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전임 김영삼 대통령이 바라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한 뒤 환호에 답하고 있다. 필자는 파란만장한 삶의 깊이가 담긴 그의 취임사를 들으며 시적 감동을 주는 새 정치를 기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16
1998년 2월22일 오전에 미국 조지아대학의 박한식 교수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며칠 전 코카콜라 컴퍼니와 <에이비시>(ABC) 방송의 의뢰로 북한을 다녀왔다고 했다. 오는 4월에 에이비시의 간판 앵커인 피터 제닝스와 함께 북한을 다시 방문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낸 샘 넌과 레이니 전 주한 미대사가 이번에 북한 아태평화위 김용순 위원장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고 전했다. 지난해 7월20일 두 사람이 북한 외교부 초청으로 방북했을 때는 내내 푸대접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북한 실세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니 제대로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평양은 지금 북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엠바고(봉쇄)’를 해제해줄 것을 갈망한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북의 아태평화위가 이 문제를 주도하고 있는데, 곧 취임할 김대중 대통령의 새 정부에도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주로 김용순 위원장의 의견을 전달한 박 교수는 3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북은 디제이의 새 정부가 평양 당국과 의논 없이 통일문제를 일방적으로 불쑥 발표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65살 이상 고령자에게는 이산가족 상봉을 허락한다든지, 6자회담을 불쑥 제안한다든지 하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양 당국은 정경분리의 원칙 아래 새 정부와 공식 또는 비공식 접촉을 바란다. 흥미롭게도 자민련 박태준 총재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둘째, 평양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기를 바란다. 디제이가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남북대화를 추진할 것으로 평양은 짐작하지만, 이 합의서에는 절차와 수단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남북간 물밑접촉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셋째, 평양은 워싱턴 쪽과의 협상에만 매달려 서울을 따돌리는 전략을 이제는 그만둬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이런 통미봉남 전술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북한 당국도 알고 있기에 디제이 정부와는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싶어한다.’
이어 박 교수는 남북이 모두 군축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샘 넌 의원의 제안에는 북에서 별 반응이 없다고 했다. 샘 넌은, 남한이 아이엠에프(IMF) 사태로 경제적 곤경에 빠져 있는 지금 미국의 군수업자들이 한국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전했다고 한다. 나는 샘 넌의 성숙한 인식에 내심 안심했다.
여하튼 평양은 지금 북-미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관계도 개선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이미 김 대통령 당선인이 흡수통일을 반대한다는 원칙을 강력하게 천명한 만큼, 이에 호응해 북한도 적화통일 전략을 확실히 포기한다는 선언을 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박 교수는 평양을 떠나올 때 북한의 리종혁 조국통일연구원 원장이 내게 안부를 전했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내가 디제이 정부에서 일하게 될 것인지도 물었다고 한다. 아마도 얼마 전 한 신문에서 나와 관련한 기사를 읽은 것 같다고 했다. 아니면 나의 햇볕정책의 아이디어가 디제이의 대북정책에 가깝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제이는 통일문제에 관한 한 자신이 대가요 최고의 전문가로 확신하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그 분야에 활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대북정책을 세우고 실천해나갈 것이고, 다만 그에게 필요한 충직한 참모들을 활용할 것이다.
2월25일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며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오늘 디제이의 취임사는 다소 산문적이었으나 그의 삶 자체가 파란만장해서인지 그 속엔 시적인 영감이 깊이 스며 있는 듯하다. 앞으로 그가 진부한 정치, 산문적 정책을 뛰어넘는 시적 감동의 정치를 펼쳐나가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2월28일 총장으로서 마지막으로 방송대 졸업식에 참석한 뒤 제정구 의원과 친동생인 제정원 신부, 김문수 의원 등과 저녁을 함께 했다. 나는 이제 막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그래야 이 땅의 민주세력이 설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제정구 의원은 새 정부에 대해 낙관하지 않았다. 그는 늘 디제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제 의원은, 지금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한나라당 안에 내각제를 선호하는 세력이 디제이피 쪽으로 합세하고, 민주개혁세력은 그에 맞서 대동단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언뜻 그 의견에 찬성할 수 없었다. 디제이가 제이피와 결별하고,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는 민주개혁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내각제나 이원집정제 세력과 겨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의원은 내 생각이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내가 더 순진한 생각, 그래서 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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