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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학벌타파 못 이루고 교육부를 떠나다 / 한완상

등록 2012-12-13 19:56

2002년 1월22일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필자가 보고한 ‘학벌풍토 타파를 위한 계획’은 그 자리에서 서울대 출신 경제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등 전사회적으로 뜨거운 논쟁과 파문을 일으켰다. 필자는 일주일 뒤 개각 때 1년 만에 교육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2년 1월22일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필자가 보고한 ‘학벌풍토 타파를 위한 계획’은 그 자리에서 서울대 출신 경제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등 전사회적으로 뜨거운 논쟁과 파문을 일으켰다. 필자는 일주일 뒤 개각 때 1년 만에 교육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53
2002년 1월2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시무식을 한 뒤 교육부 집무실로 돌아와 있는데 오후 늦게 국정원의 김아무개 서기관이 인사차 들렀다. 그는 ‘개각이 곧 단행될 것 같다. 교육부총리 자리를 노리는 분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고 전했다. 그 가운데 김아무개 전 노동부 장관도 열성이라고 한다. 영광은 없고 십자가의 고통만 넘치는 자리인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1월17일, 오후에 짬을 내 분당의 자택에서 폐암 투병중인 코미디언 출신 이주일 전 의원을 문병했다. 우리의 인연은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80년대 중반 서울대 연구실로 나를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그는 신군부 시절 전두환 장군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연예인으로서 부당한 차별을 겪었던 억울함을 털어놓았고, 나 역시 미국 망명에서 갓 돌아와 복직한 때였기에 ‘동병상련’을 나눴다. 그는 이날 병상에서 오는 6월 한-일 월드컵 때 우리 선수들이 승리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며 그때까지만이라도 살 수 있도록 국립암센터의 국제적인 폐암 전문의 이진수 박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전화로 그의 뜻을 전해주었더니, 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교육부 출입기자가 ‘나의 방문이 환자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비난하는 가십기사를 썼다. 우리 둘의 인간적 관계를 전혀 모르면서, 확인조차 하지 않고 함부로 펜을 휘두르는 기자의 ‘특권’에 수구신문의 횡포와 퇴락을 보는 듯해서 씁쓸했다.

1월22일 나는 김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교육부 부임 때부터 구상해온 ‘학벌풍토 타파를 위한 계획’을 보고했다. 그런데 서울대 출신의 경제관료들이 내 보고를 대학 평준화 정책 도입으로 오해하고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너무 이례적인 일이라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국무회의는 학술토론 자리가 아니기에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적들로부터 무수한 ‘비하’를 경험했던 김 대통령만은 나의 제안에 공감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대통령은 이날 아침 <대한매일>에서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이력서나 입사지원서의 학력란 폐지 방안’에 대해 인적자원개발회의에서 논의해 국가정책 여부를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은 중립을 지킨 셈이다.

나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이처럼 논란이 됐기 때문에 보수언론들이 내 제안을 ‘대학 평준화 시도’나 ‘서울대 폐지론’으로 각색해 선정적으로 다루거나 색깔론 시비를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예상대로 이튿날 조간마다 국무총리실 출입기자발로 일제히 보도했는데, 대체로 ‘불쑥’, ‘즉흥적’이라며 절차상의 문제를 꼬집었다. 교육부 출입기자들은 내가 이미 취임 전부터 했던 구상이자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여러 차례 세미나 등에서 주장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일보>는 국정홍보처장의 말을 인용해 ‘대통령도 내 실책을 지적했다’고 왜곡 보도 하더니, 그다음날에는 칼럼을 통해 “교육부가 얄궂은 시민단체들을 앞세워 홍위병식 학벌평준화를 밀어붙인다”며 색깔론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1월24일 <대한매일>은 1면에서 ‘학벌타파의 바람이 분다’는 제목으로 내 제안을 뒷받침하는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시민연대에서 지자체장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자의 학력 기재를 없애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대변인을 통해 환영과 지지 성명을 냈으며, 삼성·현대·엘지그룹 등 기업에서도 동참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왜 학벌 타파가 한국 교육개혁의 중심과제여야 하는가. 나는 이미 논문을 써내도 충분할 만큼 자료 조사와 연구를 해왔다. 한 가지 예만 들면 관계 국·실장을 통해 역대 정부 각료의 출신 대학 분포를 조사해봤는데, 62년 박정희 집권 이래 국민의 정부까지 40년간, 각료 616명의 46%인 285명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부 때나 문민을 표방한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나 서울대 지배력은 변함이 없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서울대 학벌은 곧 출세 보장으로, 우리 사회의 권력 또는 지배층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이런 와중인 1월29일, 나는 교육부를 떠나게 되었다. 전날 저녁 이상주 청와대 비서실장과 만났더니, 내일 내각 개편을 하는데 자신이 교육부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추진해온 교육개혁 방향과 학벌풍토 타파 계획을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학벌타파 논란’의 후폭풍 속에서 갑자기 바뀐 모양새 때문에 혹여 정부 안팎의 보수세력에 의해 내가 밀려났다거나 디제이의 진보정책 의지에 대한 회의나 비난이 일까봐 마음이 불편했다. 벌써부터 임기말 레임덕 현상의 기미가 감지되고 있기에 더욱 우려스러웠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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