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필자는 임종석·송영길·우상호씨 등 열린우리당의 젊은 정치인이 추진하는 청년경제문화교류단과 북녘역사유적답사단의 명예단장으로 세번째 평양을 방문했다. 이때 필자는 리인모 노인의 집을 방문해 북송 10년 만에 만나기도 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56
2003년 9월22일 열린우리당의 임종석·송영길 의원과 우상호 중앙위원 등과 함께 방북길에 올랐다. 이들 젊은 정치인들은 정부 승인 아래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청년경제문화교류단과 북녘역사유적답사단 180명의 명예단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북쪽에서는 사회주의청년동맹과 민족경제인연합회(민경련) 쪽에서 참석한다고 했다. 나는 마침 임 의원의 후원회장이어서 기꺼이 응했다.
인천공항을 떠나 1시간 만에 평양에 도착해 청년호텔에 여장을 푸니 2000년 두차례 방북 때 낯이 익은 백문길·리호림 선생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9월23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리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마침 임·송 의원과 우 위원도 내 방에 와 있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잘 안다며 그가 젊은 정치인들에게 던진 첫마디가 퍽 인상적이었다. “여러분들, 생각은 진보적으로 하되 행동은 보수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 원래 양극단은 서로 통하는 법이지요.” 극좌는 극우를 돕는다는 뜻이니 남북간 냉전 대결 상황에서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곱씹을 만한 진리의 표현이다.
이날 오후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 부위원장인 김영대 민화협 회장을 집무실로 방문해 한시간가량 회고와 함께 93년 리인모 북송 직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에 대한 내 유감도 솔직하게 전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3년이 지났는데 그 후속 조처가 지지부진한 것도 안타깝다고 했다. 개성공단은 반드시 남북 경제협력사업으로 성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중국대륙 횡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한반도 횡단철도로 이어져서 남과 북이 함께 경제번영과 평화를 이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 얘기를 경청해주었다.
24일 오후에는 리인모 노인의 근황을 물으니 식물인간 상태라 해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집으로 찾아갔다. 93년 봄 북송 때는 남쪽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그였는데 가족 품으로 돌아와 10년째 살고 있다니 나는 적이 놀랐다. 중학교 교장이라는 그의 딸이 맞아주었다. 93년 3월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쪽에서 아버지를 마중했던 그 딸을 평양에 와 직접 만나니 분단 역사가 일단 정지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휠체어를 탄 그가 응접실로 들어오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의식이 없는 듯했다. 딸이 큰소리로 “한완상 선생께서 오셨어요”라고 외치자 갑자기 그의 얼굴은 붉어지고 몸도 떨기 시작했다. 한마디 소리도 내지 못하는 팔순 노인의 몸이 갑자기 사시나무처럼 떨며 얼굴은 붉어졌다. 나는 순간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건 아닐까 깜짝 놀라 어깨에 손을 얹고 속으로 기도했다.
나는 그가 가족의 품에서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의 딸이 내게 아버지의 북송을 결정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했을 때, 우리 정부의 인도주의 결단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뿌듯했다. 그의 북송 결정이 결단코 헛된 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나 여전히 공고해 보이는 분단 현실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9월25일. 북쪽은 11월23~27일 제주도에서 열리는 민족체육축전에 약 400명의 선수와 임원을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만찬 때 리종혁 선생을 다시 만나서 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루속히 남쪽을 답방해 6·15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6일 오전에는 평양시내 상점에 들러 구경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언론에 기고했던 북-미 간의 임박한 전쟁 위기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일상적인 일로 그저 바쁘게 사는 듯했다.
10월23일. 제주도에서 예정대로 민족통일평화 체육문화축전이 열렸다. 분단 이후 첫 순수 민간 차원의 남북체육문화 행사다. 남쪽에서는 김원웅 의원이 공동조직위원장을 맡고, 김영대 민화협 회장이 북쪽 참가단장이다. 중증호흡기증후군(사스) 파동과
미국의 요청에 따른 우리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 등으로 무산될 위기 속에 200명 규모로 축소해 이뤄진 행사이니만큼 나는 무사히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주도에 갔다. 전금철 조선아태평화위 부위원장도 함께 왔는데 2000년 10월 평양에서 만났을 때도 면풍으로 찌그러져 있었던 얼굴이 이젠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날 오찬 간담회에서 덕담으로, 앞으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민족 마라톤 축제를 열면 좋겠다고 했다. 남쪽 선수들은 백두산부터, 북쪽 선수들은 한라산에서 출발해 서로 이어 달리면 방방곡곡 민족이 하나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겨레 인기기사>
■ 사상최대 대혼전…“투표함 열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 캐스팅보트는 지역 어디
■ 박-문 마지막 유세…PK-충청-수도권 ‘3대 승부처’ 대격돌
■ 이 영화 다시보고 싶다…첫사랑 향수 자극 ‘건축학개론’ 1위
■ 김무성 “문재인, 정신나간 노무현 정권의 2인자”
■ 중국 초등학교서는 ‘무차별 칼부림’ …용의자는 ‘12월21일 지구 종말론자’
■ [화보] 새누리 ‘불법댓글’ 새마음청년연합 휴지통서 딱 걸렸네~
한완상 전 부총리
■ 사상최대 대혼전…“투표함 열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 캐스팅보트는 지역 어디
■ 박-문 마지막 유세…PK-충청-수도권 ‘3대 승부처’ 대격돌
■ 이 영화 다시보고 싶다…첫사랑 향수 자극 ‘건축학개론’ 1위
■ 김무성 “문재인, 정신나간 노무현 정권의 2인자”
■ 중국 초등학교서는 ‘무차별 칼부림’ …용의자는 ‘12월21일 지구 종말론자’
■ [화보] 새누리 ‘불법댓글’ 새마음청년연합 휴지통서 딱 걸렸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