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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김홍일 의원 청탁 거절한 뒤 씁쓸 / 한완상

등록 2012-12-12 19:55수정 2012-12-12 22:28

2001년 국민의 정부 초대 교육부총리로서 개혁 정책을 실천하고자 애썼던 필자는 재야 시절 고난을 함께했던 감방동지인 김홍일 전 의원 등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 사진은 1978년 여름 문동환 목사의 공동체 ‘새벽의 집’에서 디제이·김지하 시인 등 민주인사 석방 요구 단식농성을 하던 때로, 왼쪽부터 윤보선 전 대통령과 부인 공덕귀씨,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와 장남 홍일씨, 김상현 전 의원 등이다.
2001년 국민의 정부 초대 교육부총리로서 개혁 정책을 실천하고자 애썼던 필자는 재야 시절 고난을 함께했던 감방동지인 김홍일 전 의원 등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 사진은 1978년 여름 문동환 목사의 공동체 ‘새벽의 집’에서 디제이·김지하 시인 등 민주인사 석방 요구 단식농성을 하던 때로, 왼쪽부터 윤보선 전 대통령과 부인 공덕귀씨,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와 장남 홍일씨, 김상현 전 의원 등이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52
2001년 10월1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총회 참석차 출국했다. 15일 총회가 시작할 때 참석자들은 지난 ‘9·11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항공기 테러’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1분간 묵념했다.

그런데 10월23일 귀국해서 들으니, 청와대에서 내가 유네스코 총회에 참석하고 러시아를 거쳐 귀국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무슨 사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일단 신경을 끄기로 했지만, 신경이 쓰인다. 다만, 재야 시절 누구 못지않게 디제이와 가까이 지냈기에, 2년간 미국 망명생활도 함께 했기에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디제이가 잘 알 것이라고 믿었다. 교육부총리 임명 전화를 받고 대통령께 “역사적으로 보필하겠다”고 말할 때 나는 ‘선공후사’, 사사로운 이익의 관점은 아예 버리기로 스스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몇 차례 사사로운 부탁이 있었다. 지난봄인가, 아태연구소에서 일했던 디제이의 한 측근이 전화를 해서는 20분 정도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교원성과급 문제로 전교조와 갈등을 빚고 있는 와중이어서 따로 만날 여유가 없다고 했더니 그는 전화로는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공익적인 일이라면 전화로 말 못할 일이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더니, 그는 그때 정치 실세인 ㄱ 전 의원의 부탁이라고 했다가, 주저주저 끝에 ‘로열 패밀리’에 관한 일이라고 했다. 디제이의 친인척에게 경기도 지역 한 전문대학의 이사장 자리를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현시점에서 들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마도 나의 매정한 듯한 거절이 그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고, 청와대 또한 언짢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 얼마 뒤에는 또다른 정치실세가 자신의 지역구인 한 섬마을 초등학교에 컴퓨터 50대를 보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산간 마을이나 외딴섬에서 공부하는 우리 어린이들의 학습능력을 더 높이기 위해 아주 필요한 공익적 조처였기 때문이다.

또 한번은 가을쯤이었다. 기초학문 진작을 위한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데 비서실에서 쪽지를 보내왔다. “집무실에 김홍일 의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와보니, 김 의원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 있었다.

재야시절 아버지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초를 겪은 그였다. 1980년 가을 우리는 서대문 교도소에 함께 갇혀 있었다.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디제이에게 사형 구형이 내려진 그해 9월10일, 법정에서 교도소 2층 감방으로 돌아오니, 바로 아래층 감방에 있던 그가 내게 외쳤다. “한 박사님, 우리 아버지 어떻게 되셨어요?” 나는 곤혹스러웠지만 사실대로 말해줬다. 그때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메시지를 가장 슬퍼할 사람에게 알려줘야 했던 아픔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든 김 의원을 보자 나는 한편 반갑고 또 한편 무슨 다급한 일인지 불안했다. 몇년 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디제이 측근의 부인이 교육부에 전문대 설립 신청을 했는데 3년 넘게 거부당하고 있다고 그는 하소연하듯 얘기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사실 교육부 취임 직후 보니, 국회의원 등의 요구로 전문대 설립 허가가 남발돼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익’이 개입될 여지를 철저히 차단하고자 전문대와 4년제 대학 신설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새로 구성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신청도 최근 이 위원회에서 거부된 모양이었다. “이제 한 박사님이 교육부총리가 되셨으니 쉽게 풀릴 것으로 예상했다”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청와대 쪽의 뜻도 실려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더 긴장됐지만 나는 결국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대통령 아들이기에 들어줄 수가 없네.” 물론 야속하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해야 그의 아버지가 역사적으로 떳떳해질 수 있을 것임을 나중에 깨달을 것이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일어서더니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떠났다. 내 마음속에는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80년 가을 그의 눈물을, 21년 뒤 오늘은 그의 화난 얼굴을 봐야 하는 내 처지가 순간 처연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데 비서실에서 놀라 들어왔다. “부총리님 괜찮습니까, 왜 김 의원이 저렇게 화난 듯 떠났습니까. 괜찮습니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혼자 있고 싶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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