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n)번방 사태가 불거졌을 때 회사 내부에서 기술·정책적 대책을 서둘러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지금 대책을 내놓으면 사업자의 노력으로 성범죄 콘텐츠 유통을 차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반대 전선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반박에 밀려, 대책은 발표하지 못했다.”
국내 굴지 인터넷 서비스 회사 임원이 사석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농담이거나,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후에 따로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그 회사 임직원들은 평소 나를 만날 때마다 “우리 회사는 다르다”고 강조해 왔다. 이 임원도 말을 해놓고는 아차 싶었는지 “오프”(비보도)를 요청했다. 그래서 회사명은 밝히지 않는다.
이른바 엔번방 사태는 여성 성착취물을 텔레그램 등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해온 게 드러나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성착취 대상과 가해자에 아동과 청소년들이 대거 포함돼 있어 충격을 더했다. 운영자가 줄줄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고, 돈을 내고 성착취물을 받아본 사람들도 가담자로 분류돼 조사를 받고 있다.
‘한겨레’ 보도로 실상이 드러나자, 가해자들에 대한 수사와 별개로 정부와 국회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의 성범죄물 유통 차단 의무를 강화하는 쪽으로 ‘전기통신사업법’과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보호 등에 관한 법’ 개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사업자들은 “엔번방 사태의 진원지 텔레그램은 국외 사업자라 국내 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용자들이 주고받는 정보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냐” 등의 주장을 펴며 법 개정에 극렬 반발했다. 인터넷 사업자 단체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벤처기업협회·코리아스타트업포럼이 공동으로 연일 성명, 공개질의, 기자회견 등을 이어갔다.
사회에 큰 충격을 줬고, 사람들이 분노했다. 따라서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경찰·검찰은 신속한 수사로, 정부와 국회는 법과 제도 정비로, 사업자들은 기술과 정책으로 각각 재발방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업자들의 경우, 법 개정안에 문제가 있으면 따져 묻되, 기술·정책 대책을 내놓는 노력을 병행해야 했다. 하지만 사업자들은 노력과 대안 없이 “아니되옵니다”만 외쳤다. 서둘러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까지 누르며 이렇게 해왔다는 게 이번에 드러난 것이다.
인터넷 서비스 회사 창업자와 경영자들은 그동안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사실을 앞세우며 “윤리·도덕적으로 기존 대기업과 다르다”고 강조해 왔다. 시가총액이 재벌 대기업을 뛰어넘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된 업체들은 “다른 잣대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사람을 우선하지 않는데, 달라서 뭐하나.
김재섭 선임기자 겸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