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일반

성소수자는 ‘불법 사람’입니까?

등록 2017-05-05 06:59수정 2017-05-05 19:10

“하늘이 어머니 아니세요?”

“어, 기자님, 우리 처음 인터뷰했던 그 기자님이죠?”

“더 젊어 보이세요.”

“그때 기사가 나가고 댓글에 누가 ‘자식이 얼마나 속을 썩였으면 저렇게 힘들어 보이냐’고 올린 거예요. 그때부터 드라이하고 화장도 하고 나와요.”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 좌담회에서 만났던 하늘이 어머니를 지난 4월21일 서울 국방부 앞에서 열린 ‘육군 성소수자 군인 색출 중단’, ‘나도 잡아가라’ 집회 행진에서 다시 만났다. 밤늦은 한적한 골목길, 남성 동성애자(게이) 아들을 둔 하늘이 어머니는 자신의 변화를 그렇게 말했다.

사람 다 그렇다. 누구도 동정을 구걸하고, 존재를 애원하고,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다. 그걸 인권의 언어로 존엄이라 하지 않나? 성소수자는 2017년 대통령선거 동안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끌려 올라와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쳐졌다.

하늘이 어머니가 자식만 생각했다면 굳이 성소수자 모임에 나오고 집회에 다닐 이유가 없다. 군을 제대한 아들은 애인 만나서 잘사는데, 괜히 나서서 저러신다. 성소수자 인권이 뭔지 몰라서, 생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소중한 아들을 울렸던 기억, 그것이 잊혀지지 않아서 저러실 것이다. 지금 어디선가 그렇게 울고 있을 자식 같은 이들을 외면하지 못해 집회도 나오고 후보도 만나고 그런다. 그렇게 하늘이 어머니는 공화국의 시민이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예민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공화국의 시민이다. 나는 최저임금 1만원을 받지만, 최저임금 1만원도 받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런 시민 말이다. ‘가만히 있어라’ 명령하는 이들은 모르는, ‘나중에’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은 모르는 세계다.

“우리는 이제 뒷방 늙은이예요.” ‘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 나라 활동가가 이날 국방부 앞 인도를 빼곡하게 메운 이들을 보며 말했다. 갑작스런 집회를 열었는데 300여명이 촛불을 들었다. “새로운 (성소수자 인권운동) 세대가 태어나고 있어요.” 스무살 무렵부터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시작한 그는 어느새 30대다. 그가 말하는 동안 앞에선 자신의 실명과 학교와 나이를 또박또박 밝히며 “나도 잡아가라!”고 외치는 ‘군미필’ 세대들이 있었다. 제대군인으로 ‘군종’ 명찰을 단 군복을 입은 이들도 앉아 있다. 군형법 추행죄(92조의6)로 구속된 육군 대위 사건이 터지기 전 서울 광화문 앞에서 주말마다 열렸던 이들의 집회 이름은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였던가.

지난 4월2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제1차 ‘육군 성소수자군인 색출 중단, 나도 잡아가라’ 집회에는 항의 표시로 예비군복을 입고 나타난 이들도 있다. 사진 신윤동욱 기자
지난 4월2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제1차 ‘육군 성소수자군인 색출 중단, 나도 잡아가라’ 집회에는 항의 표시로 예비군복을 입고 나타난 이들도 있다. 사진 신윤동욱 기자
탄핵심판 주심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도 합헌이라 한 군형법 92조의6. 성인간 합의된 성관계도 처벌하는 근대국가의 수치 중 수치,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구속될지 모르는 ‘현존하는 위협’이다.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도 처벌받는 법, 유엔이 거듭 강력하게 폐지 권고를 해도, 하급심 법관들의 위헌법률심판제청이 잇따라도 끝내 헌재는 합헌이라 하는 그 법을 육군이 적극 적용하기 시작했다. 전역을 앞둔 한 육군 대위가 지금 그 법으로 구속돼 있다. 군인권센터는 이미 30여명이 같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2017년 촛불대선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새누리, 홍준표는 물론이고 박원순이, 문재인이 그런 신호만 보내지 않았어도 육군이 감히 그렇게 하겠어요?” 나라 활동가는 단칼에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요약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좌절은,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도 힘들다’는 전통야당 후보의 공약은 그렇게 고립돼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사법 권력을 가진 이들의 결정과 표현은 그래서 중요하다. 일부 보수 개신교의 ‘반동성애’ 기획에 한국사회가 무방비로 휘둘린 결과다.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좌초부터 시작된 10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사랑이 죄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사랑이 범죄가 될 줄은 몰랐다.

“군 동성애는 국방전력을 약화시키는데, 어떻습니까? 거기는?”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성애 반대하십니까?” “반대하지요.” “동성애 반대하십니까?” “그럼요.” “근데 박원순 시장은 동성애 파티도 서울 그 앞에서 하고 있는데?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광장을 사용할 권리에서 차별을 두지 않은 것이죠. 차별을 금지하는 것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하고 같습니까?” “분명히 동성애는 반대하는 것이죠?” “네 저는 뭐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4월26일 낮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천군만마 국방안보 특보단 출정식에 참가해 인사말을 하던 중 성소수자 권리 지자자들이 전날 토론에서 문 후보의 `동성애 합법화 반대' 발언에 대해 항의하는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4월26일 낮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천군만마 국방안보 특보단 출정식에 참가해 인사말을 하던 중 성소수자 권리 지자자들이 전날 토론에서 문 후보의 `동성애 합법화 반대' 발언에 대해 항의하는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4월25일 대선후보 방송토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의도적으로 묻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졌을 그 말들을 듣고, 누군가 주저앉는 모습이 보이고,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저러다 사람 잡겠다.’ 위기감에 지인에게 처음 보낸 문자였다. 곧이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절망이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듣고도 믿기지 않아 “지금 반대한다고 한 거 맞죠?”부터 울분을 토하며 “이렇게 존재를 지우시니 사라져드릴게요”까지.(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 <위켄즈>에 나온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소모임 지보이스 음악감독 전재우씨에게 “문재인이 전재우를 반대합니다” 문자를 보냈다. 조선 반도에서 자긍심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가 ‘술 당겨요’ 이모티콘으로 답했다. “벼랑에 매달린 애들이나 붙잡아요”로 답하자 “나부터 잡아줘요”가 돌아왔다. 오늘의 사태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저강도 살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곤 한숨을 쉬었다.

냉전시대 군비경쟁의 저강도 전쟁, 혐오경쟁의 저강도 살인, 그렇게 숨막히는 세상에서 정말로 숨지는 이들이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자살 시도율은 평균의 3~5배에 달한다. 1분 찬스를 쓰면서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를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고 한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말은 인권의 숨구멍이었다. 마침 “반대한다”는 말이 전국에 울려퍼진 이날은 청소년 성소수자 육우당의 14주기 기일이었다. 육우당은 막 시작되던 개신교의 반동성애 움직임을 규탄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숨막히는 14년이었다.

“그래서 뭘 한대요?” “무지개 깃발 가지고 뭐 하나본데.” “애걔··· 겨우?” “그 순한 사람들이 얼마나 하겠냐?” “음··· 죽자고 덤비지 않을까요?”

다음날인 4월26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투쟁 현장마다 어김없이 쫓아다녀, 내가 “21세기 재야”라 부르는 <한겨레21> 사진기자 선배와 나눈 대화다. 문재인 후보가 국회 정문 앞에 도착해 연설을 마칠 무렵,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이 레인보 깃발을 펼쳐들고 앞으로 다가갔다. 변호사인 장서연 활동가가 앞장서고,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활동가가 뒤따랐다. 재빨리 제지하는 경찰과 경호원, 그리고 외침이 엉켰다.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저의 존재를 반대하십니까?” “사과하십시오!” 문 후보는 경호를 받으며 서둘러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그와 어떠한 ‘스킨십’도 없었고, 남은 활동가들은 무지개 깃발을 뺏으려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며 울부짖었다. 집회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가 왜 절박한 약자의 마지막 수단인지 알겠다. “죽자고 덤비는” 것이 고작 힘껏 “사과하십시오!”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친구사이 이종걸 활동가의 뒷모습이 문 후보의 멱살을 잡는 ‘짤’로 둔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비폭력 직접행동의 원칙을 교과서대로 지켰다. 그리고 국회를 나가려는 이들을 경찰이 팔다리를 제압하고 연행했다.

4월2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제1차 ‘육군 성소수자군인 색출 중단, ‘나도 잡아가라’ 집회’에서 공개 결혼식을 올린 김승환, 김조광수씨가 육군의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 신윤동욱 기자
4월2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제1차 ‘육군 성소수자군인 색출 중단, ‘나도 잡아가라’ 집회’에서 공개 결혼식을 올린 김승환, 김조광수씨가 육군의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 신윤동욱 기자
이날 저녁, 서울 영등포경찰서 앞에는 성소수자만 있지 않았다.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함께였고, 영페미니스트들의 깃발이 휘날렸다. 녹색당 성소수자위원회, 노동당 여성위원회 깃발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함께 ‘몰려다니던’ 그때처럼. 참혹한 나날에 단말마 비명이라도 지르지 않았다면 이날 분위기는 침울했을 것이다. 집회 뒤편에서 연행됐다 돌아온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을 만났다. “근데 데모도 안 했는데 감독님은 왜 연행됐데요?” “그렇죠? 그냥 휴대폰으로 촬영만 하고 있었잖아요. 불법 연행이에요!” “강서경찰서에 있는 사람들은 안 와요?” “오겠죠. 빨리 와서 얼마나 얘기하고 싶겠어요.”

찬바람 맞으며 기다린 저녁 9시, 영등포경찰서로 연행됐던 장서연 변호사 등이 나왔고, 강서경찰서에 연행된 큐브(QUV·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활동가들이 도착했다. 장 변호사는 자신을 살려준 이들을 잊지 않고 말했다. “이 땅에서 40년을 살았지만, 20년 전 척박한 땅에서 인권운동을 시작한 동성애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유쾌하게 발언을 시작한 심기용 큐브 의장이 연행 당시를 떠올렸다. “하늘의 말이었나. 어디선가 들렸죠. 누워.” 갑자기 그의 웃는 얼굴에서 울음이 터졌고, 그래도 유쾌한 묘사는 이어졌다. 그것이 어떠한 말도, 어떠한 권력도 훼손하지 못하는 인간의 존엄이자 자긍심의 언어였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이날의 구호는 ‘나를 반대하십니까?’ ‘니가 뭔데 나를 반대해?’ ‘내 친구들 내놔’였다.

성적소수자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의 이혁상 감독은 왜 문재인 후보만 괴롭히냐는 세간의 비난에 이렇게 답했다. “문재인, 난 지난 대선에서 당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런 내가, 이제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당신과 당신 지지자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야 하는가?”

아무 말, 아니 혐오말 대잔치가 열렸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질세라 “동성결혼에 반대한다”고 외쳤다. 방송 토론회에서 동성애자를 에이즈의 주범으로 내모는 쌍팔년도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홍준표 후보는 연이어 “(집권하면) 동성애를 엄벌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급기야 그의 선거운동원들은 지하철역 입구에서 ‘가장 확실히 동성애를 반대하는 후보 홍준표’ 손팻말을 들고 나타났다. 기다렸다는 듯 보수 개신교의 지지가 나왔다. 기독자유당이 홍준표 지지를 선언했다. 전광훈 기독자유당 대표는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 차별금지법 반대 등 기독교가 원하는 모든 사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지지한다”고 말했다. 기독자유당의 요구로 홍준표 후보가 방송토론에서 동성애 질문을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누가 원해서 질문의 덫을 놓고, 누가 그 과실을 즐기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를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반동성애 세력에 맞서지 않는다면 성소수자를 희생양 삼는 정치는 영원히 되풀이될 비극이다. 이미 지구촌에서 소수가 아니라 보편이 된 성소수자 인권은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염원하는 ‘정상국가’의 결정적 퍼즐이기도 하다.

“지난주에 ‘나를 잡아가라’고 했더니 정말 잡아가네요.” 문재인 후보에게 항의했다 연행당한 이가 4월28일 국방부 앞에서 열린 제2차 육군 성소수자 군인 색출 규탄 집회에서 말했다. 첫 집회보다 두 배는 늘어난 참가자들은 묻는다. “색출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 나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는 “불안해하는 현역 군인의 편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날 커밍아웃한 게이인 백승목 성공회대 총학생회장은 “목에 칼이 들어온 것 같은” 고통을 말했다. 그들의 살 떨리는 공포를 나는 모른다.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한 참가자는 “꼭 외치고 싶었다”며 “홍준표를 엄벌에 처하라!”고 외쳤다.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은 “성소수자로서 나의 삶이 인정되는 날은 오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가늘고 길게 살자”고 당부했다. 처연한 봄밤에 떠오른 생각, ‘평생 학대당한 여성이 남편이 사라진다고 기쁠까?’ 친구사이 회원인 한가람 변호사는 “92조의6(을 없애는 것)은 나의 소명”이라고 했다.

1997년 대선후보들의 동성애 관련 발언이 한동안 소셜미디어(SNS)를 떠돌았다.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는 물론 심지어 보수정당 후보들의 답변도 오늘 같진 않았다. 그로부터 성소수자의 20년은 고향에서 난민으로 내몰리고, 보호는커녕 능멸당하는 비시민의 나날이었다. 법률 하나로 ‘차별은 금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월이었다. 무려 2017년 대선에서 심상정을 제외한 모든 주요 후보들이 “동성애 합법화에 반대한다”고 했으니, 어느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말처럼 성소수자는 “불법 사람”이 되었다. 동성혼 법제화가 지구적 대세가 된 시대에 말이다. “성소수자 색출 중단하라!”고 소리치는 이들의 뒤편 국방부 담벼락에는 ‘국방 헬프콜’ 펼침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군범죄·성폭력 상담/신고’ ‘전화번호 1310’. 대한민국이 ‘헬프’는커녕 삭제하고 엄벌하는 비국민의 현실이 펼침막과 대비됐다. “사실이라면, 민주화 이후 최악의 마녀사냥”이라는 정의당 논평이 무색하게 대선에서 이 문제는 이슈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밤과 낮을 기억한다. 지난겨울 어느 밤, 촛불집회가 정리될 무렵 광화문 일대를 거닐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따뜻한 아스팔트 위에서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이 뱃속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흘린 피로~.” 전동휠체어가 삼삼오오 모인 곳 너머로 무지개 깃발이 보였다. 친구사이 지보이스 단원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페미당당’, ‘강남역 10번 출구’ 깃발이 함께 보였고, 성소수자단체들의 깃발 아래 모여 앉은 이들이 있었다. 멀찌감치 서서 가지고 있던 태블릿피시로 사진을 찍고 ‘최전선’이라는 파일명을 붙였다. 촛불집회를 취재하러만 갔던 냉담자가 보기에도 이들은 촛불집회 열성당원이었다. 나중에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씨가 국방부 앞 집회에서 “촛불 이후가 오히려 걱정이었다”라고 했는데, 이날 아늑한 풍경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87년 체제가 배제한 이들이 모인 곳에서 ‘이제 30년이면 충분하지 않으냐’고 혼자서 되뇌었다.

4월20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와 108개 청년/대학생 단체 회원들이 ''대통령 후보들은 평등을 약속하라!''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4월20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와 108개 청년/대학생 단체 회원들이 ''대통령 후보들은 평등을 약속하라!''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아름다운 하루였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주최한 ‘게이 서밋 300’을 취재한 날이었다. 지난 4월15일, 마침 터진 성소수자 군인 색출에 분노한 이들이 모여 대선 요구안을 만들었다.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강당을 가득 메운 이들이 5~10명 모둠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참한 상황이었지만, 참가한 20~30대 청년들은 놀랍게도 동성애자로서 아픈 기억, 불안한 미래만 말하지는 않았다.

제3세계 빈곤아동을 돕는 비정부기구에서 일하는 청년은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말했다. “제가 이성애자였으면 만나지 못했을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 같아요. 게이로서 커뮤니티 나오고 하면서 게임 개발자, 시인··· 되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 많이 만나고 이야기 많이 듣고… 회사에서도 그래요, 어떻게 그렇게 인맥이 넓고 다양한 친구가 많냐고. 국정원 인맥이라고 그러거든요.” 지방에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올라온 동성애자 교사는 “진실을 알기 전에 일베를 통해 혐오를 먼저 배우는 아이들”을 안타까워했다. 성소수자 인권도 그렇게 배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반대하고, 엄벌하려는 이들이 감히 누리지 못할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친구사이가 굳이 대선을 앞두고 서밋을 조직한 이유는 ‘너희는 표가 없잖아’라는 무언의 무시에 ‘우리도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번, ’가장 낮은 이에게 한 것이 너의 모든 것이다.’ 성소수자 의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지금 여기의 인권 척도를 재는 난쟁이들이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는 끝없는 유예에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고 선언한 이들은 ‘지금이 바로 그 나중’이라고 답한다.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나 죽겠다.’ 웃픈 아재개그도 있다. ‘성소수자 인권 없는 민주주의 없다’고 외치는 이들이 성소수자만은 아니다. 구속된 그 대위가 풀려날 때까지 성소수자의 대선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정치다. <끝>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누가 하는 ‘사회적 합의’?

정책자료집에 없으니 물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4월25일 대선후보들에게 보낸 질의서 답변을 공개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기본적으로는 혐오와 차별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고, 구제수단을 마련하는 등 평등을 저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정책을 마련할 것”이라면서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도 반대한다는, 우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다르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에 대해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10여년째 차별금지법 제정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은 여전히 차별과 모욕, 위협과 불안을 견뎌내며, 그리고 존엄을 훼손하는 세상을 먼저 등지고 떠난 친구들을 추모하며,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질의에 응답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발의에 ‘불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수준으로 보호할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한 후보는 정의당 심상정, 민중연합당 김선동 후보였다. 동성혼 합법화에 대해서는 대선 주요 후보 모두가 반대 입장을 밝혔다. 신윤동욱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권성동 “시위대에 일방적 책임 물을 수 없어…경찰이 과잉 대응” 1.

권성동 “시위대에 일방적 책임 물을 수 없어…경찰이 과잉 대응”

법원이 무법천지로…윤석열 지지자 유리 박살, 소화기 분사 [영상] 2.

법원이 무법천지로…윤석열 지지자 유리 박살, 소화기 분사 [영상]

“곧 석방될 것” 윤상현, 지지자들에 문자…“사실상 습격 명령” 3.

“곧 석방될 것” 윤상현, 지지자들에 문자…“사실상 습격 명령”

전광훈 “탄핵 반대 집회에 사람 데려오면 1인당 5만원 주겠다” 4.

전광훈 “탄핵 반대 집회에 사람 데려오면 1인당 5만원 주겠다”

이준석 “서부지법 난동, 백골단 추켜올릴 때 예고된 불행” 5.

이준석 “서부지법 난동, 백골단 추켜올릴 때 예고된 불행”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