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교인 부산 경남고 학생들이 23일 학교 안에 마련된 분향소 앞에서 단체 조문을 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부산/연합뉴스
한국 정치에 남긴 그늘과 과제
“하루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 … /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민주정의당(노태우)·통일민주당(김영삼)·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3당 합당 선언 9개월 뒤인 1990년 10월, 가수 정태춘은 제5공화국 ‘주제가’였던 가수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을 비틀어 음반 <아, 대한민국…>을 내놓는다. 가사 속 ‘배신의 민주인사’는 3당 합당의 주역인 김영삼이 분명하다.
‘영남 패권’ 부른 배신의 정치
지역주의 극복 명분 삼았지만
특정지역 왕따만들기 ‘전국화’
여소야대 붕괴로 대화·타협 실종 ‘문민정부’ 성과로 평가해야 야당 셋 갈라져 선거론 못이겨
하나회 척결-전·노 법정에 세워
군부독재 종식, 호랑이 잡은 셈 22일 서거한 김영삼(YS·와이에스) 전 대통령의 3당 합당 결정은 영호남 지역구도 고착, 영남 지역패권주의 심화, ‘기형적 보수 우위’의 정치지형을 강화한 ‘배신의 정치’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3당 합당 이후 총선과 대선 등 정치 변곡점마다 영남 대 호남, 또는 호남 대 비호남의 지역 대결이 펼쳐졌다. 와이에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1992년 14대 대선 역시 ‘반호남’을 기치로 한 ‘전국적 지역연합 구도’로 치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태우와 김영삼의 정치공학적 이해가 맞물리며 3당 합당이라는 ‘보수 대연합’으로 이어졌다는 데엔 큰 이견이 없다. 노태우는 1988년 총선에서 빚어진 여소야대 구도 탈피가 절실했다. 김영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70석)에 이어 제2야당으로 전락한 통일민주당(59석)으로는 대선을 도모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3당 합당’을 주도한 쪽은 ‘독재세력에 대한 투항·변절’이라는 평가를 단호히 부정한다. 김덕룡 전 의원은 23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당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며 “여당은 군사정권 하나였고 야당은 셋으로 갈라져 아무리 선거로 싸운다고 한들 결과가 뻔했다. 군부통치라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갔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3당 합당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냉정한 편이다. 유권자(시민)들이 투표로 결정한 4당 체제를 인위적으로 허물어버린 지역정치의 결정타란 비판적인 평가가 많다. 김욱 배재대 정치언론학부 교수는 “사실은 3당 합당으로 영호남 갈등을 더 키웠다. 4당 체제의 지역 분할은 건강한 측면이 있었는데 3당 합당은 특정 지역을 왕따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다당제가 정착하고, 거대정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제가 아닌 다른 선거제도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평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1987년 양김 분열로 인한 영호남 균열과 이듬해 총선에서 나타난 4당 체제의 지역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3당 합당 명분으로 동원되지만, 오히려 인위적 3당 합당은 영남 대 호남,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전국적 지역균열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질식하는 출발점을 3당 합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박상훈 대표는 “3당 합당 직전의 4당 체제를 혼란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특히 재벌, 군, 관료들이 여의도 정치를 무서워했던 때는 그때가 유일했다”고 짚었다. ‘여소야대’ 구도는 여당이 야당의 개혁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엔 “여소야대 시절인 1988년에는 야당 주도로 많은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임기 중 입법된 양의 70%를 넘을 정도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 5공 청문회, 토지공개념 등의 정치적 성취들은 4당 체제에서 이뤄진 것들이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의 최장수 대변인이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도 저서에서 “당시 여소야대 정치상황 속에서 여당은 필요한 입법을 하기 위해 때로는 공화당과 손잡고, 두 야당의 협력을 구하기도 했다. 타협의 정치를 시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만일 통합(3당 합당)을 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계속했더라면 우리의 정치 문화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반면 3당 합당의 부정적 결과보다 문민정부라는 실체적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목진휴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큰 틀에서 보면 3당 합당이 지배세력이라 할 수 있는 군부세력을 밀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문민정부는 시기적으로 훨씬 더 뒤로 미뤄졌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짧은 기간 4당 체제에서의 합종연횡보다도 의미가 크다. 3당 합당의 결과는 하나회 척결과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우는 상상도 못할 결과로 이어졌다. 호랑이를 잡은 것”이라고 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특정지역 왕따만들기 ‘전국화’
여소야대 붕괴로 대화·타협 실종 ‘문민정부’ 성과로 평가해야 야당 셋 갈라져 선거론 못이겨
하나회 척결-전·노 법정에 세워
군부독재 종식, 호랑이 잡은 셈 22일 서거한 김영삼(YS·와이에스) 전 대통령의 3당 합당 결정은 영호남 지역구도 고착, 영남 지역패권주의 심화, ‘기형적 보수 우위’의 정치지형을 강화한 ‘배신의 정치’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3당 합당 이후 총선과 대선 등 정치 변곡점마다 영남 대 호남, 또는 호남 대 비호남의 지역 대결이 펼쳐졌다. 와이에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1992년 14대 대선 역시 ‘반호남’을 기치로 한 ‘전국적 지역연합 구도’로 치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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