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전 마지막 주말인 15일 오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왼쪽 사진)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각각 서울 코엑스몰 광장과 광화문 광장에서 유세를 열어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대선 D-2
박근혜의 삶
12살부터 청와대 살이
22살 프랑스 유학생활
6달뒤 어머니 서거
퍼스트레이디 역할 맡아
27살 아버지 서거
5·18땐 영남학원 이사장
46살 한나라당 의원 당선 처음에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박근혜는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2년 2월2일,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육영수씨의 첫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5·16쿠데타 당시, 박근혜는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쿠데타를 위해 아버지가 집을 나설 때, 10살 박근혜는 안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1963년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박근혜는 “아이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걱정된다”는 어머니 육영수의 뜻에 따라 부모와 함께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고 서울의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1964년 성심여중에 입학하면서 청와대로 들어갔다. 신문들이 “영애, 근혜양 합격”이란 기사를 실었다. 아버지가 3선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한 1969년 6월, 성심여고 3학년이던 박근혜는 일본 요코하마를 방문해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 진수식에 참석했다. 당시 신문은 “유니버스 코리아호가 영애 근혜양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가운데 진수했다”고 보도했다. 그해 12월 공화당은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72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3학년이던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씨를 대신해 또 한 번의 유조선 진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을 방문한다. 그가 출국한 날은, 아버지가 유신을 선포한 지 나흘 뒤였다. 아버지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1974년 초, 박근혜는 이공계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비행기 시간에 늦어 급하게 떠나는 자동차를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 박근혜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6달 뒤 어머니의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해야 했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울었다. 그렇게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스물두살이었다. 박근혜는 이때 최태민 목사를 만나 ‘새마음 운동’을 야심차게 벌인다. 갑작스런 아버지 박정희의 서거, 아버지의 피묻은 옷을 빨면서 박근혜는 “남들이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했다. 박근혜는 동생 근영·지만씨와 함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18년간 은둔의 생활을 보낸다. “경황이 없는 중에” 1979년에는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청와대 금고에 있던 돈’ 6억원을, 그리고 1982년에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성북동 집(300평)을 각각 받았다. 5·18 당시 박 후보는 영남학원 이사장이었고, 민주화 항쟁으로 뜨거웠던 1987년에는 아버지의 추도식을 준비했다. 그해 10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이듬해 노태우 전 대통령 취임 뒤엔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이어 1990년에는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책 <겨레의 지도자> 출간, 영화 <조국의 등불> 제작 등 90년대 초반까지 박근혜는 아버지의 재평가 작업에 몰두했다.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당시 대선 캠프의 고문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대구 달성 보궐선거 당선을 시작으로, 2004년 탄핵 정국에서 당 대표를 맡아 치른 총선까지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치르는 선거마다 승리를 거둬 ‘선거의 여왕’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러나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으며, 이후 이명박 정부 5년간 대립과 협력을 오갔다. 올해 당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박근혜는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문재인의 삶 강냉이죽 먹고 중고교
박정희 3선 반대 구속
전두환 부대서 군생활
전역 25살 아버지 사망
유치장서 사시 최종합격
노무현과 부산서 변호사
50살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첫 운명은 가난이었다. 한국전쟁 끝 무렵이던 1953년 1월24일 문재인은 경남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넘어온 부모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근처 명진리 남정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계란 행상을 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 고향에서 ‘수재’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양말 사업은 빚만 남긴 채 실패했고, 문재인은 친구 도시락 뚜껑에 급식으로 나온 강냉이죽을 받아먹었고, 기성회비를 못내 집으로 쫓겨가기도 했다. 1959년 태풍 ‘사라’호가 부산을 강타하던 때에는 살던 집 지붕이 통째로 날아갔다. 문재인도 수재였다. 명문 경남중·고를 다녔다. 중학생 때부터 야당 성향이 강한 잡지 <사상계>를 읽으며 올바르게 사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경남고 2학년 때 3선개헌 반대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고민은 경희대 법학과에 입학한 문재인을 자연스럽게 운동권으로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추진에 반대하는 학내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 제적, 강제징집으로 이어졌다. 호송차에 실려 떠나는 차 뒤편으로 어머니가 “재인아, 재인아”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던 장면을 문재인은 오랫동안 기억한다. 강제징집으로 배치받은 부대는 제1공수 특전여단 3대대. 여단장은 준장 전두환, 대대장은 중령 장세동이었다. 문재인이 전역하던 1978년, 부친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문재인은 고시공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가 들이닥쳤다.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2차를 준비하던 문재인도 거리로 나섰다. 복학 조처로 되돌아간 학교에서 복학생 대표로 시위를 이끌다 또다시 끌려간 유치장. 그곳에서 사법시험 최종합격 소식을 듣는다. 유신 반대 시위 전력이 있던 문재인은 판·검사의 길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이 두 번째 운명으로 문재인을 이끌었다. 두 번째 운명은 노무현이었다. 사법시험 동기생 박정규가 노무현과의 만남을 이끌었다. 노무현이 1981년 독서모임 학생과 시민 등이 빨갱이로 조작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첫발을 떼던 때였다. 두 사람은 부산의 대표적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이 물결칠 때, 문재인은 호헌조치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부산변호사 시국선언’을 주도하는 등 부산의 거리에서 6월 항쟁의 한 가운데로 나섰다.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무현이 정치로 떠난 뒤, 문재인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자리를 지키며 시국사건과 노동사건에서 노동자와 민주운동 활동가들을 변호하는 날들을 보냈다. 10여 년 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나를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니 그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며 문재인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들어간 청와대에서 문재인은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까지 거치며 격무로 치아 10개를 뽑아내야 했다. 2008년 청와대를 떠나며 그는 다시는 정치를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2009년 5월, ‘상주’가 된 그는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은 책 <운명>에 이렇게 썼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 이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내 삶도 그런 것 같다.” 이제 문재인은 세 번째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22살 프랑스 유학생활
6달뒤 어머니 서거
퍼스트레이디 역할 맡아
27살 아버지 서거
5·18땐 영남학원 이사장
46살 한나라당 의원 당선 처음에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박근혜는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2년 2월2일,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육영수씨의 첫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5·16쿠데타 당시, 박근혜는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쿠데타를 위해 아버지가 집을 나설 때, 10살 박근혜는 안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1963년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박근혜는 “아이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걱정된다”는 어머니 육영수의 뜻에 따라 부모와 함께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고 서울의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1964년 성심여중에 입학하면서 청와대로 들어갔다. 신문들이 “영애, 근혜양 합격”이란 기사를 실었다. 아버지가 3선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한 1969년 6월, 성심여고 3학년이던 박근혜는 일본 요코하마를 방문해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 진수식에 참석했다. 당시 신문은 “유니버스 코리아호가 영애 근혜양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가운데 진수했다”고 보도했다. 그해 12월 공화당은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72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3학년이던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씨를 대신해 또 한 번의 유조선 진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을 방문한다. 그가 출국한 날은, 아버지가 유신을 선포한 지 나흘 뒤였다. 아버지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1974년 초, 박근혜는 이공계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비행기 시간에 늦어 급하게 떠나는 자동차를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 박근혜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6달 뒤 어머니의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해야 했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울었다. 그렇게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스물두살이었다. 박근혜는 이때 최태민 목사를 만나 ‘새마음 운동’을 야심차게 벌인다. 갑작스런 아버지 박정희의 서거, 아버지의 피묻은 옷을 빨면서 박근혜는 “남들이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했다. 박근혜는 동생 근영·지만씨와 함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18년간 은둔의 생활을 보낸다. “경황이 없는 중에” 1979년에는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청와대 금고에 있던 돈’ 6억원을, 그리고 1982년에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성북동 집(300평)을 각각 받았다. 5·18 당시 박 후보는 영남학원 이사장이었고, 민주화 항쟁으로 뜨거웠던 1987년에는 아버지의 추도식을 준비했다. 그해 10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이듬해 노태우 전 대통령 취임 뒤엔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이어 1990년에는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책 <겨레의 지도자> 출간, 영화 <조국의 등불> 제작 등 90년대 초반까지 박근혜는 아버지의 재평가 작업에 몰두했다.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당시 대선 캠프의 고문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대구 달성 보궐선거 당선을 시작으로, 2004년 탄핵 정국에서 당 대표를 맡아 치른 총선까지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치르는 선거마다 승리를 거둬 ‘선거의 여왕’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러나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으며, 이후 이명박 정부 5년간 대립과 협력을 오갔다. 올해 당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박근혜는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문재인의 삶 강냉이죽 먹고 중고교
박정희 3선 반대 구속
전두환 부대서 군생활
전역 25살 아버지 사망
유치장서 사시 최종합격
노무현과 부산서 변호사
50살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첫 운명은 가난이었다. 한국전쟁 끝 무렵이던 1953년 1월24일 문재인은 경남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넘어온 부모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근처 명진리 남정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계란 행상을 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 고향에서 ‘수재’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양말 사업은 빚만 남긴 채 실패했고, 문재인은 친구 도시락 뚜껑에 급식으로 나온 강냉이죽을 받아먹었고, 기성회비를 못내 집으로 쫓겨가기도 했다. 1959년 태풍 ‘사라’호가 부산을 강타하던 때에는 살던 집 지붕이 통째로 날아갔다. 문재인도 수재였다. 명문 경남중·고를 다녔다. 중학생 때부터 야당 성향이 강한 잡지 <사상계>를 읽으며 올바르게 사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경남고 2학년 때 3선개헌 반대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고민은 경희대 법학과에 입학한 문재인을 자연스럽게 운동권으로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추진에 반대하는 학내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 제적, 강제징집으로 이어졌다. 호송차에 실려 떠나는 차 뒤편으로 어머니가 “재인아, 재인아”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던 장면을 문재인은 오랫동안 기억한다. 강제징집으로 배치받은 부대는 제1공수 특전여단 3대대. 여단장은 준장 전두환, 대대장은 중령 장세동이었다. 문재인이 전역하던 1978년, 부친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문재인은 고시공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가 들이닥쳤다.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2차를 준비하던 문재인도 거리로 나섰다. 복학 조처로 되돌아간 학교에서 복학생 대표로 시위를 이끌다 또다시 끌려간 유치장. 그곳에서 사법시험 최종합격 소식을 듣는다. 유신 반대 시위 전력이 있던 문재인은 판·검사의 길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이 두 번째 운명으로 문재인을 이끌었다. 두 번째 운명은 노무현이었다. 사법시험 동기생 박정규가 노무현과의 만남을 이끌었다. 노무현이 1981년 독서모임 학생과 시민 등이 빨갱이로 조작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첫발을 떼던 때였다. 두 사람은 부산의 대표적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이 물결칠 때, 문재인은 호헌조치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부산변호사 시국선언’을 주도하는 등 부산의 거리에서 6월 항쟁의 한 가운데로 나섰다.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무현이 정치로 떠난 뒤, 문재인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자리를 지키며 시국사건과 노동사건에서 노동자와 민주운동 활동가들을 변호하는 날들을 보냈다. 10여 년 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나를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니 그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며 문재인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들어간 청와대에서 문재인은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까지 거치며 격무로 치아 10개를 뽑아내야 했다. 2008년 청와대를 떠나며 그는 다시는 정치를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2009년 5월, ‘상주’가 된 그는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은 책 <운명>에 이렇게 썼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 이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내 삶도 그런 것 같다.” 이제 문재인은 세 번째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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