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일 아침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와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공천 개입에 맞서 드디어 실력 행사에 나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무성 대표가 PK(부산 경남) 출신이라는 것,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문하생으로 정치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김 대표도 ‘PK 유전자’를 물려받은 줄 알았는데…
PK 정치인들은 다른 지역 정치인들과 달리 한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장애물이 앞길을 가로막으면 우회하지 않고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식의 적극적인 자세는 종종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잘못될 경우 크게 다치고 낭패를 보는 위험 부담도 있습니다. 추정컨대 바닷가라는 지역적 특성이 그 지역 출신 정치인들에게 특별히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인 성향을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런 성향의 대표적인 정치인입니다. 그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정치인과 언론인들은 1990년 당무 거부 및 마산행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3당 합당’ 과정에서 작성했던 ‘내각제 합의 비밀 각서’가 10월에 언론에 갑자기 공개됐습니다. 대표최고위원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민정계에 강력히 항의하며 당무를 거부하고 아버지가 사는 마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최형우 의원 등 민주계 사람들은 민자당 탈당을 준비했습니다. 정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3당 합당이 깨질 수도 있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계는 내각제를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겨우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완전한 승리로 결말이 난 것이지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 사례는 또 있습니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19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이 예상됐습니다. 일각에서는 3분의 2 의석을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과반 미달이었습니다. 대표최고위원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책임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조기 가시화’라는 정면돌파 카드로 불리한 정국을 뚫고 나갔습니다.
이런 기질은 노무현 전 대통령도 갖고 있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지방선거 참패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정몽준 전 의원과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습니다. 여론조사로 하면 불리하다는 주변의 우려를 무릅쓰고 전면 승부를 걸었고 이겼습니다. 취임 초기 측근 비리가 터지자 재신임 카드로 정국을 돌파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재인 대표가 최근 당내 비주류의 흔들기에 맞서 재신임 카드로 상황을 돌파해 낸 것을 보면 그도 확실히 PK 정치인들의 정면돌파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공천 문제를 놓고 김무성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 정면승부를 벌이면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뒤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2012년 대선을 치르면서 과거사 문제로 위기에 몰리자 “5·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가족들에게 사과드린다”고 사과했습니다.
만약 김무성 대표가 안심번호를 비판한 문제의 ‘청와대 관계자’ 경질을 요구하고 나서면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기대와 달리 김무성 대표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태도를 누그러뜨렸습니다. 그는 집 앞에서 기다라고 있던 기자들에게 최고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몸이 찌뿌둥하고 늦잠을 자서…”라고 변명했습니다. 1일 오후 청와대가 ‘현기환 정무수석이 김무성 대표에게 안심번호를 반대했다’고 새로운 사실을 들고 나왔는데도 김무성 대표는 현기환 수석에게 전화로 확전 자제를 당부했을 뿐입니다.
이상했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이렇게 유약하게 대처한다면 정치인으로서 장래가 사라진다는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몸을 사리는지 궁금했습니다.
“김 대표는 PK가 아니다” 라는 얘기도
그러고 보니 제가 ‘정치인 김무성’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침 김무성 대표를 잘 아는 PK 출신 전현직 언론계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두 가지가 궁금했습니다. 첫째, PK 출신인데 왜 이렇게 유약한가. 둘째, 상도동 출신인데도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왜 이렇게 다른가.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뜻밖에도 “김무성 대표는 PK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PK는 기본적으로 고등학교를 부산·경남에서 나온 사람을 의미하는데 김무성 대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긴 김무성 대표는 경남중학교를 나온 뒤 서울에서 중동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리가 있는 설명이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랬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상도동에 입문한 것은 선친(김용주) 때문이다. 선친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당사를 마련해주는 등 도움을 준 일이 있다. 그러면서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청와대 비서관, 내무부 차관에 손쉽게 오른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 더구나 김무성 대표는 선친 김용주의 재력 덕분에 어릴 적부터 고생을 모르고 유복하게 살았다. 재벌 2·3세에게 창업주의 도전정신을 찾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김무성 대표에게는 대선주자급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배짱과 용기가 부족하다. 더구나 김 대표는 지금까지 ‘자기 관리’를 별로 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여러가지 치명적 약점이 있을 수 있다.”
김무성 대표의 출생 환경과 그동안 살아온 인생 역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PK나 상도동 출신 정치인의 특질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인문학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환경, 환경과 환경이 부딪치며 수많은 조화를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좀더 입체적인 분석이 필요했습니다.
더욱이 상대가 ‘전무후무한 정치인’ 박 대통령
여당 내부 흐름을 잘 읽는 인사, 새누리당 의원, 교수 등 몇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들의 다양한 분석을 제 시각에 맞춰서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질문은 ‘김무성 대표는 왜 허약한 것일까’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16일 오전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김정훈 정책위의장을 만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첫째, 상대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박근혜-김무성 대결을 김무성 대표 쪽만 분석하면 틀린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쩌면 ‘전무후무’라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매우 특별한 정치인입니다. 그는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동안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의 딸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1998년 정치를 시작한 뒤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권력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배신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민심의 흐름을 읽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명분 싸움에서 밀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PK 출신이 아닌데도 정면대결에 도가 튼 사람입니다. 좋게 말하면 언제나 온몸을 던져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치킨게임’의 강자입니다. 그와 맞섰던 이회창 총재,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아니라 그 어떤 정치인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면대결에서는 이길 방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은 김무성 대표를 싫어합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인간적으로도 싫어한다는 것이 여권 사람들의 일치된 증언입니다. 김무성 대표가 과거 사석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말을 함부로 했고 그게 박근혜 대통령에게 고스란히 보고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정치인들도 사람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도 중요하지만 인간적 관계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김영삼-박태준의 관계도 그런 사례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태준 전 의원에 대해 모욕에 가까운 험담을 여러차례 했고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둘째,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새누리당의 문화가 있습니다. 이번 싸움은 현직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대결입니다. 새누리당은 보수라는 이념적 정체성도 갖고 있지만 기득권 세력 중심의 카르텔이라는 정체성도 갖고 있습니다.
기득권의 논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가 아니라 ‘누가 보스냐’입니다. 보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전해서 쫓아낼 수 있지만 그 전까지는 철저히 보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새누리당의 보스는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가 드러내놓고 싸우면 김무성 대표가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과 신한국당, 민자당에서는 가끔 이상한 술자리 장면이 있었습니다. 윗사람이 술을 주면 무릎을 꿇고 잔을 받거나 윗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는 장면입니다. 몸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지요. 지금 야당과 그 전신 정당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문화입니다. 짐작건대 군 출신들이 만든 민정당의 충성 문화, 그리고 명분보다는 의리를 중시하는 민주당 구파 출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상도동 문화의 잔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지형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분석도
셋째, 김무성 대표가 상황이 유리한데도 ‘전술적 선택’으로 유화책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당내 정치에서 매우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떠드는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친박’ 의원들이지만 실제 분포는 ‘친김무성’ 쪽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들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난해 7월14일 전당대회에서 그는 서청원 최고위원을 물리치고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당시 김무성 대표의 가장 중요한 공약이 현직 의원들에게 유리한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개방형 국민경선제)였습니다. 김 대표는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게 정당 민주주의의 요체인데 상향식이라지만 공천 때마다 장난질을 했다. 이것을 뿌리 뽑으려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을 약속했습니다. 이 공약 때문에 현직 의원들의 상당수가 김무성 대표를 지지했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달 30일 오후 ‘안심번호를 활용한 국민공천제’에 대해 논의하려고 열린 의원총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김무성 대표는 대표에 선출된 뒤 8월20일 관훈토론회에 나왔습니다. 패널과 김무성 대표의 문답 가운데 두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 상향식 공천의 부작용은 현역 의원들만 계속 정치를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작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은 국민들이 하셔야 한다. 자기 지역 현역 의원과 예비후보자에 대한 판단은 중앙보다 지역 주민이 더 잘 알고 있다. 흔히들 상향식 공천을 하게 되면 정치 신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얘길 하는데 정치 신인들 걱정을 왜 우리가 해야 하나. 자기가 노력하고 밭을 갈아야 한다. 왜 권력자에게 기생해서 그 권력의 힘으로 공천을 받아서 정치를 시작하려고 하나.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굴종하고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큰절을 하고 모든 민원을 해결해주는 심부름꾼 역할을 하고 심지어는 돈까지 갖다줬다. 이걸 없애야 한다. 현역 의원이라고 잘못이 없는데 왜 바꿔야 하나. 지금까지 50%씩 물갈이해서 우리 정치가 발전했나. 그건 국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공정한 룰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 신인들에게 공정하게 싸우라는 건 모순이지 않나?
“그럼 현역 의원에게 불리하게 만드는 게 공정인가. 지방자치제도도 있는데 신인들, 정치하고 싶은 사람들은 지방의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치를 좀 많이 배워서 중앙 정치무대에 올라와야 한다. 그렇게 지방의회 수준도 높여야 한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공천 전쟁 2라운드’는 언제?
현직 의원들이 김무성 대표를 지지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김무성 대표는 어쩌면 현직 국회의원들을 다시 당선시키기 위해 대표가 된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김무성 대표를 퇴진시키려면 새누리당 의원 다수를 적으로 돌려세울 위험이 있습니다.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사람은 서둘 필요가 없습니다. 현직 대통령은 국세청, 검찰, 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과 정보기관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남북 대치 상황 덕분에 현재 지지율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무성 대표로서는 살아있는 권력과 날카롭게 부닥치지 않고 상황 관리만 잘하면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자신과 가까운 의원들에게 “언젠가 박근혜 대통령이 나에게 도와달라고 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했습니다. ‘시간은 나의 편’이라는 의미심장한 얘깁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좀 아쉬움도 있습니다. 싸움은 화끈해야 하는데 김무성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면 충돌을 자꾸 회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공천 전쟁 2라운드’가 언제 시작될까요? 궁금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