가 중재자가 돼 있더라”고 했다.

디지스트의 기초학부의 수업 사진.  디지스트 제공
디지스트의 기초학부의 수업 사진. 디지스트 제공
기초학부의 융합교육은 학부 전담 교수제가 있어 가능하다. 디지스트 전체 교수의 10%는 학부 교육만 전임하는 학부전담교수다. 교원평가 자체를 논문이 아닌 집필 교재와 강의 평가로만 한다. 학부전담교수들은 15~20분씩 강의 리허설을 하고 서로 조언과 평가를 하는 과정을 거친다. 어떤 교수는 강의실 흑판과 똑같은 것을 집에 설치해놓고 판서의 마침표가 마지막에 끝나도록 연습을 해오기도 한다. 판서를 지우면 학생들의 집중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다. 학생들은 입학하면서 교수들과 멘토-멘티를 맺어 ‘담임선생님’처럼 관계가 친밀하다. 2학년 말이면 생활멘토 외에 진로멘토가 한명 더 생긴다.

융합 교육의 핵심은 3학년 1년 동안 진행하는 ‘학부생공동연구프로그램’(UGRP)이다. 교수들이 제시한 주제나 학생들 스스로 제안한 주제별로 학생들끼리 5명 안팎의 그룹을 꾸려 연구를 하는 제도다. 전공이 다른 교수 2명의 지도를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융복합과 협업 연구역량을 키우는 게 목적이다. 본인이 원하면 4학년 때 1년 더 진행할 수 있다. 부혜리씨는 “과학고 출신이 아님에도 배워야 할 과목들이 많아 힘들고 과연 쓸모가 있을까 생각도 들었는데 고분자 화학을 주제로 공동연구프로그램과 학석박사과정을 진행하면서 수학이나 프로그래밍 등이 쓰이는 걸 보고 회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디지스트 ‘실험’의 성과는 모집 단계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4년 첫 학부 신입생 모집 때 200명 정원에 1800여명이 지원했다. 건물도 없는 상태에서 혁신모델만 보고 학생들이 지원한 것이다. 네번째 신입생을 뽑는 2017학년도 학부 수시모집 지원 경쟁률은 11 대 1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성공 여부는 내년에 첫 졸업생들이 배출돼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학부생들의 졸업장에는 주전공이 ‘융합전공’으로 기재될 것이다. 교육부는 지난달 초 발표한 ‘대학 학사제도 개선 방안’에서 별도의 학과나 전공을 만들지 않고 여러 학과가 융합해 새로운 전공을 만드는 융합전공제 도입을 천명했다.(<한겨레> 2016년 12월9일치 12면) 디지스트는 융합전공제를 앞서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학부생들은 현재 2학년까지 필수과목 위주로 학습을 하고, 3학년부터는 디지스트의 융복합대학원이나 국내외 대학원 진학, 기업 입사, 과학 이외 분야 진출 등 4개의 진로별로 맞춤형 교육을 받는다. 디지스트에는 기계공학, 전자공학, 화학공학처럼 전통적 학과가 아닌 신물질과학, 정보통신융합공학, 로봇공학, 에너지시스템공학, 뇌인지과학, 뉴바이올로지전공 등 6개 융복합대학원이 있다. 신 총장은 “디지스트 정원에는 10명의 노벨상 과학자 흉상이 놓인 비슬노벨가든이 조성돼 있다. 우리는 비슬산 정기를 받은 이곳에서 ‘과학의 왕들’이 배출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


미 하비머드·올린공대 졸업생들 기업서 높은 평가
해외 융복합교육 사례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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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철 총장은 대구경북과학기술원(디지스트) 출범 때 세가지 열쇳말을 앞세웠다. 융복합 및 협업 교육, 리더십 교육, 기업가정신 교육이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재임 때 고민해왔던 것으로 카이스트만 해도 굳어진 조직이어서 혁신하기 어려운 주제들이었다. 디지스트는 새로 시작하는 조직이어서 가능했고 몇 년 사이에 성과가 나타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신 총장의 확신은 융복합 교육, 무학과 단일학부 체제를 앞서 도입한 미국 대학들이 보여주고 있는 성과에 근거한다.

최경호 디지스트 융복합대학원 교수(전 기초학부장)는 “학교 설립 전에 버클리·스탠퍼드 등 전통적으로 유명한 대학들을 둘러봤지만 하비머드대와 올린공대의 교육체계가 디지스트가 추구하는 방향과 가장 유사했다”고 말했다. 하비머드대는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 개교한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문·사회과학 중심의 학부 중심 교양대학)이다. 이 학교는 실용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예술과 인문사회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협동심 배양을 최우선으로 한다. 최 교수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학문의 동반자처럼 격의 없이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잠재력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비머드대 졸업생들의 능력은 기업에서 서서히 발휘된다. 미국 전문 급여조사업체 페이스케일 조사로, 10년 경력의 중간연봉이 가장 높은 대학 순위에서 하비머드대는 하버드·매사추세츠공대(MIT) 등 유명 대학들을 제치고 해마다 1위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프린스턴대와 함께 공동 3위를 차지했다.

하비머드대는 성적을 등급별(A·B·C)로 매기지 않고 성취 여부(패스·페일)만 판단한다. 디지스트는 이를 원용해 ‘학부생 공동연구 프로그램’(UGRP) 등 프로젝트 과목들에 대해 성과가 만족할 만큼 충분한지 아닌지만 따지는 에스유(S·U) 등급을 매긴다.

미국 보스턴 근교의 올린공대는 학부 중심 공과대학으로 4년 모두 무학과로 운영한다. ‘엔지니어링을 위한 시니어 컨설팅 프로그램’(SCOPE)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기업 등 고객이 의뢰한 문제를 4학년 1년 동안 5~6명이 팀을 이뤄 풀어내는 과목이다. 의뢰한 회사에 직접 찾아가 결과 발표를 하고 보고서도 제출한다. 올린공대 졸업생은 엠아이티에서 ‘입도선매’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융복합 교육은 대학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핀란드에서는 지난해 8월 도입한 새로운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1년에 몇 주 동안은 단일과목 수업이 아니라 학제간 주제에 중점을 둔 현장 기반 학습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헬싱키 부근 시범학교에서 교사들의 연수를 참관한 박형주 수리과학연구소장은 “많은 사람이 융합에 대해 오해하고 있듯이 기존 과목을 없애고 새로운 융합과목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모둠 활동을 통해 협업과 상호작용을 통한 배움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융합교육의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현장기반학습은 3과목 이상의 교사가 융합과목 1개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령 유조선이 좌초돼 유출된 기름을 해결하는 방법을 학습하는데, 학생들은 먼저 역사교사와 함께 이전 사례를 찾아 대책들을 살펴본다. 다음 화학교사와 어떤 약품을 써야 하는지 실제 실험을 해보고 마지막으로 수학교사와 화학약품 비율을 조절했을 때 변화라든지 빅데이터를 동원해 어떤 대책이 가장 효율적이었는지, 계절별 차이 등에 대해 배운다.

박 소장은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이라는 가상세계가 로봇이라는 실물세계로 구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에는 기획하고 계획을 짜는 리더십이 타고나는 소수의 소양으로 여겨졌지만 우리는 리더십이 소수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실행은 인공지능과 로봇에 맡기면 되기에 미래의 학교는 지식 전수가 아닌 지식의 연계,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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