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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정치인 성완종’의 탄생

등록 2015-04-17 21:25수정 2015-04-18 14:16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죽음은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줍니다. 당장 박근혜 정권의 도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성완종 리스트’에 거론되는 8명입니다. 지금 검찰의 주된 수사 대상은 2006년 이후의 사건들입니다. 충청남도의 인정받던 기업인은 왜 그렇게 정치에 매달렸을까요? 그는 1992년에 이미 민주자유당에 돈을 대는 재정위원이었습니다. 그때도 어떤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성 전 회장의 죽음은 ‘기업과 정치의 관계’ ‘검찰권 남용의 문제’ ‘법과 제도가 미비했던 건설업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는 성 전 회장이 경험한 정치와 권력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2006년 이전 성 전 회장의 삶을 짚어봤습니다. 사진은 1999년 12월23일치 에 실린 것으로, 한겨레신문사 사진 데이터베이스에 처음으로 등록된 성완종 전 회장의 얼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죽음은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줍니다. 당장 박근혜 정권의 도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성완종 리스트’에 거론되는 8명입니다. 지금 검찰의 주된 수사 대상은 2006년 이후의 사건들입니다. 충청남도의 인정받던 기업인은 왜 그렇게 정치에 매달렸을까요? 그는 1992년에 이미 민주자유당에 돈을 대는 재정위원이었습니다. 그때도 어떤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성 전 회장의 죽음은 ‘기업과 정치의 관계’ ‘검찰권 남용의 문제’ ‘법과 제도가 미비했던 건설업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는 성 전 회장이 경험한 정치와 권력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2006년 이전 성 전 회장의 삶을 짚어봤습니다. 사진은 1999년 12월23일치 에 실린 것으로, 한겨레신문사 사진 데이터베이스에 처음으로 등록된 성완종 전 회장의 얼굴.
[토요판] 커버스토리

성공한 기업인은 왜 정치를 하려 했나
인맥과 건설업, 검찰의 삼각고리 추적
▶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남긴 리스트를 둘러싸고 논란이 점점 커집니다. 일부에서는 ‘돈을 준 성 전 회장도 나쁜 사람’이라며 폭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성 전 회장 또는 그가 경영했던 대아건설은 실제로 모두 4차례 형사처벌받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의 지인들의 증언, 성 전 회장의 자서전 등을 종합하면, 검찰 권력과 건설업의 비리 관행 속에서 사업한 경험이 그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과거를 살펴봤습니다.

검찰이 수사 안 한 1992년 ‘대아 리스트’는 2015년 비극의 싹

인맥, 건설업, 검찰. 기업인 성완종 전 회장의 삶은 이 세개의 열쇳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건설업을 하던 30대 초반부터 이미 체육회 활동 등 다양한 인맥쌓기 활동을 했다. 그저 취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 그가 택한 사업이 건설업이라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성 전 회장이 사업을 키우던 1980~1990년대는 부동산 사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토지공개념’이 한때 이슈가 될 정도로, 땅값·집값이 너무 올라 서민이 고통받던 때다. 반대로 토목·건설·부동산 사업가에게는 좋은 시기였다. 경제가 커지고 국가 예산도 해마다 커졌다. 정부·공기업이 대형 관급공사를 많이 발주했다. 규모는 큰데 법과 제도는 미비했다. 성 전 회장 스스로 자서전에 밝힌 대로, 불법적 관행과 비리가 일상적이었다. 기업인은 공무원과 친해져야 했을 것이다. 법과 제도가 미비한 업종의 사업가가 자주 만나야 했던 것은 검찰이었다. 기업인 성완종이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 성완종이 되는 일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벌어졌다. 그 끝은 비극이었다. 예고된 비극이었을 수 있다.

18대 대선 직후인 2012년 12월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 해단식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른쪽 둘째 자리에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모습이 보인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18대 대선 직후인 2012년 12월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 해단식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른쪽 둘째 자리에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모습이 보인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성실함만 가지고는 안 되었다

출신 배경으로 보면 성 전 회장은 자수성가형에 가깝다. 그의 자서전 <새벽빛>(따듯한손·2007년)을 보면 그는 1951년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서전의 3분의 1가량이 새어머니와의 갈등, 아버지에 대한 원망, 가난 등 어린 시절 이야기다. 아버지가 다시 결혼을 해 성 전 회장과 친어머니는 아버지 집에서 나와 떠돌며 살았다. 20대 초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 처음 사업에 뛰어든 분야가 화물영업소다. 당시에 차가 귀했다. 농부와 농산물을 운반할 화물차를 중개해주는 일이었다. 일종의 운수업인 셈이다. 화물 중개 한건당 1000원의 수수료를 받았다. 성실했다. 사업이 잘됐다. 나중에는 단위농협에서 아예 운수를 통째로 맡겼다. 사업이 더 잘됐다. 다른 운수업자와 함께 반반씩 돈을 모아 트럭을 구입해 자기 차로 운송업을 했다.

24살 때인 1975년 처음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자서전을 보면, 화물운수업을 하며 가까워진 농협조합장이 소유한 작은 건설회사 ‘서산토건’의 지분을 인수했다. 건설업과 관련해 지식이 전무했지만 성 전 회장은 지인의 권유를 믿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직 건설업이 자신의 인생 전부를 관통할 사업임은 알지 못했다. 건설업도 성실하게 했다. 주로 경지정리나 개량사업 같은 관급공사가 수익성 좋은 사업이었다. 회사 내의 다른 주주들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됐다. 1981년 수주한 한국전력 부속 한일병원 신축공사가 대표적이다. 회사의 과거 6년치 매출에 해당하는 60억원 규모의 대형 사업이었다. 이때부터 성 전 회장은 독립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1982년 서산토건을 떠나면서 처분한 지분의 가치는 7년 사이 80배로 커졌다. 그 돈을 밑천 삼아 당시 충남 지역 자산 규모 3위인 중견 건설사 ‘대아건설’을 인수했다. 31살이었다.

성 전 회장은 청년사업가 시절부터 인맥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1980년 7월부터 1981년 6월까지 서산군수를 지낸 홍선기 전 대전시장은 지난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내가 서산군수로 있는 동안 서산체육회 부회장이었던 성 전 회장과 처음으로 만났다”며 “일찍 사업으로 성공한 젊은 사람이 참 성실하게 사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 성 전 회장은 체육회 외에도 사단법인 한국청년회의소의 충청지구 회장, 국민정신운동본부장,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장 및 중앙위원, 대한유도회 충남도지부 지부장 등도 역임했다. 인맥을 넓히는 자리라면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맥이 건설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 초 건설업계는 여전히 법과 제도가 미비한 업종이었다. 성 전 회장은 자서전에 “우리나라에서 관련법을 정비하고 건설업을 전문화된 사업으로 활성화한 것은 1990년도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는 분야가 건설업이었다”고 썼다. 자서전에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다. 막 건설업을 시작한 성 전 회장이 처음 수주한 사업은 서산군청에서 발주한 45만원짜리 해미읍성 시가지 포장 공사였다. 공사를 수주하자 알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에게 하청을 달라는 하도급 업자들이 찾아왔다.

“당시는 리베이트(수수료)를 받고 하청을 주는 것을 예사로 했으며, 법으로 다스리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20~30퍼센트 정도를 마진으로 미리 떼어줄 테니 시공은 자기에게 넘기라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성 전 회장은 기록한다. 재하청은 또다른 재재하청으로 이어졌다. 성 전 회장이 수주한 도로포장 공사가 완공 사흘을 남기고 인부들이 일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성 전 회장으로부터 공사를 하청받은 업자가 이 공사를 재하청 맡겼고, 재하청 업자가 임금을 떼먹은 것이었다. 담당 공무원인 감독관 접대는 일상이었다. “그때까지도 건설업계에서 향응과 접대는 빼놓을 수 없는 관행이었다. 다른 경쟁업체에 비해 규모가 작았던 우리는 뭉칫돈을 상납하거나 뇌물을 줄 여력이 없었다.” 인맥이 힘이었을 것이다.

주민에게 2000만원 뿌렸다는
92년 한준수 관권선거 양심선언
근거자료인 대아건설 부사장
조아무개씨 업무일지는 지금의
‘성완종 리스트’를 연상시킨다

건설업 시작한 뒤 첫 수주한
해미읍성 시가지 포장공사
하청과 재하청, 리베이트와
뇌물·향응 관행을 목격했다
인맥의 힘 알아가던 시절이다

관급공사 무더기 따내며 급성장하다

성 전 회장이 인수한 대아건설은 정부의 건설업 진흥정책을 타고 자산과 매출을 급격히 불려나갔다. 1986년 전국 도급 순위 168위였던 대아건설은 1992년 61위로 뛰어오른다. 정부 발주 사업이 급성장의 기반이 됐다. 공식적으로는 조달청이 법령에 따라 발주하고 입찰하면 낙찰받는 과정을 거친다. 실제로는 공무원 로비가 중요했다는 증언들이 많다. 대아건설도 의혹의 대상이 됐다. 1992년 10월 국회 내무위원회의 충청남도 국정감사에서 처음으로 대아건설의 ‘정경유착’ 문제가 구체적으로 지적됐다.

당시 국정감사 회의록에 나온 민주당 쪽 주장을 보면, 대아건설은 1988년 이후 51건의 관급공사를 수주했다. 수의계약으로 따낸 13건을 뺀 나머지 38건의 낙찰가 합은 1042억9428만원이었다. 이는 총 입찰 예정가 1044억9459만원의 98.6%에 해당한다. 대아건설이 응찰해 낙찰된 금액이 사전에 공개되지 않는 입찰 예정가와 거의 같았던 것이다. 더 적은 금액으로 응찰한 업체들이 있었지만 낙찰은 대아건설에 돌아갔다. 당시는 모든 정부 공사의 낙찰 우선권을, 입찰 예정가의 85%를 넘되 85%에 가장 가까운 금액을 응찰가로 써낸 업체에 주는 ‘부찰제’가 원칙이던 때였다. 이 원칙도 무시된 것이다.

대아건설의 ‘이상한 낙찰 사례’가 당시에도 보도됐다. 1990년 낙찰 예정가 2억3600만원이었던 충남 온양시(현 아산)의 올림픽기념관 전기공사의 대아건설 응찰가는 2억1375만원이었다. 예정가의 90.6% 수준이다. 예정가의 85%인 2억60만원으로 응찰해 대아건설보다 더 우선순위였던 업체가 6곳이나 있었지만 최종 낙찰자는 대아건설이 됐다. 태안군 농촌소득원 도로 공사도 대아건설보다 우선순위였던 회사가 3곳이 있었다. 천안군 용연저수지 국민관광단지 도로 확·포장 공사는 8개 회사가 대아건설보다 더 낮은 금액을 써냈다. 논산군 청사 신축공사는 2개 회사가 대아건설보다 우선순위였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대아건설이 낙찰자로 선정됐다. 대아건설은 이 시기 무려 34건의 공사에서 사전에 공개하지 않는 예정가와 거의 같은 수준(99% 이상)으로 응찰해 낙찰됐다. 대아건설 쪽에 예정가가 사전 유출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당시 민주당 소속 김충조 의원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대아건설의 급성장은 관급공사를 무더기로 따낸 것 때문이며 전직 충남지사, 내무부 장관 등을 지낸 안응모씨 등의 압력과 도움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안 전 장관은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성완종씨는 당시 일에 열심이었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 목표를 위해 굉장히 노력했던 분이고 자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서도 “성씨와의 개인적 친분은 없었다”고 연루 의혹은 부인했다.

정경유착 의혹이 나올 법했다. 성 전 회장은 1992년 집권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재정위원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자금을 대는 합법적 직책이었으나 늘 문제가 지적됐다. 민자당 재정위원으로 재벌들이 많이 포함됐다. 당은 명단 공개를 꺼렸다. 1992년엔 주택은행장을 지냈던 류돈우 당시 민자당 의원이 재정위원장이었다. 정경유착을 낳는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당시 보도를 보면 성 전 회장은 민정당 시절 인맥을 통해 민자당 재정위원이 된 것으로 보도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한겨레>가 17일 당시 민자당 재정위원장인 류돈우 전 의원에게 전화로 성 전 회장에 대해 물었으나 류 전 의원은 “나는 잘 모른다. 몇십년 전 일인데”라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1992년은 성 전 회장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시기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대아건설 리스트’가 논란을 불렀다. 정치적 사건이 계기가 됐다. 1992년 3월24일 총선이 있었다. 민자당이 다수당이 됐다. 그해 8월 말 한준수 당시 연기군수가 민자당이 관권선거를 지시했다는 양심선언을 뒤늦게 했다. 당시 이종국 충남도지사로부터 돈을 받아 선거일 직전 주민들에게 모두 2000만원가량의 돈봉투를 뿌렸다고 밝혔다. 이상연 당시 내무부 장관이 선거를 앞두고 전화를 했다는 내용도 밝혔다. 한 전 군수는 증거로 10만원권 자기앞수표 90장을 공개했다. 민주당은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성 전 회장이 부당하게 관급공사를 따냈다는 정경유착도 이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다.

<한겨레> 등 당시 보도를 보면, 한 전 군수는 양심고백을 하며 근거자료로 당시 대아건설 부사장 조아무개씨의 업무일지를 공개했다. ‘2월10일 박중배 충남부지사 방문’, ‘2월20일 대전 중부서장 방문’, ‘2월29일 성 회장과 통화’, ‘6월7일 와이에스(YS) 건으로 서울 통화’, ‘8월10일 경찰청장 예방 격려금 전달’, ‘8월19일 안기부에 축하화분 전달’. 지금의 ‘성완종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기록이다.

그의 이런 정보관리 습관과 관련해 자서전에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띈다. 신문 읽기를 어려서부터 했고 그때 정보의 힘을 깨달았다는 대목이 자서전에 나온다. 성 전 회장은 10대 때 고향을 떠나 서울 영등포의 한 교회에서 먹고 자며 막노동을 했다. 매일 신문을 정독했다고 그는 기록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뉴스는 물론 사업상 귀중한 정보를 얻는 통로의 하나가 신문이다. 남들보다 빠른 정보력이 실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가를 터득한 것도 그 당시(10대)였다.” 그는 언론의 힘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공포로 남은 첫 검찰 조사의 추억

이후 성 전 회장은 쭉 성공했다. 1993년 대아건설을 건설업계에선 드물게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건설업을 시작한 지 19년째, 대아건설 인수 12년째가 되던 해였다. 자서전을 보면, 주식시장에 기업을 공개하면서 신용도가 높아지자 대아건설은 이후 정부 대전청사, 정보통신부 사옥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 시공도 수주했다. 경부고속철도, 호남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김해국제공항, 부산시 지하철 건설 등에도 참여했다. 산업은행의 자회사인 산은캐피탈의 투자를 받아낸 것도 이 시기다. 건설업 이외의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중앙청과시장을 인수하며 유통사업에 뛰어들고, 지역 민간방송 사업에도 참여하려 했다. 2000년엔 온양관광호텔을 인수하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의 본격적인 중앙 정계 진출은 대아건설의 경남기업 인수와 궤를 같이한다. 경쟁 관계였던 충남 지역의 건설업체 계룡건설의 이인구 회장이 13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 1992년 민자당 재정위원, 1997년 신한국당 재정위원을 거쳐 성 전 회장은 2000년 총선 때 자유민주연합에 공천(서산·태안 지역구)을 신청하며 정계에 첫발을 디뎠다. 2000년은 대아건설이 경남기업 인수를 검토하기 시작한 해다. 2003년 경남기업을 인수했다. 이해 공천에서 떨어지고 2003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특보단장을 맡았다. 2004년 자민련은 비례대표 후보 16명을 공천하면서 김종필 총재를 1번, 성 전 회장을 2번에 배정했으나 자민련 선거 참패 탓에 의원은 되지 못했다. 2012년 총선에서 비로소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2년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집권 민자당 관권선거 내부고발 사건과 관련해 성완종 전 회장을 수사했던 대전지검 수사진. 대전지검장이던 김종구 전 법무부 장관(왼쪽부터), 대전지검 특수부장이었던 구본성 서울고검 검사, 대전지검 차장이던 최병국 전 한나라당 의원. <한겨레> 자료사진, <법률신문> 제공
1992년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집권 민자당 관권선거 내부고발 사건과 관련해 성완종 전 회장을 수사했던 대전지검 수사진. 대전지검장이던 김종구 전 법무부 장관(왼쪽부터), 대전지검 특수부장이었던 구본성 서울고검 검사, 대전지검 차장이던 최병국 전 한나라당 의원. <한겨레> 자료사진, <법률신문> 제공
성 전 회장은 일찍부터 여러차례 검찰 수사를 경험했다. 검찰 권력에 대한 공포를 먼저 배운 것 같다. 자서전을 보면, 성 전 회장은 31살이 되던, 대아건설 사장으로 취임한 1982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수사의 계기는 경쟁 건설업체의 투서라고 성 전 회장은 자서전에서 추정했다. 자서전 내용이 사실이라면, 첫 검찰 조사의 추억은 좋지 않다. 영장 제시 없이 4박5일간 불법 구금돼 수사받았다. 변호인의 도움도 못 받았다. 전두환 정부 시절이었다.

“어느 날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오는데 공항에서 웬 남자들이 다가왔다. 점퍼 차림에 건장한 체격이라서 의아하던 차에 같이 가자며 신분증을 내보였다. 거기에는 검찰 수사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1982년 당시 대검찰청 청사는 현재 서울시청 별관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조사실은 15층이었다. 형사소송법에 어긋난 강압 수사를 했다. 수사관들은 유력 정치인에게 돈을 준 것을 알고 있으니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 “형광등 불빛이 여간 위압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반사된 빛은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잠을 재우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잠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통에 수사관이 내 머리를 잡아 흔들어도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검찰은 집과 사무실도 압수수색했다. 나오는 것이 없었다. 담당 검사가 불러 커피를 줬다.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며 당신에 대해 이번 기회에 잘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었다.”

첫 검찰 수사 경험은 성 전 회장에게 큰 심리적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갔다 온 그 사건은 나에게 육체적 고통 이상으로 값진 깨달음을 주었다”고 썼다. 이어 “이번에는 용케도 결백을 인정받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도 무사히 나올 수 있을까?”라고 썼다. “사업을 하면서 원칙을 지키고 정도를 걸으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솔직히 말해 내 손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소소한 관행을 무시하기 힘들었고,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사업을 해나갈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었지만, 돈봉투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선물들, 또 직원들이 주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던 일들이 중앙수사부의 문을 닫고 나오며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 가지고 있던 통장마저 없앴다”고 썼다.

성 전 회장은 수사받은 구체적인 시점, 수사 검사 이름 등을 명기하지 않았다. 대형 특수수사로 유명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전두환 정권 때인 1981년 처음 생겼다. 이철희·장영자 수사 등 대형 수사를 주로 했다. 나이 어린 지방건설사 사장을 대검 중수부가 수사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이종남(79·고등고시 12회) 전 법무장관이 1981~1983년 대검 중수부장이었다. 이 전 장관은 법무법인 세종 고문변호사 등 여러 직책을 두루 지내고 지난해까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감사를 지냈다. 고려학원 및 이 전 장관이 거쳤던 여러 기관을 통해 접촉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당시 중수 1~4과장을 지냈던 법조인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는 등 두루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거나 답변을 하지 않았다. 1982년 초~8월 대검 중수1과장이던 이건개 전 의원은 <한겨레>에 전자우편으로 “당시 근무 시 총무와 과학수사장비 관리 업무를 한 것으로 질문한 사항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다. 1982~1983년 중수 4과장 및 1과장으로 재직했던 신건 전 국가정보원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조사했다면 분명 기억했을 텐데 ‘성완종’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온양시 올림픽기념관 전기공사
태안군 농촌소득원 공사 등
90년대 관급공사 무더기 낙찰
정경유착 의혹 나오기 시작
당시 그는 민자당 재정위원

1982년 대검 중수부와 악연
1992년 관권선거 돈줄 의혹으로
검찰수사 받았지만 기소는 안돼
2004년 차떼기 사건 때도
검찰수사 받았지만 기소 피해

1992년 ‘대전지검장 김종구’ 부실수사 논란

성 전 회장은 1992년 검찰 권력의 막강함을 재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엔 입장이 크게 달랐다. 한 전 연기군수의 관권선거 양심고백은 당시 정치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은 자체 진상조사위원을 만들었다. 언론보도도 줄을 이었다. 이 사건을 수사한 대전지검은 한 전 군수가 당에서 받아 뿌린 수표가 당시 민자당 재정위원이던 성 전 회장의 대아건설 계좌에서 선거일 한달 전 인출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검찰은 “문제의 수표 90장은 대아건설에서 공사대금 등으로 지급된 수표의 일부일 것으로 추정되나, 5억원 상당의 돈을 10만원권 자기앞수표로 인출했고 거래상 배서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현금과 같이 유통되어 그 유통 경로의 추적이 불가능하다”며 성 전 회장을 기소하지 않았다. 대아건설의 비자금 조성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대전지검은 내부고발자인 한 전 군수와 관권선거를 지시한 이종국 당시 충남도지사, 임재길 당시 민자당 연기지구당 위원장 등 3명만 기소했다. 대전지법은 1993년 한 전 군수에게 가장 무거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부정선거를 지시한 이 전 지사와 임 위원장에게는 각각 징역 10월, 집유 2년 및 징역 8월, 집유 2년을 각각 선고했고 이 판결이 확정됐다.

부실수사라는 언론의 비판이 많았다. 당시 대전지검장인 김종구(74·사법시험 3회) 전 법무부 장관은 현재 법무법인 여명의 고문변호사다. 15일 방문해 비서를 통해 당시 수사에 대해 물었으나 답변을 거절했다. 수사 실무를 맡은 구본성(63·사법연수원 8기) 당시 대전지검 특수부장은 현재 서울고검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화로 당시 성 전 회장 수사에 대해 물었으나 “오래전 일로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며 직원을 통해 답했다. 당시 대전지검 차장이던 최병국(73·사법시험 9회) 전 한나라당 의원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기춘 전 실장이 1991년 5월~1992년 10월 법무부 장관이었다.

한 전 군수는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당시 성완종 전 회장을 (직접) 만난 적이 없고 충청남도지사 하던 이종국씨가 나한테 수표를 줬다. 그래서 검찰에 ‘증거가 있다, 관권선거 밝히라’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대아건설이 조사받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당시 나만 처벌을 (세게) 받았다”고 짧게 답했다. 1982년 검찰 조사 경험을 길게 서술한 성 전 회장은 자서전 어디에도 1992년 관권선거 관련 수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2004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때 다시 성 전 회장은 수사받았다. 신한국당의 ‘차떼기 비리’로 유명한 수사다. 당시 새천년민주당도 불법 자금을 받았다.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유세연수본부장이었다. <한겨레> 등 당시 여러 언론 보도를 보면, 대검 중수부가 대아건설을 압수수색했고 계열사와 하청업체 등을 통해 공사비를 부풀리는 등의 수법으로 비자금을 만들어 여야 정치권에 수십억원대의 불법 대선자금을 건넨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성 전 회장은 이번에도 기소를 피했다. 당시 검찰은 고민 끝에 기업인 처벌을 최소화했다. 정치인 처벌에 초점을 맞췄다. <한겨레> 2004년 5월 보도를 보면, 당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전 대법관)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사건(대선자금 수사)이 기업 비리에 대한 수사가 아닌 만큼 최대한 관용 처리했다”고 밝혔다. 이 교육감의 유죄판결문을 보면, “피고인(이 교육감)은 이 사건 이전에 (새천년민주당 총무본부장) 이아무개의 부탁으로 중소기업인 대아그룹의 회장인 성완종에게 3억원의 정치자금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하였던 사실 등이 각 인정되는바”라고 성 전 회장의 불법행위가 짧게 쓰여 있다.

성 전 회장은 자서전 곳곳에서 ‘원칙’ ‘정도’ ‘바른 길’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나 성 전 회장과 그가 운영했던 대아건설은 불법 행위로 여러번 민형사 소송을 경험했다. 판결문을 보면,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주식시세 상승을 노리고 하도급 업체 명의를 불법적으로 이용해 유상증자를 한(증권거래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아무개 당시 대아건설 대표이사, 전아무개 이사, 대아건설 법인에 각각 벌금 1000만원, 징역 10월에 집유 2년, 2000만원을 2004년 선고했다. 하도급 업체 명의를 이용한 범죄였다. 대아건설은 2001년 회사 운영자금 140억원을 유상증자로 조달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주식시세는 액면가(5000원)에 못 미치는 3000원이었다. 대아건설은 회사 자금 72억여원을 하도급 업체에 ‘공사선급금’ 등 명목으로 입금한 뒤 다시 이 돈을 인출했다. 하도급 업체 명의로 대아건설 주식을 청약해 유상증자했고, 이를 공시했다. 허위 공시에 해당하는 불법 행위다. 2001년 8월 대아건설의 공시 자료를 보면, 범죄 행위가 벌어진 2001년 8월께 성 전 회장도 공동대표였으나 기소되지 않았다.

공사 규정을 어겨 인근 주민에게 피해를 끼친 손해배상 사례도 있다. 대전지법은 대전 대덕구 주민 9명이 “안전 규정을 어긴 공사 탓에 건물에 균열이 생겨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다”며 대아건설 등 3개 건설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3개 건설사가 함께 주민들에게 모두 46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1997년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서울지법 북부지원(현 서울북부지법)은 “방음벽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며 안양시 주민 231명이 대아건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아건설이 주민들에게 각각 50만원씩 배상하라”며 2001년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이들 판결 외에도 성 전 회장은 최근의 선거법 위반 판결을 포함해 여러 건의 형사처벌을 받았다.

“정치와 기업 뗄 수 없는 관계 깨달았을 것”

성공한 기업인이던 성 전 회장은 왜 정치를 하려 했을까? 법과 제도가 정비되기 전 불법 행위가 만연했던 건설업 경험이 그를 정치로 나아가게 했다는 견해가 있다. 충남 서산·태안 지역에서 오래 활동한 한 정치인은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성 전 회장이 왜 정치를 했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92년 사건 때 (성 전 회장이) 40대 초반의 나이였는데 그때 구속이 안 되었다. 또 그분이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2번이었지 않나. 그런데 총선이 끝나고 자민련에 정치자금을 준 것으로 유죄판결이 나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업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걸 인식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성 전 회장이) 17대 총선 때 자민련 비례대표 2번이었고, 18대 총선 때도 한나라당 공천을 희망했는데 밀렸다. 19대 때 다시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했다가 떨어지고 선진통일당 후보로 당선되었고. 기업인이었지만 항상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설업 하면서 관급 공사라는 것도 있고 해서 정치와 (기업이)뗄 수 없는 관계였고. 차라리 그 직위에 오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성 전 회장이) 청년 시절에 서산에서 청년회의소 활동을 했다. 청년회의소는 국제조직이고 한국에서는 전국조직이 되어서 여기서 활동하면서 관계자들끼리 인맥을 쌓을 수 있다. (성 전 회장은) 건설업도 했고 청년회의소도 하고 젊은 시절부터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맥, 건설업, 검찰. 이번 검찰 수사를 둘러싼 정국에서도 이 세개의 열쇳말이 다시 보인다. 1992년 때처럼, 검찰이 다시 주체가 됐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지난 10일 성명을 내어 “검찰은 철저한 수사를 통해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도 같은 날 논평을 내어 “유력 정치인의 부패는 법적 처벌을 못 하더라도 정치적 책임 추궁 대상”이라며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 사건의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 고나무 박기용 박유리 기자 dokko@hani.co.kr,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관련영상] 이완구와 홍준표, 검찰의 선택은? / 법조예능-불타는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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