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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문자 해고’에서 대선주자로…억세게 운좋은 황교안의 길

등록 2017-02-10 21:11수정 2017-02-13 16:27

[토요판] 커버스토리
‘정치의 늪’으로 한걸음, 멀어지는 ‘목회자의 꿈’
황교안(59) 대통령 권한대행은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이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완구 총리가 2015년 5월 중도 하차함에 따라 느닷없이 국무총리가 됐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김병준 책임총리 후보자의 등장으로 이임식까지 예정됐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2월9일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다. 그는 과거 검사 때도 옷 벗을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 검사 시절 황교안 권한대행의 꿈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꿈을 실현하기에는 이제 그의 덩치가 너무 커졌다. 황 권한대행은 요즈음 여권의 대선주자 가운데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여차하면 과도기 관리자를 넘어 보수세력의 대변자로 변신할 가능성도 있다. 주식시장에 비교하면 그의 인생은 최근 연일 상종가다. 대통령 대행을 맡고 있는 그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오른쪽 작은 사진은 6일 오전 국회에서 본회의장으로 향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황교안 국무총리. 경기고 72회 졸업앨범,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황교안(59) 대통령 권한대행은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이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완구 총리가 2015년 5월 중도 하차함에 따라 느닷없이 국무총리가 됐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김병준 책임총리 후보자의 등장으로 이임식까지 예정됐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2월9일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다. 그는 과거 검사 때도 옷 벗을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 검사 시절 황교안 권한대행의 꿈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꿈을 실현하기에는 이제 그의 덩치가 너무 커졌다. 황 권한대행은 요즈음 여권의 대선주자 가운데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여차하면 과도기 관리자를 넘어 보수세력의 대변자로 변신할 가능성도 있다. 주식시장에 비교하면 그의 인생은 최근 연일 상종가다. 대통령 대행을 맡고 있는 그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오른쪽 작은 사진은 6일 오전 국회에서 본회의장으로 향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황교안 국무총리. 경기고 72회 졸업앨범,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대통령 권한대행인 황교안 국무총리가 요즈음 속된 말로 뜨고 있습니다. 보수 여권에서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입니다. ‘리얼미터’의 지난주 여론조사(2월6~8일)에서 황교안 권한대행은 여러 명을 한꺼번에 대상으로 했을 때 15.9%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33.2%)에 이어 2위를 기록했습니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의원(3.5%)에 비하면 12%포인트나 앞서고 있습니다. 그가 관리자 자리를 버리고 선수로 대선에 나올까요? 가능성을 따져보기 위해 그가 살아온 길을 되짚어봤습니다.

“장관보다 공안검사가 가장 적성에 맞는다.”

황교안은 법무부 장관 시절 한 언론과의 인터뷰(<동아일보> 2015년 5월18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안검사가 적성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사람은 1948년 검찰청법이 만들어진 이후 아마도 그가 처음일 것이다. 대부분의 공안통 출신들은 공안 경력을 내세우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공공의 안녕과 질서’(공안)를 유지한다는 좋은 목적에서 출발했지만, 대공 분야나 학생운동, 노동 사건 등을 다루는 공안검사들이 독재정권 시절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많이 해온 터라 이미지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대로 황교안은 자타가 공인하는 공안통이다. 사법연수원 13기(사시 23회·1981년 합격)인 그는 1987년 서울지검 공안검사를 시작으로 검사로 있는 동안 주로 공안 파트에서 일했다. 대검찰청 공안 1·3과장과 서울지검 공안2부장을 지냈으며, 공안을 총괄하는 서울지검 2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현희 칼(KAL)기 폭파 사건과 임수경 방북 사건 등 굵직한 공안 사건을 다뤘다. 또 1980년대 말의 학생운동 등 시국사건도 도맡다시피 했다.

이전 정권에서 출세가 보장됐던 공안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공안검사들이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얼마나 유린했는지를 잘 아는 김대중 정부는 취임 직후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 △인권보장의 조화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신공안’ 개념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구공안’의 대표주자들인 안강민·최병국·주선회 검사장과 이상형·함귀용 검사 등이 대거 좌천됐다. 대신 인권도 중시하는 ‘신공안’이 공안 요직을 차지했다.

2015년 6월18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된 황교안 신임 국무총리가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5년 6월18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된 황교안 신임 국무총리가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젠틀한 얼리어답터 검사

체제 수호의 역군을 자처하는 ‘구공안’들은 저항했다. 당시 한 지방검찰청에서 시위 대학생 등을 불구속 수사하려 하자, 구공안의 평검사가 회식 자리에서 신공안 쪽의 공안부장에게 “부장은 대한민국 공안부장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장이냐”고 대들기도 했다.

황교안도 변화를 거부하는 쪽에 섰다. 그는 김대중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 6월 <국가보안법 해설>이란 책을 썼다. 2011년 다시 출간한 책 머리말에서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기 위한 안보형사법이다. 우리의 안보 여건이 변하지 않는 한 정치권의 이해득실에 따라 그 개정이나 폐지가 논의될 수 없는 국가의 기간법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책을 낸 이후 그에게는 ‘미스터 보안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이 호칭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국가보안법은 오래전부터 유엔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철폐 내지는 대폭 개정을 권고하고 있을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법이다.

그는 대부분의 공안검사가 그렇듯이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등 업무 능력이 꽤 뛰어났다는 평을 듣는다. 당시 검찰을 취재했던 한 전직 언론인은 “그는 말수가 적고 젠틀했다. 그러면서도 사건 처리를 잘해서 평이 좋았다. 타자기를 사용하던 1980년대 말에 그는 개인 컴퓨터를 구입해서 조서를 받는 등 얼리어답터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교안은 정권이나 기득권 보호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법의 잣대를 달리했다. 2005년에 불거진 ‘삼성 엑스(X)파일’ 수사가 대표적이다. 당시 서울지검 2차장이던 황교안이 수사를 지휘했다. 삼성 엑스파일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 이학수와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떡값’을 전달하는 얘기가 담긴 테이프였다. 당시 두 사람의 대화를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도청한 것을 안기부 전직 직원이 유출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서울지검은 안기부 도청 사건(특수1부)과 삼성의 비자금 조성 및 로비 의혹(공안1부)을 나눠 수사했다.

목청 좋았던 학도호국단 연대장

당시 검찰은 도청 부분에 대해서는 불법 감청의 실태를 파헤치는 성과를 냈지만, 떡값 로비 부분은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에게 서면조사만 한 차례 하는 등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삼성 관계자와 떡값을 받았다는 검사를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반면에 파일에 나오는 떡값 검사의 이름을 밝힌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 노회찬과 이를 보도한 <문화방송>(MBC) 기자 이상호, <주간조선> 편집장 김연광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로 인해 노회찬은 결국 의원직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황교안은 당시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는 수사를 했다”고 말했다.

2013년 법무부 장관 재임 시 국정원의 댓글 사건 수사 때도 정권 보호를 위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검찰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은 2012년 대선 때 국정원 직원들에게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인터넷 댓글을 달게 하는 등의 지시를 했던 원세훈(당시 국정원장)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황교안은 공직선거법 적용을 뺄 것과 불구속 기소를 할 것을 요구하면서 결재를 미뤘다. 결국 공직선거법을 적용하되 불구속하는 것으로 조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2015년 2월 원세훈은 2심 법정에서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

요직 두루 거친 공안통 출신
“공안검사가 적성” 실토도
“업무처리 잘해” 평 있으나
정권보호 앞장선 ‘구공안’

‘삼성 떡값’ 검사에겐 면죄부
실명 공개 노회찬은 기소
검사장 승진 두차례 누락
엠비 정부 들어 되레 영전

황교안은 앞서 2005년 ‘동국대 강정구 교수 사건’(인터넷에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등의 글을 올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 때는 불구속 수사를 주장하는 법무부 장관 천정배에게 맞서 피의자의 구속을 고집했다.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으로 강정구는 불구속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가 1994년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검사 시절 국가보안법 피의자에게 수사기록 복사를 거부한 것도 민주주의 법 질서에 위배되는 독단적이고 자의적 행위였다. 그의 부당한 법 집행에 대해 피의자 쪽은 헌법 소원을 제기했고, 3년 뒤 헌법재판소는 황교안의 처분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2015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가 끝난 뒤 황교안 총리 후보자가 승강기에 오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2015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가 끝난 뒤 황교안 총리 후보자가 승강기에 오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황교안은 역사의식이나 사회적 현안에서도 철저한 구공안에 속한다. 그는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에서 “집시법 역시 4·19 혁명 이후 각종 집회와 시위가 급증하여 무질서와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5·16 혁명 직후 제정되었다”며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규정했다. 2013년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 때도 그는 5·16에 대해 “역사, 정치적으로 다양한 평가가 있다”며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야당 의원들의 집중 추궁에 “교과서에 5·16 군사정변으로 나와 있는 것에 공감한다”고 마지못해 답했다.

황교안의 이러한 성향의 뿌리는 청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중등학교까지 황교안은 여느 공부 잘하는 학생처럼 반장을 도맡아 하는 등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그와 함께 서울 봉래초등학교에 다닌 한 동창은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 또래들과 달리 점잖고 차분해서 선생님들한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황교안은 마포의 광성중을 거쳐 1973년 경기고(72회)에 입학했다.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 체제를 출범시킨 ‘10월 유신’ 이듬해였다. 학교도 유신 독재의 예외 지대가 아니었다. 자치조직인 학생회가 폐지되고 대신 학도호국단이라는 준군사적인 학생조직이 강요됐다. 동기생이던 노회찬과 이종걸 등은 1학년이던 1973년 10월 유신 선포 1주년을 맞아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반면에 황교안은 온순한 모범생이었다. 이종걸(민주당 의원)은 “교안이는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 불러서 4중창단 등 다른 활동도 많이 했다. 그는 학예회 때 톱을 켜서 연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병역면제(담마진)는 선배가 준 팁?

황교안은 3학년 때는 학도호국단의 연대장(학생 대표)이 됐다. 노회찬(정의당 의원)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용적인 성격의 학도호국단 간부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긴 해도 대체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들이 많았다. 따라서 당시 임명직인 연대장 자리를 맡는 것 자체가 체제 순응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 때 공부를 꽤 잘했다. 가끔씩 최상위 그룹에 속하는 전교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상위 학생들이 그랬듯이 황교안도 서울대 법대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는 합격하지 못했고, 이듬해인 1977년 재수를 하고도 다시 떨어지자 후기인 성균관대 법대에 진학했다. 성균관대에서는 곧바로 고시반에 들어가서 사법시험 공부에 몰두했다. 1978년 10대 총선에서 야당이 투표수에서 여당인 공화당보다 앞서는 등 유신체제에 균열이 시작되고, 1979년 와이에이치(YH) 여공 농성 사건을 시작으로 반유신 투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이때 황교안의 최대 고민은 군 입대 문제였다. 대학 졸업(1981년 2월)이 다가왔지만, 4학년(1980년) 때까지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성균관대 법대 동기는 “어느날 서클실 앞을 지나다가 교안이를 만났는데 그가 나를 붙잡고 2시간이 넘도록 고민을 얘기했다. 그는 군대를 미루기 위해 대학원을 가야 할지 아니면 입대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고 말했다. 황교안은 1980년 7월 신체검사에서 ‘만성 담마진(두드러기)’ 판정을 받아 징집 면제됐고, 이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15년 6월 총리 후보 인사청문회 때 자료에 따르면, 만성 담마진으로 병역 면제를 받은 사람은 2002년부터 2012년까지 365만여명 가운데 4명에 불과했다. 위의 성균관대 동기는 “고교 때나 대학 때 교안이한테 두드러기 증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의 군 면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경기고 출신 언론인들의 모임인 화동클럽 단체카톡방에 재밌는 내용이 하나 올라왔다. 경기고 한 해 선배인 아무개 의사가 당시 황교안에게 만성 담마진으로 군대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중요한 팁을 알려줬다는 내용이다.

아내를 복음성가 가수 데뷔시켜

공안검사가 황교안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라면 그의 정신세계를 떠받치는 또다른 기둥은 기독교 신앙이다. 그는 독실한 침례교인이다. 지금도 그는 서울 목동에 있는 성일교회의 전도사다.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에 서울 수도침례신학교를 야간에 다니면서 신학을 전공했다. 그는 검사 시절 “부임하는 검찰청에서마다 새로이 신우회를 조직하거나, 이미 있는 곳에서는 함께 참여해 직장복음화 활동을 펼쳐나갔다”고 <국민일보> 기고문(2007년 7월5일)에서 밝혔다. 그는 기독교 민영교도소를 운영하는 재단법인 ‘아가페'의 이사를 맡기도 했으며, <종교활동과 분쟁의 법률지식>(1998년), <교회가 알아야 할 법 이야기>(2012년) 등 기독교 관련 저서도 여러권 썼다.

국무총리에 취임한 직후인 2015년 6월21일 황교안 총리와 아내 최지영(왼쪽)씨가 자신이 50년째 다니는 서울 목동 성일교회 예배에 참석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성일교회 누리집 갈무리
국무총리에 취임한 직후인 2015년 6월21일 황교안 총리와 아내 최지영(왼쪽)씨가 자신이 50년째 다니는 서울 목동 성일교회 예배에 참석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성일교회 누리집 갈무리

황교안은 낮에는 검사로서의 업무를 하지만, 밤에는 신앙 일을 했다. 아내 최지영(55)은 “(남편은) 어김없이 새벽 2시에 기상을 한다. 기도시간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서 남편은 교회에서 가르칠 성경교재를 만든다. 그렇게 성경교재를 만들기 시작한 지 11년. … 저녁 9시에 취침을 하고 새벽 2시에 기상을 하는 남편은 결혼 이후 한 번도 변화를 주지 않았다”(<주간기독교> 1998년 11월15일)고 밝혔다. 신앙인으로서 황교안의 꿈은 목사다. 부산고검장 시절 “앞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반드시 목회자가 되는 것이 그의 영적 꿈이었다고 부산기독기관장회 멤버로 참여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한국기독신문> 2015년 11월5일)는 보도도 있다.

황교안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10살 때부터였다. 교회에 나오면 왕사탕 두 개를 살 수 있었던 액수인 10환을 주겠다는 큰누나의 설득에 따라 나간 것이 계기였다. 그는 그 후 “방언이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은혜 등 신앙적 체험”(위 <국민일보> 기고문)을 했다고 밝혔다.

그가 나간 교회는 목동의 성일교회다. 작은누나인 황연숙(65)에 따르면, 성일교회는 1967년 황교안의 큰누나 방에서 개척교회로 출발했다(<팩트올> 2017년 2월6일). 초창기부터 황교안의 어머니(전칠례·1995년 작고)를 비롯해 가족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황교안 부부와 황연숙 등은 50년 동안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성일교회 권사였던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황교안은 1996년부터 가정형편이 어렵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교회 학생들에게 매년 ‘전칠례 장학금’을 주고 있기도 하다.

황교안의 아내도 남편 못지않게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최지영은 같은 대학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상담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땄다. 충남 천안에 있는 나사렛대학교 교수(상담)로 있는 최지영은 복음성가 음반인 <위대한 유산>을 내기도 했다. 황교안이 그에게 음반을 내도록 권유했다. 황교안은 1990년대 말 서울 등촌동의 한 초청 집회에서 만난 성가사 방영섭에게 아내의 보컬 레슨을 부탁했다(‘아멘넷’(usaamen.net) 2009년 9월4일).

문제는 그의 신앙이 사적인 영역에 그치지 않고, 공적인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2007년 경기도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탈레반에 납치됐을 때였다. 당시 무분별한 선교활동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일자, 황교안은 자신의 블로그에 ‘아프간으로 가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인터넷에서는 정부에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갔느냐는 비난이 빗발치고, 심지어 교계에서조차도 한국 교회의 ‘공격적 선교정책’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마치 분당 샘물교회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처럼 비난한다. 그런데 과연 납치된 그들은 비난받을 일을 한 것인가?”라며 썼다. 이슬람 등 타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없다.

<교회와 법 이야기>의 일부 내용은 아예 실정법보다 교회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주일에 사법시험 치르는 것을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결정해 유감이다.”

“교회를 노동법상의 사용자로, 교회 직원을 노동법상의 근로자로 보는 것은 심히 부당한 결론이다.”

“목회자의 사례비는 일반 급여와 그 성격이 현저히 다르고, 그 원천이 된 성도들의 헌금에 대해 이미 성도들이 세금을 납부한 것일 뿐 아니라, 종교 자유의 보장을 위해서도 소득세 비과세 대상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지극히 기독교 편향적이거나 기독교 중심적이다.

삼성 엑스(X)파일과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수사를 지휘한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가 2005년 5월14일 오후 지검 청사에서 ‘안기부·국정원 도청'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삼성 엑스(X)파일과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수사를 지휘한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가 2005년 5월14일 오후 지검 청사에서 ‘안기부·국정원 도청'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김성호와 정홍원이 은인

공안통으로 승승장구하던 황교안에게 제동이 걸린 것은 노무현 정부 때였다. 2006년 검사장 승진 때 그는 탈락했다. 서울지검 2차장이 승진 안 된 것은 전례가 드물었다. 삼성 엑스파일에 대한 수사 부실과 강정구 교수 사건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이런 경우 통상적으로 옷을 벗지만 그는 남았다. 이듬해인 2007년에도 승진이 안 됐지만 그는 버텼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은 그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2008년 초 사실상 다음해 검사장 승진을 약속받으면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인사는 “검찰 근무 때부터 황교안을 아끼던 김성호 당시 국정원장이 그를 기획부장 자리에 밀었다. 그 덕에 다음해인 2009년 황교안은 4년 만에 검사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8월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난 뒤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펌 변호사로 그는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는 2013년 3월 법무부 장관으로 가면서 태평양을 떠날 때까지 16개월 남짓의 변호사 생활 동안 16억원, 한 달 평균 1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서울지역의 한 변호사는 “월 1억원 정도의 고액은 전관예우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 결국 그가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다고 봐야 한다. 공직 진출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 전관예우를 받는 로펌에 가거나 개업을 하지 않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꿈이었던 목회자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황교안이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배경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당시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일했던 한 정치권 인사는 “그가 선거 때 캠프에서 일했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법무장관으로 내정돼 의외였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출신의 선배이자 검사 시절 황교안의 멘토였던 정홍원(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총리)이 추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공안검사의 대부 격인 김기춘(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적극 밀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박근혜 정부 위해 분골쇄신
국정원 댓글 수사 막고
통합진보당 해산 주도
5·16도 ‘혁명’으로 규정

낮엔 검사, 밤엔 전도사 역할
새벽 2시부터 밤새 성경공부
“목회자가 꿈” 신앙고백
‘기독교 중심주의 사고’ 빠져

황교안은 법무부 장관으로서 공정한 법 집행보다는 ‘박근혜 코드’에 맞춰서 움직였다. 정권으로서는 최대의 위기였던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를 억눌렀다. 그는 2013년 5월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들먹이면서 원세훈에 대한 선거법 위반 적용과 구속 청구를 1주일 동안이나 막았다. 특별수사팀의 버티기로 선거법 적용이 겨우 이뤄졌지만, 그는 결국 특별수사팀을 교체했다. 또 댓글 수사 사건에 대한 외풍을 막아주던 검찰총장 채동욱의 혼외자 의혹이 <조선일보> 보도로 불거지자,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총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다. 결국 채동욱은 옷을 벗었고, 검찰총장은 정권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김진태로 바뀌었다.

1975년 경기고 학도호국단 연대장(총학생회장에 해당) 때의 황교안 총리(맨 앞쪽 어깨띠와 완장을 찬 이)의 모습. 경기고 72회 졸업앨범 갈무리
1975년 경기고 학도호국단 연대장(총학생회장에 해당) 때의 황교안 총리(맨 앞쪽 어깨띠와 완장을 찬 이)의 모습. 경기고 72회 졸업앨범 갈무리

황교안은 또 진보정당인 통합진보당 해산에도 앞장섰다. 2013년 8월 통합진보당 의원 이석기의 이른바 ‘아르오(RO) 사건’(대법원은 2016년 9월 혁명조직이라는 아르오는 실체가 없다는 판단과 함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석기 등의 내란선동 혐의는 인정됐다)이 터지자, 법무부는 정점식 법무연수원 기획부장 등 7명의 검사로 ‘위헌정당·단체 관련 대책 티에프’를 만들고, 그해 11월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황교안은 이듬해 11월 헌재 재판정에 나가 “통합진보당이 존재하는 한 국가와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정당 해산을 주장했다. 2014년 12월19일 통합진보당은 결국 해산됐다. 참여연대는 당시 성명에서 “헌법재판소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치명상을 입혔다”고 비판했으며, “강제 해산을 청구한 정부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고건 권한대행과 대조적인 행보

그러나 황교안은 댓글 수사를 막고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시킨 공으로 박근혜 정부의 실세가 됐다.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 진영이나 박근혜의 총애를 받았던 정무수석 조윤선이 재직 기간 동안에 대통령과의 독대를 한 번도 못 했던 데 비해 황교안은 “필요한 경우에 하고 있”는(<동아일보> 2015년 5월18일) 실력자로 떠올랐다. 2015년 5월 황교안은 박근혜에 의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국무총리 자리에 선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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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은 요즈음 자신의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추측과 언론의 보도를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연일 “(대선 관련 입장을 밝힐) 적당한 때가 있을 것”이라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고건이 탄핵 결정이 내려지면 출마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국무조정실장 한덕수의 말에 “절대 안 될 일이다. 내가 권한대행으로 국가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는 사람인데 누구한테 맡기고 입후보를 하느냐”고 단칼에 물리쳤던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황교안의 선택에 대해서는 불출마 가능성을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출마를 점치는 쪽보다 훨씬 더 많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출마하는 것은 명분이나 정치 도의상 맞지 않으며,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얻을 수 있는 실리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설령 나오더라도 박근혜 정부 실패에 대한 공동책임론 때문에 중도층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며 “지고 나면 현재 여당의 당권을 정치 경험이 없는 그가 틀어쥐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모호한 태도를 지금 취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여권 지지자들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도 “출마를 감행할 정도의 정치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교안에게 남은 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전략적 모호성을 즐기는 대가로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보수의 희망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검사 시절 소박하게 꿈꾸었던 목회자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높게, 멀리 왔다. 대선에 출마를 하든 하지 않든 정치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본 기사에서 인용된 리얼미터 여론조사는 MBN·매일경제가 의뢰해서 이뤄진 조사로, 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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