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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YS, 청와대 임기말 만찬서 “외롭다” / 한완상

등록 2012-10-18 19:45수정 2012-10-19 09:53

1998년 1월29일 재경원에서 김용환 비상경제대책위 위원장과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국제 채권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뉴욕 외채협상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즈음 필자는 청와대에서 마지막 만찬에 초청받아 김영삼 대통령의 외로운 말로를 지켜봤다.
1998년 1월29일 재경원에서 김용환 비상경제대책위 위원장과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국제 채권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뉴욕 외채협상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즈음 필자는 청와대에서 마지막 만찬에 초청받아 김영삼 대통령의 외로운 말로를 지켜봤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13
1998년 1월5일 이제 집권 새정치국민회의의 원내총무가 된 박상천 의원과 함께 저녁을 했다. 나는 그에게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의 철학과 비전을 설명해주었다. 아이엠에프(IMF) 위기 해결에 그런 인물의 경륜이 도움이 되고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법무장관으로 발탁된다면 수구검찰들, 냉전 잣대로 인권을 훼손했던 검찰을 과감하게 개혁하라고 주문했다. 그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도 대북문제에는 다소 보수적임을 알고 있기에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마침 그 전날 소로스가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만났다. 나는 두 사람이 깊은 대화를 통해 우리 경제위기의 해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1월10일에는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이자 비핵화론자인 셀리그 해리슨이 <한겨레>에 김대중 새 정부에 조언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대통령직의 성공적 완수 여부는 뉴욕 월가의 금융자본을 어떻게 상대하느냐만이 아니라 북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한국 내부의 남북화해 반대세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정곡을 찌른 조언이다.

그런데 1월12일 김 당선인은 방한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와 만나 남북관계 개선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꼭 이런 말을 그에게 해야 했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차기 대통령으로서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경제난국 극복과 남북관계 개선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리라. 이 둘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기에 조화롭게 동시에 다루어 해결할 뜻을 보여야 한다. 취임하기도 전에 그가 디제이피 연합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냉전수구세력의 비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염려된다. 엄청난 분단냉전체제 유지비용을 경제 활성화, 민주화의 완성, 평화구축 등을 위한 비용으로 창조적 전환을 해낼 과감한 지도력이 지금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전환을 와이에스에게 기대했다가 가슴 아프게 실망한 나로서는 이제 김 당선인이 험난하지만 올곧은 그 길을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가주기를 갈망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1월25일. 설훈 의원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될지 모르니 몇가지 서류를 긴급하게 제출하라고 한다.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을 해준다면 최소한의 정의는 구현되는 것이지만, 17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논의가 시작되는 현실이 왠지 허탈하다. 사실 이런 명예회복은 문민정부 때 이미 이뤄졌어야 했다. 신군부의 쿠데타를 사법적으로 제대로 정리했더라면 우리 공동피고인들의 명예는 그 정리의 부수결과로 이미 회복되었어야 했다.

1월29일. 설 연휴여서 서울 거리는 조용한데 뉴욕에서는 우리 정부와 미국 채권단 간의 협상이 잘돼 일단 단기외채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연간 120억달러의 이자를 지불해야 하니, 최소한 연 2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협상 결과에 대해 언론은 문민정부의 노력이 아니라 김 대통령 당선인의 덕으로 보고 있다.

그날 밤 9시가 지난 시간 김 대통령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뉴욕의 채권단 협상을 직접 지시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먼저 말씀을 꺼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정부의 모습이 협상 과정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는 5년 전에도 모든 언론의 시선은 당선인인 자신에게 쏠리지 않았느냐고 태연히 말씀하셨다. 이어 그때 자신의 당선을 도와주었던 분들과 저녁을 함께 하자고 초대했다.

솔직히 나도 지금은 김 당선인이 어떻게 새 시대, 새 역사를 펼칠 것인지에 자연히 더 신경이 쓰인다. 민주평화세력을 중심으로 튼튼한 진지부터 구축해 합리적 보수세력을 활용해야 하는데, 그는 진지 구축 작업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구축해 놓았다고 판단하는 것 같기도 하다. 권노갑 전 의원을 통해 전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나의 메시지를 정말로 받았는지 궁금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2월2일 청와대 상춘관에서 김 대통령과 그의 당선을 도왔던 분들과 만찬을 함께 했다. 김덕룡·이경재·오인환·이명현 등등이었다. 그날 와이에스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저녁에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떠나버린 청와대의 넓은 관저에 노부부만 덩그렇게 남아 있으면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고 했다. 세속의 힘이 하늘을 찌를 듯 강할 때 오히려 고독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그 힘을 올곧게 하는 힘이리라. 그 힘이 쇠잔하게 될 때 오히려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지도자야말로 행복하리라. 한데 와이에스는 그 반대인 것 같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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