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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주식매각 흑막 폭로에 살해 협박으로 답한 ‘정수장학회’

등록 2012-10-19 15:55수정 2012-10-20 10:23

유신 직후인 1973년 3월 반공법 위반과 공갈 및 뇌물수수 사건으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국회의원들. 왼쪽에서 넷째가 주식매각 흑막을 폭로한 뒤 살해 암매장 협박을 받은 이종남. 나머진 왼쪽부터 조연하, 김상현, 조윤형, 김한수. 보도사진연감 74
 
유신 직후인 1973년 3월 반공법 위반과 공갈 및 뇌물수수 사건으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국회의원들. 왼쪽에서 넷째가 주식매각 흑막을 폭로한 뒤 살해 암매장 협박을 받은 이종남. 나머진 왼쪽부터 조연하, 김상현, 조윤형, 김한수. 보도사진연감 74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16>장물바구니 정수장학회(상)
장학회 강탈이란 비판 속에
1971년 박정희는 MBC 증자 단행
재벌 7곳에 10%씩 강매하고
장학회 지분을 30%로 낮췄다
‘탈박정희화’ 노렸지만
변함없이 ‘박정희 거’였다

박정희가 죽자 동서 조태호가
장학회 이사장 직무대리에,
박근혜와 약혼설까지 나돌던
신기수는 이사 자리를 차지했다
김지태는 82년 절망속에 숨졌다

지난 9월24일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을 옹호하는 자신의 발언 때문에 지지율이 급락하자 서둘러 과거사에 관해 사과했다. 일부에서는 사과의 진정성을 문제 삼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과를 환영하거나 일단은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난을 통해 사과는 안 해도 좋으니 피해자들에게 상처나 주지 않도록 ‘그 입 다무시라’고 일갈했지만,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일단 지켜보자는 쪽이었다. 사과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수장학회는 현재 장학회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방송(MBC) 주식 30%와 부산일보 주식 100%를 매각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장물의 처분은 인질납치 강도극에 이은 또다른 범죄행위이다.

동서와 동창들에게 모든 요직을 맡기다

5·16장학회가 처음 출범할 때는 단순히 민간에 재단법인이 하나 생긴 것이 아니었다. 5·16장학회는 군사반란으로 수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직접 나서서 조직한 준국가기관 성격의 장학회였다. 당시 언론은 5·16장학회를 ‘정부의 뒷받침’으로 ‘국가적인 장학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반관반민의 법인체’라고 소개했다. 박정희가 5·16장학회를 만든 것은 육영사업에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장학회를 만들지 않더라도 가난한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군사정권이 5·16장학회를 급히 만든 것은 처음 김지태를 잡아 가둔 뒤 ‘재단법인 김지태장학회’를 만들자고 꼬드겼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정부가 이미 한국방송(KBS)과 서울신문을 갖고 있는 마당에 언론사를 빼앗아 정부 것으로 만드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김지태의 이름을 딴 공익법인을 만들자고 한 것이다. ‘삼성 이건희장학재단’이나 ‘현대차 정몽구재단’처럼 무슨 일 생기면 재벌 회장들이 휠체어 타고 나타나 어물어물하다가 자기 이름 붙인 공익재단 만드는 것으로 ‘퉁치는’ 방식의 모델을 50년 전에 김지태를 가둬 놓고 군사정권이 제시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기였다. 김지태가 운영하던 부일장학회는 임의단체였을 뿐 아직 법인체로 등록하지 않은 상태였다. 군사정권은 부일장학회를 재단법인 김지태장학회로 개편하면서 김지태가 원래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삼으려 했던 토지 10만평 이외에 김지태가 보유한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 주식을 김지태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기부하도록 한 뒤, 김지태장학회 대신 5·16장학회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런 비열한 경로로 출발한 5·16장학회는 김지태에게서 강탈한 언론사를 담아두는 장물바구니였다. 5·16장학회는 총리급 대우를 받는 재건운동본부장 이관구를 이사장으로 하고, 이병철이나 김연수 같은 거물급 재벌을 이사로 선임했음에도 이렇다 할 모금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이병철과 김연수같이 돈 많은 이사들도 체면치레 수준의 돈만 냈을 뿐 5·16장학회의 기본재산은 거의 대부분 김지태에게서 강탈해 간 언론사 주식이었다.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삼으려던 토지 10만평은 5·16장학회가 정상적인 육영사업을 위한 기관이었다면 반드시 필요한 땅이었지만, 1년여에 걸친 인질납치범들 간의 장물 분배 과정에서 국방부로 넘어가버렸다.

5·16장학회가 처음 발족할 때와는 달리 박정희는 곧 5·16장학회를 동창과 친척들에게 맡겨버렸다. 김지태의 재산을 강탈하여 5·16장학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한 전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그는 전리품 부산일보 사장을 거쳐 1964년 8월 문화방송 사장이 되었다. 당시 문화방송 사장은 김지태로부터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받아 온 전 법무부장관 고원증이었는데, 황용주는 5·16장학회는 대구사범 계열이 맡아야지 왜 엉뚱하게 고원증이 맡느냐며 박정희를 졸라 고원증 대신 문화방송 사장이 되었다. 황용주는 취임 직후 언론윤리위법 파동 과정에서 강경파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검찰총장 신직수 등에 맞서 온건론을 제시했다가 이들의 역공을 당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황용주가 떨려났음에도 박정희는 5·16장학회와 문화방송에 대한 대구사범의 지분을 인정해주었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에다가 박정희가 사단장 시절 의무중대장을 지낸 조증출은 황용주의 뒤를 이어 문화방송 사장이 되었다. 1965년 5·16장학회의 2기 이사진을 구성할 때 박정희는 자신의 동서인 조태호를 상임이사에 임명했고, 대구사범 출신으로 조증출과 국제신보 사장 서정귀를 이사에 앉혔다. 이들 이외에도 대구사범 동창들은 문화방송에서 전무이사(윤석린), 기획실장(엄한준), 부산문화방송에서 사장(조증출)과 이사(서정귀), 부산일보에서 사장(황용주, 왕학수), 상무이사(석광수), 대구엠비시에서 회장(왕학수), 광주엠비시에서 사장(최승효), 원주엠비시에서 사장(엄한준)을 지내는 등 몇 안 되는 동창들이 서울과 지방의 문화방송에서 요직을 독점했다.

김대중의 공격과 이종남의 폭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16장학회의 재산이 오백억원에 이른다며 5·16장학회를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부정부패 사례로 공격했다. 그는 박정희가 즐겨 쓰는 ‘중단 없는 전진’을 빌려다가 “부패만이 중단 없는 전진을 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공화당은 이에 대해 “5·16장학회가 재단법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재 운운하여 국가원수에 대해 최대의 모욕을 자행”했다고 펄쩍 뛰었다. 5·16장학회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이 거세지자 5·16장학회 이사장 김현철은 선거 일주일을 앞둔 4월20일 해명서를 발표했다. 김현철은 “본회의 소유 형태는 민법상 재단법인이기 때문에 누구의 사유물도 될 수 없”다며 재단의 재산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오억원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김현철은 “영남대학교 재단과 본 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밝혀드리는 바”라는 말로 장문의 해명을 마쳤다.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김대중이 5·16장학회를 두고 자신의 사유물이라고 비판을 가한 것에 대해 나름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71년 7월1일의 7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박정희는 문화방송과 5·16장학회에 대한 일대 개편을 단행했다. 1971년 6월15일자로 5·16장학회에서 상임이사를 맡고 있던 자신의 동서 조태호, 5·16장학회의 이사로서 문화방송 사장을 맡고 있던 대구사범 동창 조증출을 물러나게 한 것이다. 문화방송의 후임 사장은 3년 반가량 전라북도 지사를 지낸 경향신문 기자 출신의 이환의였다. 박정희는 이환의에게 자신과 육영수는 문화방송 주식이 한 주도 없는데 야당에서 문화방송이 자신의 개인재산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환의가 엠비시 사장을 맡아 “엠비시와 장학회의 재산을 정리해서 국민 앞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71년 9월의 문화방송 유상증자는 한마디로 박정희가 행한 5·16장학회의 ‘탈박정희화’ ‘탈대구사범화’ ‘탈장물화’를 위한 민간공개법인 코스프레였다. 자본금 3억원이었던 문화방송이 현재와 같이(!) 10억원으로 증자를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문화방송은 1969년부터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이었는데도, 증자된 주식(전체의 70%)의 매각은 증권시장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재벌들에 억지로 떠맡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이 증권거래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증자분을 마음대로 장외에서 매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박정희의 직접 지시로 주식 매각을 추진한 이환의는 막무가내였다. 사실 1969년 문화방송의 주식시장 상장은 “자본조달을 위한 공개보다 세제상의 혜택 때문”에 상장한 것으로 국회에서도 “위장공개, 위장거래를 함으로써 합법적인 탈세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화방송은 부실 상장 품목으로 계속 주식시장에서의 퇴출이 거론되다가 1979년 7월 상장이 폐지되었다.

문화방송 주식 10%씩을 재벌들에 ‘억지로’ 떠맡긴 것은 문화방송의 경영 전망이 암울했기 때문은 아니다. 5·16장학회의 문화방송 주식 보유 비율이 ‘아무리 낮아지더라도 문화방송이 ‘박정희 거’라는 점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1억씩을 부담한 7개 재벌(해태, 현대, 금성, 동아건설, 교보가 각 1억원, 미원이 5000만원, 쌍용 1억5000만원)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문화방송 지분 10%를 보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벌 입장에서는 문화방송 주식을 명의신탁 해주고 정치자금을 뜯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부 신문방송학 연구서나 논문에는 이 당시의 문화방송이 마치 재벌 소유로 넘어간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지분 10% 정도씩을 차지한 재벌들이 문화방송의 주주로 행동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주식보유율 물타기에도 불구하고 문화방송의 경영권은 여전히 5·16장학회가 장악했다.

한편 문화방송은 본사 주식 70%의 매각과 더불어 전국적 네트워크의 확보를 위해 애써 키워온 문화방송의 5개 지방 직할국의 영업권(지방사 주식의 85%)도 이때 매각했다. 문화방송의 공식 기록은 이 돈으로 엠비시가 갖고 있던 악성 단기부채를 모두 갚아 경영을 합리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매각이 한창 추진중이던 1971년 9월9일 신민당 이종남 의원은 국회에서 엠비시 본사와 지방사 주식을 매각한 자금이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 쓴 자금을 메우는 데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째서 그런 커다란 것을 떳떳이 증권거래소에 내놓지 않고 수의계약으로 뒷구멍으로 쉬쉬하고 계약을 하려고 합니까?”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강도가 죽었다”고 김지태는 기뻐했지만…

1년 뒤 박정희가 유신 친위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종남 의원은 영등포 소재 구 6관구 헌병중대로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이종남은 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고문을 문제 삼으며 중앙정보부의 해체를 주장한 바 있었다. 고문자들은 “너 국회에서 잘 떠들던데 고문이 어떤 것인지 맛 좀 봐라” 하며 고문을 시작했다. 이종남은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여 산에 갖다 묻고는 자살했다고 상부에 보고하면 그만”이라며 달려든 고문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다가 실신했다. 고문자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작은 소동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실신했던 그가 깨어나 보니 군의관이 진찰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문당하고 실신하고 진찰받고를 반복했다. 유신정권은 국회 재무위 간사였던 이종남이 산업은행 총재가 보내온 추석 떡값을 동료 의원들에게 나눠준 것을 혼자 뇌물 받아먹은 것으로 꾸며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문화방송의 주식 매각 흑막을 폭로한 이종남의 유신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지태 사장의 5남 김영철은 박정희가 죽었다는 뉴스에 부친이 드디어 강도가 죽었다고 말한 장면을 나에게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자신이 소중히 키워온 언론 3사를 빼앗긴 뒤 김지태는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치하에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1971년 문화방송 주식을 매각한다는 소문이 돌자 김지태는 5·16장학회 쪽에 매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부득이하게 매각을 해야 한다면 창업자인 자신이 되사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그 또한 소용이 없었다. 김지태는 박정희가 권좌에서 물러나야 빼앗긴 언론 3사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단행해 헌정을 유린하고 종신집권을 꾀했다.

김지태에게 박정희는 너무 늦게 죽었고, 전두환은 너무 빨리 등장했다. 박정희 사후 김지태는 1980년 4월 5·16장학회에 재산반환을 정식으로 요구했지만, 채 한달이 안 돼 전두환은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하며 전권을 장악했다. 1979년 김지태의 기업은 갑자기 경영난에 빠졌는데 김지태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생하지 못했고, 김지태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빼앗긴 재산도 찾지도 못했다. 1982년 4월9일 김지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5·16장학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5·16장학회의 이사장은 박정희가 상당한 예우를 갖추는 원로들이 임명되었다. 박정희가 죽고 나자 이제 5·16장학회 이사장은 대접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문화방송·경향신문 회장으로 박정희가 죽기 한달 전 5·16장학회 이사장을 맡은 최석채와 5·16장학회 이사로 ㈜문화·경향 사장을 겸했던 이환의는 1980년 6월20일에 열린 5·16장학회의 임시이사회에서 해임되었다. “계엄포고령 등 위반으로 9명의 사원이 연행된 데 대한 부하사원의 통솔감독 불충분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이사회는 이사장 직무대리로 박정희의 동서 조태호를 선임했다.

이보다 앞서 1980년 2월22일 전두환은 5·16장학회의 이사로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 박영수와 통일원장관 이규호를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전두환 밑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전두환은 5·16장학회에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들을 밀어넣은 것이다. 전두환은 최규하를 끌어내리고 대통령에 오르기 직전인 8월28일 5·16장학회의 이사로 새로 문화·경향 사장이 된 이진희와 경남기업 사장 신기수를 임명했다. 신기수는 한때 박근혜와의 약혼설까지 나돌았던 인물로서 전두환의 지시로 1982년 8월 박근혜에게 성북동 집을 지어준 사람이다. 신기수는 이 무렵 5·16장학회 이사뿐 아니라 영남학원과 육영재단의 이사도 지냈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언론 통폐합 등 언론계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3개의 언론사를 보유했지만 실소유주 박정희가 갑자기 사라진 5·16장학회는 당연히 언론 통폐합의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박정희가 김지태에게서 빼앗아간 장물은 박정희와 김지태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어떻게 관리되어 왔을까?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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