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의 ‘정치 주가’는 새누리당 원내대표직 사퇴 이전에 비해 크게 치솟았다. 여권의 대선주자군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2위, 1위로 솟구쳤으니 ‘유풍’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 심판’을 주문하며 유승민의 몰락을 기대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유풍’을 띄운 일등공신이 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이 ‘인위적 유승민 띄우기’에 전력투구했더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니, 정치란 과연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생물임에 틀림없다.
이제 ‘유풍’이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불지에 관심이 쏠린다. 이는 “결국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는 유승민 아니야?”란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물론 유승민이 1위를 차지한 여론조사엔 함정이 있다. 새누리당 지지층에선 김무성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이어 3위에 그쳤으니 ‘여권 1위’는 야권 및 무당파 층의 전폭적 지지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승민이 명실상부한 대선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과 잠재력은 충분하다는 평가가 많다. 노선, 세대, 지역이란 측면에서 ‘기초체력’을 고루 갖췄기 때문이다.
‘TK 본류’에 50대 ‘젊음’
‘합리·개혁’ 고유브랜드도 쥐었지만
조직 없이 대중지지로 승부해야
‘반짝스타’일지 ‘유력 주자’ 될지
내년 초반이면 결판
유승민은 최근 원내대표 사퇴 파동과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보수의 긍정적 요소를 온몸에 농축한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합리적·개혁적 보수의 대표주자로 올라서며 고유한 브랜드를 갖춘 정치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엄청난 정치 자산이다. 그는 사드 배치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는 등 안보에서 보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중부담 중복지’ 등 사회경제적 의제에선 개혁적 색채를 선보였다. 그는 ‘박근혜의 실패와 성공 사례’에서 답을 찾은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를 내건 2007년엔 실패했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충’을 약속한 2012년엔 성공했다. 보수에 집착했을 때 실패했고 보수를 넘어서고자 했을 때 성공했다. 이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이 유승민이다.
유승민은 보수의 본거지인 티케이(TK·대구·경북)의 본류로 분류된다. 아버지(유수호 전 민정당 의원)도 대구에서 국회의원을 했으니 태생은 ‘뼛속 보수’다. 보수로부터 정통성과 정체성을 의심받지 않는다는 점은 여권의 다른 ‘잠룡’들이 지니지 못한 장점이다. 김문수는 대구 출신이지만 경기도에서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했다. 김문수의 ‘전향 전력’을 거론하며 그의 보수 정체성에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 오세훈과 정몽준, 홍준표가 아무리 애타게 구애를 해도 티케이는 여간해선 눈길을 주지 않는다. 홍준표와 오세훈이 ‘무상급식 때리기’의 선봉에 서고 김문수가 ‘이승만·박정희 찬양’에 열을 올릴 때 유승민은 ‘따뜻한 보수’를 내세우며 외연 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런 여유도 어쩌면 유승민이 티케이의 본류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민(MIN) 컨설팅’ 박성민 대표는 “한때 혁신과 미래, 새로움의 상징이던 김문수, 오세훈, 홍준표가 보수 정체성을 확인받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을 때 유승민은 보수 정당의 잃어버린 혁신 디엔에이(DNA)를 되살리려 애쓰고 있다”고 짚었다.
‘세대교체 이미지’도 유승민의 장점으로 꼽힌다. 올해 나이 57살이니 54살의 오세훈과 ‘50대 기수’로 묶일 수 있는 나이다. 64살 동갑내기인 김무성, 김문수, 정몽준이나 60줄에 들어선 홍준표(61)를 ‘구세대 정치인’으로 단박에 밀어낼 수도 있다. 티케이 기반에 개혁성을 내세우는 유승민과 수도권 기반으로 보수의 아이콘을 강조하는 오세훈이 협력하고 경쟁하며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키는 구도도 그려볼 수 있다.
유승민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센 인물, 박근혜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서는 모양새를 만들어낸 것도 그의 정치적 잠재력을 한껏 키운 요인이다. 이 부분에서도 박 대통령은 ‘모범 사례’를 보인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가장 치열하게 맞선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각인시키면서 ‘박근혜 집권=정권교체’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바로 박 대통령이다. 실제로 대선 직전의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를 보면 40.6%가 ‘박근혜 당선=정권교체’라고 답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번에 국회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며 기세를 잡았지만 결과적으로 ‘반대하는 정당’으로서 야당의 역할을 유승민에게 빼앗긴 측면이 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7일 국회에서 자신의 거취 논의를 위해 열린 긴급 최고위원회를 마친 뒤 나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유승민이 ‘잠룡의 잠재력’을 충분히 갖췄다고 하지만 그에게 대선주자로 뛸 수 있는 판이 펼쳐지느냐 여부는 다른 문제다. 아무리 상품이 좋아도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는 매장의 매대에 전시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한 명의 평의원으로 돌아간 그에겐 판을 짜고 구도를 만들 수 있는 별다른 수단이 없다. 조직적 기반도, 탄탄한 계파도 없으니 오로지 대중의 지지, 즉 지지율로 승부해야 한다. 단기간에 솟구친 지지율엔 거품이 끼기 마련이므로 그의 지지율도 머지않아 조정을 받을 거다. 대표로서 내년 총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김무성은 이미 그의 정치적 경쟁자가 됐다. 유승민을 ‘배신자’로 지목한 박 대통령은 높다란 ‘장벽’이다. 유승민을 지지해온 새누리당 한 초선 의원은 “현재의 높은 지지율은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몇개월 안에 국민 시야에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것이 원대대표직에서 물러난 유승민이 딛고 서 있는 냉엄한 정치 현실이다.
내년 총선은 유승민의 정치생명을 좌우하는 갈림길이 될 전망이다. 그와 가까운 한 초선 의원은 “유승민이 20대 총선에서 살아남으면 합리적 보수를 지향하는 여당 의원들의 구심점이 되고 의미 있는 대선행보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소장파의 구심점이 됐던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의 역할을 유승민이 해내면서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도약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유승민이 20대 국회의원이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김무성은 최근 사석에서 “유승민에게 내년 공천은 확실히 준다. 안 되면 내가 책임지고라도 해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서릿발같은 기세에 원내대표직도 지켜주지 못한 김무성의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배신의 정치 심판’을 만방에 공표했던 박 대통령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유승민에게 공천장을 주는 데 찬성할지도 의문이다. 유승민이 지역구(대구 동구을)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당선되리란 보장이 없다. 대구에서는 그가 원내대표에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훨씬 우세했다. 총선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유승민에겐 판이 열리지 않고 대선행보도 할 수 없다.
유승민의 대구 생존이 녹록지 않다는 점을 들어 지역구를 서울로 옮겨 정치적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대로 가면 새누리당은 내년 수도권 총선에서 죽을 쑤게 돼있으니 ‘유승민 서울 출마 이벤트’를 통해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리다. ‘유승민-오세훈 투톱’을 종로 등 서울의 핵심 정치벨트에 배치해 차기를 놓고 경쟁하도록 하는 그림이다. 울산의 정몽준을 서울 동작을에 배치해 재미를 봤던 전례도 거론된다. 총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할 바 없다는 게 새누리당 분위기다. 유승민으로서도 서울에 둥지를 틀게 되면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로 도약할 수 있다. 당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이미지를 창출할 수도 있으니 솔깃해 할 법도 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관심은 새누리당의 이해관계와 다를 수 있다. 유승민이 서울에서 당선돼 유력한 차세대 주자로 올라서는 것을 박 대통령이 그저 바라보기만 할지 의문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에게 지역구 이전은 쉽게 결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유승민이 ‘반짝 스타’로 끝날지, 유력 대선주자가 될지는 공천이 진행될 내년 초반이면 결판이 날 것으로 보인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