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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공순이가 오퍼레이터 됐으면 달라진 걸까

등록 2012-11-09 19:51수정 2012-11-10 15:26

청계천 야학에서 공부하는 여공들. 1973년 7월의 모습이다. 대부분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학업이나 진학을 포기한 채 공장에 와야 했다.
청계천 야학에서 공부하는 여공들. 1973년 7월의 모습이다. 대부분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학업이나 진학을 포기한 채 공장에 와야 했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17> 여공애사(하)
그 시절 ‘공순이’들의 숙명이었던 가난과 무식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난하니 못 배웠고, 못 배웠으니 무식했다. 대부분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학업이나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들은 비록 진학은 포기해야 했지만, 공부에 대한 갈망까지 접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고된 공장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공부였다. 그들의 꿈을 채워주기에는 턱도 없었지만, 공장 주변에는 다양한 배움의 공간이 존재했다.

14살짜리 구속하려고 주민번호까지 조작

많은 소녀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보이는 일자리를 찾아 공장을 옮기곤 했다. 열두시간 맞교대로 일하면 학교 갈 엄두를 못 냈지만, 하루 3교대로 일하는 방직공장에서 아침 6시부터 일하는 근무조에 있으면 학교에 다닐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일주일마다 한번씩 바뀌는 근무시간 때문에 3교대라 해도 야간학교에 다니는 것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공장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남영나이론의 경우 1000명이 넘는 종업원 중 야간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50명가량 되었지만, 일이 바쁠 때면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러도 반장이나 조장이 출퇴근 카드를 내주지 않아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울며불며 대들고 싸워 반장이 ‘쟤는 성질이 더러워 못 당하겠어’라며 카드를 내준 서너명만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일부 기업에서는 산업체 부설학교를 세웠다. 낮에는 공장에서 돈 벌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산업체 부설학교는 배움에 목말라 있던 여성노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마산의 한일합섬은 국내 최초의 산업체 부설학교인 한일여자실업학교를 세웠는데, 팔도에서 모여든 여성노동자들이 한 줌씩 고향에서 잔디를 가져와 교정에 심었다는 ‘팔도잔디’는 기업 홍보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산업체 부설학교는 빛과 그림자를 다 갖고 있었다. 낮에 고된 노동을 하고 밤에 공부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산업체 부설학교에서 근무했던 교사들 중에는 열정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을 보며 가르친다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회고하는 사람들도 많다. 수업료는 회사의 부담이었지만, 회사를 그만두면 학교도 그만두어야 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졸업장을 손에 쥐려면 회사를 다녀야 했고, 회사의 입장에서 학교는 여공들의 이직을 막아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영등포역 앞에 자리잡았던 한림학원은 배움에 목마른 인근지역 여공들 모두의 ‘모교’였다. 이곳에는 시간대별로 강좌가 개설되어 있어 근무시간이 자주 바뀌는 3교대라 해도 학원에 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시도 좀 들어가고 소설도 들어 있는 교재로 국어도 배우고 한문도 배우고, ‘유 아 마이 선샤인’ 같은 팝송을 주로 가르치는 음악 시간도 있었다. 영어도 있는 ‘숙녀 교양반’은 이곳의 대표적인 강좌였다. 이곳을 거쳐 간 여성노동운동가들은 이곳이 다닐 때는 나름 즐겁고 재미있었으나 나중에 생각해 보면 여공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적당히 다독거려 주면서 저임금의 일부분을 고스란히 가져간 것이라 비판했다.

청계피복노조에서 겨우 20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노조 사무실에 처음 노동교실을 개설했을 때 수강을 원한 노동자는 200명이었다고 한다. 노조의 부녀부장 정인숙이 1972년 모범근로여성으로 뽑혀 청와대에 초청받아 갔을 때, 육영수 여사는 필요한 게 뭐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정인숙은 평화시장에 여성노동자가 2만명인데, 상당수가 15살 미만 여성으로 다들 공부하고 싶어하나 공부할 장소가 없어 못하고 있으니 장소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동화시장 옥상에 새마을 노동교실이 마련되었지만, 사용주들이 운영권을 갖고 교육내용을 관장하려 하면서 청계노조와 마찰을 빚었다. 청계노조의 노동교실은 육영수 여사의 주선으로 시작되었지만, 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1977년 9월 건물주에게 압력을 가해 노동교실을 폐쇄하려고 했다. 노조에서는 노동교실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고, 빼앗길 때 빼앗기더라도 소리라도 한번 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노동자들은 건물주가 통고한 노동교실 폐쇄시한 하루 전인 9월9일 노동교실에 모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 추모가를 울면서 부르며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은 이들을 연행하여 이북정권 수립일인 9월9일에 농성을 시작한 것을 보면 청계피복 노조는 빨갱이 소굴이라며 노동자들을 닦달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여러 명이 구속되었는데, 경찰은 겨우 14살의 형사미성년자인 임미경을 구속시키기 위해 주민등록번호까지 조작했다.

민주노조가 활발했던 영등포와 인천의 노동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배움의 공간은 산업선교회였는데, 이 문제는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1973년 5월21일 육영수 여사의 주선으로 동화시장 옥상에 마련된 새마을 노동교실. 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주에게 압력을 가해 노동교실을 폐쇄하려고 했다.   민주화기념사업회
1973년 5월21일 육영수 여사의 주선으로 동화시장 옥상에 마련된 새마을 노동교실. 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주에게 압력을 가해 노동교실을 폐쇄하려고 했다. 민주화기념사업회
배움은 시다들의 꿈이었다
낮엔 미싱을, 밤엔 야학엘 갔다
영어라벨 M과 W를 혼동해
병신이라 욕먹는 동료를 보며
국퇴 신순애는 선생님이 되었다 

독재 타도를 외치지 않았어도
‘공순이도 인간’이란 자각은
그 자체로 엄청난 투쟁이었다
그래서 민주화의 주역은
박정희도, 이름난 운동가도
무쇠팔뚝 남성노동자도 아니다

한글 모른다고 시치미 뗀 한글선생님

1970년대의 여공들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국졸 혹은 국교 중퇴가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면 평화시장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로 된 라벨을 다는 것은 한글도 모르는 소녀들에게는 고역이었다. 신순애는 M과 W를 혼동해 노상 “야 이 병신아 라벨 하나도 제대로 못 다냐?”는 욕을 먹는 시다를 보며 한글교실을 만들었다. 국민학교 3학년 중퇴의 신순애가 교사가 되어 조합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자신 뒤늦게 한글을 깨친 신순애의 한글교육법은 남달랐다. 그는 ㄱ, ㄴ, ㄷ, ㄹ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첫날은 다림사, 선정사, 연희사, 현대사 등등 한글교실에 온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의 상호를 가르쳐주었고, 주변 친구가 일하는 상호를 두 개 이상 알아오는 것을 숙제로 내주었다. 두번째 수업은 한글교실에 나온 학생들의 이름을 읽고 쓰게 했고, 숙제로는 부모님 이름 써오는 것을 내주었다. 세번째 시간에는 학생들이 사는 동네 이름을 쓰게 했고, 네번째 시간에는 재단사, 미싱사, 시다, 재단보조, 사장 등등 공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공부했다. 이렇게 공부하자 학생들은 스스로 오늘 숙제는 원단 이름 써오기를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다섯번째 수업은 남방, 바지, 바바리, 청바지, 블라우스, 아동복, 신사복, 숙녀복 등 자신들이 만드는 옷 이름에 대해 공부했고, 여섯번째 시간에는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신평화시장, 남대문, 동평화시장 등 자신들이 일하는 상가의 이름을 읽고 쓰게 했다. 이렇게 실생활에서부터 한글 공부를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은 국어책을 줄줄 읽게 되었다.

한글 교사였던 신순애는 전두환이 집권한 뒤인 1980년 12월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쥐새끼만도 못한 평화시장 자식들, 여기서 죽어나가도 자신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며 겁을 주었다. 신순애는 노동교실 폐쇄 사건 때 잡혀가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지 않아 겁도 났지만, 자신 때문에 다른 조합원이 잡혀 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모든 조사의 시작은 자술서였다. 수사관은 신순애에게 노동조합을 알게 된 때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다 쓰라고 백지를 내밀었다. 동료 여성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신순애는 “저 한글 모르는데요”라며 시치미를 떼었다. 수사관은 대뜸 따귀를 올려붙였지만, 한글 모른다고 버티니 “거짓말하면 죽을 줄 알어”라고 협박한 뒤 고향 남원의 국민학교에 신순애의 학적을 조회했다. 국민학교 3학년 중퇴라는 결과에 수사관은 “한글도 모르는 년이 무슨 데모야”라며 욕을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순애는 한글 모르는 척 시치미 떼면서 20여일 조사받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담당수사관은 더 힘들어했다고 회고했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에는 <또 하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공안기관에 잡혀간 뒤 어떻게 조사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간첩사건이나 조직사건을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손수레로 하나 가득이 되는 방대한 수사기록도 몇 장의 자술서를 토대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무학에 가까운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도 모나미 볼펜 한 다스가 다 닳도록 두들겨 맞아가며 어찌나 자술서를 써댔던지 30년이 지나도록 가운뎃손가락에 박인 굳은살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자술서를 쓰지 않고 버텼다니!

비록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살인정권의 탄압 아래 70년대의 민주노조들은 하나씩 깨져버렸지만, 이들의 역사는 무수히 많은 작은 승리의 축적으로 쓰여졌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식인들은 비장하게도 ‘단 한번 승리’를 외치지만, 그 최후의 승리는 민중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작은 승리를 통하지 않고는 오지 않는 법이다.

80년대에 접어들자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젊은 지식인들은 70년대 여성노동자 중심으로 경공업 사업장에 건설된 개별기업 단위의 민주노조가 경제투쟁과 조합주의에 매몰되었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분명 70년대의 노동자들은 유신헌법 철폐나 군부독재 타도와 같은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구호를 외쳐야만 정치투쟁인가? 유신체제의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과 복종을 강요당하던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행위였다. 당시의 여성노동자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조합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만 생각했다. 김진숙도 해고 통보를 받고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더니 그런 걸 유식한 말로 연좌농성이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누가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연대란 말은 몰라서 쓰지 않았지만, 다른 사업장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쫓아가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원풍모방처럼 노동자들이 일치되어 싸워서 좋은 노동조합을 이룩한 경우,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노동조합도 없는 어려운 사업장에 들어가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자신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끝내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탈바꿈하는 데 실패한 남영나이론의 김연자는 그때 자신들도 원풍과 같은 좋은 노조 가져 보는 게 꿈이었다면서, 그런 꿈을 가졌던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자신들을 조합주의자라 비판하던 자들이 지금 새누리당이나 박근혜 캠프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을 통렬히 비판했다.

자식은 기름밥 먹이지 않겠다는 모진 맹세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연쇄반응의 처음을 장식한 와이에이치(YH)사건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7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7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일상적인 모임이었던 목요기도회에서 전태일과 동일방직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가장 중심적인 주제였고, 구속자들의 가족 외에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종로 5가에 와 기도회의 자리를 메웠다. 이들이 노동자로서 우뚝 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한국 사회는 노동자들의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다른 방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평생을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자식을 키운 부모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사무직들에게 반말을 들으며 내 새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름밥 먹이지 않겠다고 모질게 맹세했다. 온 나라가 거국적으로 벌인 필사적인 노동탈출의 결과 그 꿈은 이루어졌고,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에서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어 고교졸업생의 거의 90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을 천시하다 못해 적대시하는 현실은 그냥 두고 개인적으로만 노동탈출을 시도한 결과는 어떠한가? 산업화 세력들이 말하는 선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차장은 안내양으로, 식모는 가정부로, 운전사는 기사로, 청소부가 미화원으로, 공고는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로, 공순이는 오퍼레이터로 바뀌었지만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때의 여성노동자들은 지금 잘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원풍은 지금도 200명 가까이 모이고, 동일방직도 100명 가까이 모인다. 청계피복의 지난번 모임에는 80여명이 나왔는데 아직도 평화시장 부근에서 미싱 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더러는 눈이 나빠져 더이상 미싱을 타지 못하고 건물 청소를 하며 먹고살고 있었다. 원풍에서도 남편 잘 만난 소수 빼고는 다 마트에서 식당에서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개중에는 드물게 새누리당 당원이 된 사람도 있지만, 다들 여전히 그때 노조 활동하던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미용실에서 4대강 사업 찬양하는 손님과 언쟁을 벌여 손님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얘기는 꼭 하고야 마는 것이 70년대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이다. 그들의 자식들은 대부분 대학생이 되었지만, 심야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해야 하고, 졸업해도 비정규직이라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면 그 역사는 반드시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 성취의 진정한 주역은 박정희도 아니고 몇몇 이름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니다.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다. 그 당시 민중의 최전선을 지킨 것은 남성노동자들의 무쇠팔뚝이 아니라 가녀린 ‘공순이’들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들의 역사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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