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21일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 이른바 ‘북풍공작 사건’으로 서울지검에서 조사를 받다 스스로 복부를 자해하는 소동을 벌여 서울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필자는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을 실패로 이끈 냉전세력의 말로를 보는 듯해 기분이 씁쓸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18
1998년 3월16일. 이른바 ‘북풍공작’의 진실이 차츰 밝혀질 것 같다. 앞서 2월초 새정치국민회의가 공개한 안기부의 ‘북풍공작 계획서’를 보면, 지난 대선 막바지에 안기부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고자 ‘월북한 오익제(전 천도교 교령) 활용 계획’ 등을 세워 색깔공세를 시도했다고 한다.
나는 디제이가 대통령이 된 마당에 수구냉전세력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북풍공작에 관련된 진실의 전모를 밝히는 데 주저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냉전시대의 온갖 정치적 공작을 파헤쳐 그 진실을 밝혀내고 근절시켜야 할 역사적 책무를 지닌 정치지도자다.
지금 그는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각료들과 주요 보직을 놀랍게도 냉전수구세력 또는 평화의 신념 없는 ‘전문가’로 채우고 있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대사들도 그런 인물로 채울 것 같다. 한반도의 평화와 국내 민주개혁을 위한 큰 싸움을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과연 바람직한 햇볕정책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
김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와이에스에 이어 디제이마저 실패한다면 한반도의 평화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반평화·반민주세력이 계속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이고 그만큼 역사는 후퇴하게 될 것이다. 와이에스와 반대로, 디제이는 늘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문제인 것 같다.
3월19일. 저녁은 현대건설의 이내흔 사장과 함께 했다. 북한 옥수수 심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순권 박사의 국제옥수수재단이 과연 믿을만한 조직인지, 김 박사와 디제이의 관계는 어떤지를 물었다. 현대그룹에서 5억원을 재단에 희사하기로 했는데 과연 이 재단을 믿을 수 있는지 나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김 박사의 순수한 열정은 믿을 수 있으나 디제이와의 관계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다만, 북한의 식량난을 극복하는 데 현대그룹이 도와주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인도주의적 지원을 통해 신뢰가 구축됨으로써, 언젠가 나중에 북한의 인프라 구축에 현대건설이 큰 구실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새 정부 들어 각 조직 안에 호남 인사들이 점령군처럼 진입하고 있다는 얘기들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여러 국가기관에 호남인 진출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평화와 민주개혁에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인가 하는 것이 아니겠나. 나는 오히려 대통령 주변과 각료들 중에 냉전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는 게 염려스럽다고 했다.
3월23일. 점심때 두레교회의 김진홍 목사가 찾아왔다. 그는 북한의 합영제를 통해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 식량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했다. 참 좋은 선교활동이라고 나는 격려해주었다. 다만 북한 동포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십자군식 선교는 조심하라고 했다. 사도 바울의 공감적 선교로 북한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나저나 지난 21일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자해소동으로 북풍공작 수사가 더욱 꼬이게 되었다. 극우냉전세력의 처량한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권 전 부장은 와이에스 초기 군의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해체하는 개혁을 추진한 인물이다. 안기부장으로 발탁되면서 와이에스의 보수화와 함께 그도 수구화되더니, 이제 자해라는 불행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착실한 기독교 신자요 장로인 그가 어떻게 이렇게 되고 말았나, 참으로 안타깝고 안쓰럽다.
3월24일. 세계교회협의회의 아시아지역 간사로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던 오재식 선생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기독교 재야의 화합 문제를 논의했다.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와 ‘비판적 지지’로, 와이에스 대 디제이 지지로 갈라졌던 재야세력을 통합시켜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이 성공하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데 우리는 전적으로 동감했다. 이를 위해 박형규·김상근·이해동 목사와 이문영 교수, 예춘호 선생과 곧 만나서 논의해보기로 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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