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 전 의원이 지난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신임 금융감독원장 취임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금융개혁의 적임자로 평가받았던 그는 19대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의 후원으로 국외출장을 간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도덕성 논란에 휩싸인 끝에 지난 16일 사퇴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김기식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장에 내정됐을 때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금융개혁의 최적임자” “여의도의 저승사자”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명된 지 보름도 안 돼 ‘내로남불’ 정치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한 끝에 결국 사퇴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검찰에서는 피감기관의 돈으로 국외출장을 간 데 대해 수사까지 하고 있습니다. 자칫 법정에 서야 할지도 모릅니다. 정치인 김기식이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처지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금융계의 저승사자가 왔다’는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불과 14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 김기식(52) 전 금융감독원장(이하 호칭 생략)에게 직접 여러 논란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었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지난 19일 간신히 통화가 됐으나, 그는 힘없고 갈라진 목소리로 “무척 힘들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들 사람들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겠느냐”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질문하는 직업이라 몇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칩거중인 김기식 “국민께 죄송”
“2014년 첫 외유 뒤 관행 물들어
30년 공적 삶 매도당해 치욕이나
스스로 빌미 줬으니 운명으로 여겨”
1994년 참여연대 탄생 산파역
본격적인 ‘시민운동 시대’ 이끌어
2011년 빅텐트론 들고 정치 첫발
정무위 땐 ‘여의도 저승사자’ 별명
-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국민들로부터 주목받는 정치인이었다. 도덕성 면에서는 누구보다 깨끗하리라고 믿었는데 피감기관의 돈으로 국외출장을 간 것이 드러났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이유인데.
“국민들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나는 2012년과 13년 국회의원 임기 첫 두해에는 한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 아마 아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외동인 중학생 아들은 2013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의원직을 관두려고 했다. 주변 동료들이 간곡히 만류하면서 외국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권해서 2014년 1월 처음으로 이른바 의원외교차 국외출장을 갔다. 그 후부터 자기 경계심이 느슨해진 것 같다. 또 나는 로비에 흔들릴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도 피감기관의 초청을 수용하게 한 요인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국민 눈높이와는 달랐다. 그런 점은 참으로 죄송하다.”
김기식 한명에게 쩔쩔맸던 정무위
- 국회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더미래연구소’에 5천만원을 후원금으로 낸 것은 정치자금법 위반이라는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나왔다.
“이건 정말 억울하다. 더미래연구소는 김기식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진보 개혁적인 의원들의 모임인 ‘더좋은미래’가 정책 개발을 위해서 만든 연구소다. 참여 의원들이 자기 돈을 1천만원씩 내서 만든 자발적인 싱크탱크다.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내부 회의를 통해 1천만원 이상씩 추가 출자를 하기로 결의한 데 따라서 5천만원을 냈다. 1천만~2천만원씩 더 낸 의원들도 있다. 그게 어떻게 통상의 범위를 벗어난 후원이냐. 법원의 판단을 정식으로 받아보고 싶은데 공소시효가 끝난 것이라서 검찰에서 기소하지도 않을 거니까 답답하다. 또 셀프후원 운운하는데 월급은 많지도 않지만 정당하게 노동을 한 대가다. 아주 모욕적인 주장으로 사람을 매도한 것을 보면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불순한 의도가 무슨 뜻인지 등을 더 물었으나 그는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입을 닫았다.
경제민주화는 참여연대가 추구한 주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2001년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소액주주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장하성 당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왼쪽)과 김기식 정책실장이 이재용씨의 임원 선임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어떻게 할 건가?
“아무 계획이 없다. 다만 지난 30년간의 내 삶이 이렇게 매도되는 것이 솔직히 마음 아프고, 치욕적이다. 그러나 그런 빌미를 내가 준 것이니 운명이라고 본다. 몇년 전부터 공적인 삶을 그만하고픈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 일이 그런 부담을 덜어낸 측면도 있다.”
‘최단명 금융감독원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물러났지만, 정치인으로서 김기식의 족적은 뚜렷하다. 19대 국회 비례대표로 여의도에 입성한 그는 4년 동안 금융 분야를 관장하는 정무위원회에서 일했으며, 후반 2년은 초선임에도 야당 간사를 맡아 활약했다.
2013년 4월 통과된 ‘자본시장법’ 심의를 위한 정무위 법안심사 소위가 열렸을 때였다. 두번째 회의에서 금융위원회는 자기들이 제출한 이 법안을 원안대로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했고, 여야 의원들도 대충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김기식이 나서 “이 법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의원들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저도 이 법안 통과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결국 법안 하나하나에 대한 심사를 벌여서 대폭 수정됐다. 또 민주당 의원이 제출한 법안에 대해 상대당인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의원들조차 찬성했는데 김기식 혼자서 제동을 걸어서 안 된 적도 있다.
그는 매년 가을 국정감사 때마다 시민단체 모니터단이나 언론사가 선정하는 ‘국감 우수의원’에 뽑혔다. 19대 국회 정무위에서 일한 한 야당의원 보좌관은 “상임위가 열릴 때마다 정부 쪽이나 산하기관 직원들은 김기식 의원의 날카로운 지적에 쩔쩔맸다”며 “오죽하면 김 의원이 당내 경선(서울 강북갑)에서 떨어져 20대 국회 진출이 좌절됐을 때 피감기관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소리가 나왔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원칙적이고 비타협적인 그의 태도는 상대당 의원들뿐 아니라 같은 당 동료들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수도권의 민주당 한 중진의원은 “김 전 의원이 일은 정말 똑 부러지게 했다”며 “그러나 의원총회나 당 회의 때 면전에서 선배 의원들에게도 잘못을 지적하는 등 직설적이어서 인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도 “그는 남을 비판할 때는 정말 모질게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너그러웠으니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번 사태 때 적극적으로 김기식을 엄호하거나 두둔하는 의원이 없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기식의 뿌리는 참여연대다. 1994년 9월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1999년에 참여연대로 변경)가 출범했을 때 그는 정책위원회 소속 간사에 불과했으나, 실제로는 참여연대의 산파역이자 기둥이었다. 김기식은 1992년 말 인천에서의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생소한 용어였던 ‘참여민주주의’가 그때 그가 잡은 화두였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각 계층과 세력이 ‘연대’하는 시민운동 단체를 만들어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은 19대 정무위원회 시절 금융업계를 떨게 만들어 ‘여의도의 저승사자’로 불렸다.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4년 4월7일 김기식 당시 의원과 함께, 보험회사의 주식 평가 기준을 취득가가 아닌 시가로 바꾸도록 하는 내용의 보험업법 개정안을 접수시키고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이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고3 때 ‘광주’ 진실 접했던 ‘준비된 운동권’
김기식은 1993년 초 민주화세력의 맏형이었던 김근태(2011년 작고, 전 의원)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현실 정치 참여를 생각하고 있었던 김근태가 난색을 표하자, 김기식은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에서 일하던 김동춘(58·성공회대 교수)을 만났다. 김기식의 취지에 공감한 김동춘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일하던 박원순(62·서울시장)을 소개해줬다. 김기식은 또 한국사회과학연구소에서 활동 중이던 조희연(61·서울시교육감)도 따로 만났다. 박원순과 조희연은 김기식의 주선으로 서로 알게 됐다. 따로 시민운동을 구상해왔던 셋은 ‘권력 감시와 정책 대안을 제기하는 시민운동 단체’를 같이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김기식이 주도한 청년모임인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연대’(1993년)부터 함께했던 박원석(48·전 의원)은 “김기식은 참여연대라는 새로운 사회운동 조직의 기획자이자 성장 과정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며 “그래서 초대 사무처장(조희연)과 2대 사무처장(박원순)이 떠난 뒤 2002년 36살의 젊은 김기식이 사무처장을 맡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16대 총선(2000년), 17대 총선(2004년) 때의 낙천·낙선운동과 2004년 탄핵무효 촛불집회 등 참여연대가 주축이 된 주요한 사회활동은 대부분 김기식이 기획하고 주도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기식은 고교(서울 경성고) 2학년 때까지는 삼남매의 막내로 공부 잘하는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고3 때 만난 ‘광주’였다. 신촌에 집이 있었던 김기식은 누나가 다니던 연세대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곤 했다. 1983년 5월 어느날 연세대 교정에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담은 유인물을 보고는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책을 손에서 놓다시피 했고, 결국 그해 입시에 실패했다. 이듬해 재수를 하면서도 그는 공부는 뒷전이고 대학생들의 시위에 참여해 돌을 던지곤 했다. 운동권이었던 형이 “학생운동을 제대로 하고 싶으면 우선 대학부터 들어가라”고 타이른 뒤에야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준비된 운동권’이었던 그는 대학(서울대 인류학과)에 들어가자마자, 언더서클(미등록 학회)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와 같은 서클에서 활동했던 박아무개(53)는 “기식이는 동기들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아는 것도 많고 열정도 풍부해서 선배들도 그에게 일찍 주요한 역할을 맡겼다”며 “1986년에 터진 ‘구학련’(구국학생연맹) 관련자들이 대부분 3학년, 4학년이었는데 2학년이던 김기식이 끼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김기식과 동기였던 윤아무개(51)는 “1987년 봄 2학년(86학번)들의 전방 입소 훈련 거부 투쟁이 벌어질 때였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집회가 열려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3학년이던 김기식이 발언권을 얻어 단상에 올랐다. 그는 ‘훈련에 참가하자는 학우들을 비난하거나 욕을 하지 말자. 그들도 다 같이 고민하는 동료들이다. 그들을 욕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하더라. 다들 뭉클해했다”고 말했다.
김기식이 노동운동을 위해 인천으로 간 것은 1988년이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을 마치면 대부분 직업적 혁명가로의 변신을 꿈꾸며 노동 현장으로 ‘존재 이전’을 했다. 그도 같은 길을 걸었다. 1993년 초까지 약 6년간 인천 남동공단 등의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노동상담소에서 일했다.
노동운동가에서 ‘개량주의자’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다른 생각이 싹텄다.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다 해고되고 감옥 가는 분들을 보면서 ‘내가 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계와 회의가 느껴졌다. … 이념이 아닌 ‘먹고사는 문제’로 투쟁하는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이념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생활이 더 중요하고, 그런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이념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월간중앙> 2004년 4월호 인터뷰) 혁명가에서 시민운동가로, 변혁주의자에서 이른바 개량주의자로의 변신이었다.
평소 ‘영원한 시민운동가’로 남겠다고 했던 김기식은 2010년쯤부터 현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안식년(2008~2009년)을 미국에서 보내고 돌아온 김기식은 미국의 민주당처럼 중도에서 진보까지 다양한 색깔의 정치그룹이 함께하는 정당을 만들자는 ‘빅텐트론’을 주장했다. 감시자에서 ‘플레이어’(현실정치인)로의 자리 이동을 한 이유에 대해 “영향력 정치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당면한 사회 경제적 이슈나 한반도 평화 같은 의제는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서는 개혁 과제를 관철할 방법이 없다”(<한겨레21> 2011년 3월17일)고 밝혔다. 그는 2011년 시민운동가 출신이 중심인 ‘내가꿈꾸는나라’를 만든 데 이어 야권통합을 지향하는 단체 ‘혁신과통합’의 주역 중 한명(공동대표)으로 참여했다. 혁신과통합의 상임대표 중 한명은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었던 문재인이었다. 혁신과통합은 그해 12월 민주통합당으로 발전했으며, 김기식은 당 전략기획위원장으로 이듬해 19대 총선을 치렀다. 2017년 대선에서는 대선캠프 정책특보로서 금융 관련 공약의 밑그림을 그렸다.
‘앞서간 시민운동가’,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던 김기식은 이제 국민들로부터 외면받으면서 공적인 삶에서의 철수까지 생각하는 처지가 됐다.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올까. 더좋은미래의 책임간사인 유은혜(민주당 의원)는 “금융개혁을 지휘해야 할 금융감독원장에 그만큼 적임인 사람은 없었는데 안타깝다”며 “스스로 반성하고 다잡는 계기로 삼아서 이번 시련을 극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