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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햇볕정책은 흡수통일 아니다’ 전금철에 열변 / 한완상

등록 2012-11-06 20:07

1998년 4월1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차관급회담에서 북쪽 대표인 전금철 정무원 책임참사가 전체회의 불참을 통보한 뒤 숙소를 떠나고 있다. 이후 8월21일 베이징에서 만난 필자에게 그는 당시 회담 실패 여파로 북한 당국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강한 불신을 갖게 됐음을 밝혔다.
1998년 4월1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차관급회담에서 북쪽 대표인 전금철 정무원 책임참사가 전체회의 불참을 통보한 뒤 숙소를 떠나고 있다. 이후 8월21일 베이징에서 만난 필자에게 그는 당시 회담 실패 여파로 북한 당국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강한 불신을 갖게 됐음을 밝혔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26
1998년 8월21일 저녁 베이징의 자오룽호텔에서, 나와 김승균 남북민간교류협의회장은 전금철 북한 정무원 책임참사의 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들었다. 이제 내가 한 대답을 대충 정리해본다.

우선 국내 정치문제에 대해 나는 두 가지만 언급했다. 남쪽의 언론은 지나치게 자유롭게 보도하기 때문에 때로는 현실을 파악하기가 힘든 것 같지만 열린 남한 사회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결코 흡수정책의 변종이 아님을 조목조목 따지며 얘기했다. 5년 전 문민정부의 첫 통일부총리로서 내가 주도해 리인모 노인을 가족 품으로 조건 없이 돌려보낸 인도적 조처가 바로 햇볕론적 포용정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 그때 와이에스 정부는 핵문제까지도 인도주의 문제인 이산가족 문제와 연계하지 않았고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북쪽에서 동해에 잠수정을 침투시켰어도 경제인들의 방북을 막지 않았다. 김 대통령께서 미국 방문 때 클린턴 정부에 대북 경제제재 조처의 해소를 건의한 것은 대단한 햇볕론적 결단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햇볕론적 포용정책은 남북이 공변공영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북한 체제의 변화, 즉 북한의 냉전세력만 햇볕으로 벗게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남한 안에 깊이 뿌리내린 냉전제도와 냉전의식도 함께 벗게 하자는 것이다. 함께 냉전체제를 극복하자는 뜻으로 공변을 말하는 것이다.”

내 설명을 듣자 그는 참고가 되었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이어 나는 햇볕정책과 정경분리정책은 동전의 양면같이 함께 갈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런 햇볕 아래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대북사업은 계속 진척될 것이고, 이런 원칙에 따라 남북 민간교류도 그 어느 정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척될 것이라고 나는 낙관론을 폈다.

“정경분리가 진실로 실현되려면 경제는 냉전논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남에서 북에서 모두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를 극복해야만 정경분리 원칙은 실천될 수 있다. 지난번 강릉 앞바다에서 침몰한 북한 잠수정 사태 때처럼 남북간에 냉전 긴장이 고조되면 누가 덕을 보며 누가 좋아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남북 체제 안의 강경세력에게만 이로운 결과가 될 것이고, 남북의 화해협력과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겐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내 설명을 경청한 전 책임참사와 김경남 부소장은 이해하는 듯했다. 내친김에 나는 그가 의문을 제기한 한-미 합동 군사훈련과 ‘통일 뒤에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있다’는 디제이 발언의 의미도 내 나름대로 설명했다. “남쪽 국민들은 한-미 군사훈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전쟁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않는데, 북쪽에서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우리 생전에 통일되는 것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통일될 터인데 일단 통일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지금 남북 분단 상태에서 미군은 북에 대한 군사적 억지 정책에 따라 주둔하고 있다. 하지만 통일이 되면 주변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의 전면적인 경쟁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이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한반도가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균형자나 조정자 구실을 감당하는 데 미국의 힘을 활용할 가치가 여전할 것이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는 대로 오늘 오간 대화 내용을 청와대에 알리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김 대통령의 8·15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9·9절에 북쪽의 응답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조평통 서기국에서 이미 서울에 부정적인 공개질문서를 보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 참사는 디제이의 8·15 제안에 대해 김정일 장군의 5개 원칙에 대한 응답이 아니어서 실망했다고 했다. 귀국한 뒤에야 나는 그의 얘기가 조평통에서 공개질문서를 보낸 이유였음을 짐작했다.

그날 밤 9시40분께 우리는 식당에서 나왔다. 무려 7시간 가까이 대화를 한 것이다. 북쪽 대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표정이 풀어져 있었지만 나는 내내 심히 언짢았다. 그쪽에서 돌연 내일 우리의 평양행을 연기해달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물었더니 전 참사는 지금 평양이 몹시 바쁘다고 했다. 9월 초 큰 행사를 앞두고 북한의 행정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력이 총동원되고 있다며, 이달 말 큰일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했다. 그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한 선생을 정중하게 모셔야 하는데 이번에는 평양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이튿날 서울에 돌아와보니, 언론들이 내가 북한 당국에서 비자를 거부당해 평양에 가지 못했다고, 나한테 확인도 없이 ‘오보’들을 해놓았다. 내내 불쾌한 일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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