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최연소 국회의원·독재맞선 민주화 투사…3당합당 뒤 문민정부 열어
금융실명제·하나회 청산·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 등 개혁 앞장
오락가락 개혁정책·IMF 구제금융 위기·임기 중 친인척 비리 얼룩도
최연소 국회의원·독재맞선 민주화 투사…3당합당 뒤 문민정부 열어
금융실명제·하나회 청산·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 등 개혁 앞장
오락가락 개혁정책·IMF 구제금융 위기·임기 중 친인척 비리 얼룩도
한국 현대사에서 김영삼만큼 영욕이 뚜렷하게 교차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독재시대에는 불굴의 민주화투사였고, 대통령이 돼서는 정치군인 청산과 금융실명제 실시, 전두환 노태우 처벌 등 과감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많은 개혁을 성취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집권을 위해 독재세력과 손잡은 변신의 정치인이었고, 대통령 재직 때엔 오락가락하는 대북정책과 아이엠에프(IMF) 구제 금융위기 등으로 이룩한 성과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김대중과 함께 ‘양김’으로 불리거나 김종필을 포함해 ‘3김’으로 회자되며 한국정치에 굵고 선명한 족적을 남긴 정치거목이었다.
김영삼은 1928년 경남 거제의 멸치잡이 선주인 김홍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영삼은 부산 경남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1950년 2대 민의원 선거 때 자유당 정치거물 장택상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장택상 비서관을 거쳐 1954년 3대 총선 때 김영삼은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26세) 국회의원이 됐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붕괴 이끌어
그러나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김영삼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탈바꿈한다. 이승만 정권과 집권 자유당이 54년 11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어거지 해석으로 가결하자, 김영삼은 동료의원 10여명을 규합해 자유당을 탈당한 뒤 이듬해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합류했다.
1960년 4.19 혁명 후 구성된 장면 정부 시절 김영삼은 잠시 여당(민주당) 의원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본격적인 민주화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박정희 집권이 장기화하면서 유진산 등 야당 지도자들이 타협적으로 변했을 때 김영삼은 오히려 비타협적인 ‘선명 야당’의 노선을 걸었다. 1970년 ‘40대 기수론’으로 야당 대선 후보에 도전에 나선 데 이어 1974년 전당대회에서 마침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됨으로써 그는 야당 지도자로 우뚝 선다.
특히 1979년 5월 신민당 당권 경선에서 김영삼이 김대중의 도움을 받아,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던 이철승을 극적으로 누른 것은 이후 한국 정치사의 흐름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는 고리의 출발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당 총재로서 김영삼은 그해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때 노동자편에서 싸우는 등 박 정권과 정면에서 맞섰다. 이에 박 정권은 김영삼을 당 총재직(9월)과 국회의원직(10월)에서 제명했다. 이는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반정부 시위에 나서는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시위 진압을 놓고 온건론을 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강경론의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박정희를 쏘는 10.26 사건으로 이어진다.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은 5.18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폭압적인 분위기를 뚫고 5.18 3주기를 맞은 1983년 5월18일부터 6월10일까지 23일 동안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의 투쟁으로 힘을 얻은 야권은 민주화추진협의회(1984년) 결성을 거쳐 신한민주당(1984년)을 창당해 1985년 12대 총선에서 관제야당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는 돌풍을 일으켰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커다란 균열을 만든 야당의 이러한 전열 정비는 학생운동 등 재야 민주화세력과 결합해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냈으며, 결국 대국민 항복선언인 노태우의 6.29선언을 끌어냈다. 야당 시절 김영삼은 1969년 상도동 자택 부근에서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 사건과 1980년대 초 장기간 가택 연금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평생 김대중과 숙적관계
김대중을 빼놓고는 김영삼의 생애를 설명하기 어렵다. 양김씨로 불린 두사람의 라이벌 관계가 본격화한 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였다. 김영삼이 먼저 ‘40대 기수론’을 주창했지만, 경선 2차 투표에서 그는 김대중에게 역전패했다. 나이도 비슷한 두 사람은 이후 상도동계(김영삼)와 동교동계(김대중)로 불리는 계보를 형성해, 야당 지도자 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경쟁한다.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74, 79년)과 민추협 결성, 신한민주당 창당 등 정권의 탄압이 거셀 때는 서로 힘을 합쳐 협력했지만, 1980년 서울의 봄과 1987년 민주화 이후 등 합법적인 공간이 열렸을 때는 양보 없이 대립했다.
특히 198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리를 놓고 벌인 양김씨의 갈등은 민주세력의 영구적인 분열을 가져왔다. 대통령 후보 선출방식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김대중은 동교동계를 이끌고 통일민주당을 나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부산 경남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이듬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3당으로 전락했다. 제2야당이라는 비참한 신세를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김영삼은 1990년 노태우의 요청을 받아들여 3당합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결행한다. 오랫동안 투쟁의 대상이었던 쿠데타 세력과의 결합을 그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했지만, 노무현과 김정길, 이철, 이기택 등은 3당야합이라며 동참하지 않았다. 3당합당은 영남의 지역패권주의 강화와 함께 ‘이기면 된다’는 그릇된 승리 지상주의, 민주진보세력의 지역적 분열로 인한 정치발전 지체 등 한국 정치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남겼다.
두둑한 배포와 신속한 결단, 밀어붙이기 등을 특징으로 하는 김영삼의 정치스타일은 3당 합당 이후 더 두드러졌다. 그는 합당 당시 약속했던 내각제 개헌 합의서가 공개되자, 도리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가 당무를 거부한 끝에 노태우쪽으로부터 사실상 내각제 포기를 받아냈다. 또, 그는 소수파임에도, 노태우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박철언, 노재봉, 박태준 등 다수파인 민정계 출신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차례로 승리해 민자당 대선 후보가 됐다. 1992년 말 14대 대선에서 초원복국집 사건 등에도 불구하고 오랜 정적인 김대중을 이겼다.
화려한 개혁, 비참한 임기말
1993년 2월 말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김영삼은 전광석화처럼 각종 개혁조처를 쏟아냈다. 취임 초 자신의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고위공직자들의 재산공개제를 도입했으며, 검은돈을 차단하기 위한 금융실명제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해산 등 정치군인들을 대거 축출했으며, 고위공직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작업도 진행했다. 비자금 축재와 군사쿠데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구속하는 등 역사바로세우기 작업도 밀어붙였다. 군사정권의 적폐를 청산하는 과감한 개혁조처로 인해 김영삼은 한때 90%대의 지지율을 기록할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김영삼은 합당의 파트너였던 김종필이 1995년 탈당해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을 만든 뒤 김대중과 1997년 대선에서 연대함으로써 임기말에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신세가 됐다. 차남 현철의 국정 농단과 한보비리 연루 등도 큰 상처가 됐다. 냉온탕을 오락가락한 대북정책이나 “버르장머리” 등 비외교적 언사로 인해 미·일 등과의 대외관계도 나빠졌다. 특히 경제정책에서는 맹목적인 민영화 추진과 금융정책 실패 등으로 97년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하는 등 최악의 성적표를 남겼다. 퇴임 직전 그의 지지율은 한자릿수로 떨어졌다. 그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아쉽고 미흡한 부분이 더 많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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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2월 서울대 졸업식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한겨레 자료
1970년 9월29일 ‘40대 기수 3명’이 겨룬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예상을 뒤엎고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사진은 애초 선두 후보였으나 2차 결선 끝에 패배한 김영삼이 당선자 김대중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 1993년 2월
김영삼 전 대통령 연표
1927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
1947년 서울대 철학과 입학
1951년 손명순과 결혼
1954년 경남 거제서 제3대 국회의원 당선(자유당·최연소)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항의 자유당 탈당
1955년 민주당 창당 합류
1960년 어머니 박부련 무장공비에 피살
1963년 민정당 대변인
1965년 민중당 원내총무(최연소)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출마(40대 기수론)
1974년 신민당 총재
1979년 신민당 총재
1979년 신민당 총재직 및 의원직 제명
1980년 가택 연금
1981년 민주산악회 조직
1983년 민주화 요구 23일간 단식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7년 통일민주당 총재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낙선
1990년 3당합당·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
1992년 민주자유당 총재
1993년 14대 대통령 취임
1995년 신한국당 총재
1998년 대통령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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