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정치>를 펴낸 강금실 변호사(오른쪽)가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공감과 소통, 배려 등 여성적 가치에 바탕을 둔 생명의 정치 등에 대해 권태선 편집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생명의 정치’ 펴낸 강금실 전 법무장관
‘생명의 정치’ 펴낸 강금실 전 법무장관
법무부 장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최고위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사라졌던 강금실 변호사가 대통령 선거의 열풍이 고조되고 있는 이때 <생명의 정치>를 들고 나타났다. ‘변화의 시대에 여성을 다시 묻는다’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최초의 여성’이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던 강 변호사가 이 시대의 여성들이 직면한 문제를 함께 고민한 결과로 얻어진 나름의 해답을 담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굴절과 왜곡이 ‘권력은 국가로부터 나온다’는 도착적 가치관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강 변호사는 공감과 소통, 그리고 배려라는 여성적 가치에 바탕을 둔 생명의 정치를 시대의 화두로 제시하고 생명의 정치는 여성이 스스로를 생명의 중심에 세울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책 출간에 즈음해 지난 4일 강 변호사와 만나 생명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대담/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근대화 이후 박정희식 억압기제 지속
SNS로 제 목소리 내는 세대와 충돌
‘촛불’과 ‘명박산성’이 적나라한 상징
이번 대선은 미래세대 위한 선택의 장 -공부를 하겠다며 정치를 떠난 지 4년 만이죠. 최근 <생명의 정치>란 책을 출간하셨는데, 이 책을 펴내게 된 까닭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작년 여름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여학생들이 강의가 끝났는데도 남아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여성으로서 어떻게 사회적 삶을 잘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갈급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여성들도 남성과 차별 없이 교육을 받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면 여전히 장벽에 직면해야 합니다. 로펌에 근무하는 여성 변호사들조차 출산, 육아 등의 문제에 부닥쳐서 로펌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니까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욕구가 목까지 차올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침 사회의 중장기적 비전을 준비하고 결정하는 과정인 대선이 치러지는 마당이니 이런 문제의식에 바탕한 여성 의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이 전 국민이 참여해서 우리 정치의 방향에 관한 논의를 벌이는 장이니 저도 제 나름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토론에 부쳐보자는 생각이라고나 할까요.” -생명과 생태를 정치의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셨는데, 이런 가치는 단순히 여성의 어젠다를 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주제이고, 어떻게 보면 정치 또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닿아 있는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법을 공부하신 분으로서 이런 근원적 질문에 눈을 돌린 이유라도 있는지요? “2011년 <오래된 영혼>이라는 기행문 서문에도 썼지만 오랜 사회적 삶 속에서 지속돼온 고민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판사로 임용됐는데, 판사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익적 가치를 최종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위치임에도, 당시는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법원이라고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단독판사들을 중심으로 법관 성명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법부가 과거를 반성하고 정의와 인권 실현이란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는 기관으로서 거듭나야 한다는 근본적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대법원장 퇴진운동이라는 식으로 해석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법무부 갔을 때도 마찬가지 고민에 직면했습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와 실제 권력관계에 있어서의 갈등이 똑같이 반복된 겁니다.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갔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제 개인적인 체험들이 궁극적으로 도대체 권력이 뭐냐는 질문에 이르게 한 것이죠. 정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진보와 보수가 나뉘지만 권력을 행사하는 양 진영의 행위양식에는 굉장히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으면서, 이게 도대체 뭐냐, 인간은 왜 권력 앞에서 이렇게 무력한가 하는 고민을 줄곧 하게 됐고 나름의 답을 추구해온 것이지요.” -권력과 권한을 구분하고, 권력은 국민이란 공동체 전체 구성원에 속할 뿐이고 그 누구도 권력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공동체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권력을 위임한 사람들을 배신하는 역사가 되풀이돼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 도착된 권력관계를 바로잡을 방법을 발견하신 건가요. 생명이란 가치로 돌아가자는 게 그 답인가요? “답을 찾았다기보다는 찾아가는 과정이겠지만, 최근 우리 사회와 세계사적 변화를 보면서, 권력이란 이름으로 국가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힘이 진정한 힘이 아니란 부정의 선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귀천이 없고 모두가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소수가 힘을 장악하면서 폭력이 생겨났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왕의 출현이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봉사하고 베푸는 존재였던 지도자가 억압하는 존재로 바뀐 것은, 원래 인간이 그런 게 아니라 문명적 문제였다는 깨달음이 우리 전체한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런 권력관계가 바뀔 가능성이 보입니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 등 새로운 소통 도구의 출현으로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평적 네트워크 문화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펌 근무하는 여성 변호사들조차
출산·육아 등 문제 부딪혀 그만둬
여성 문제 자각한 정치인이 나와야
성 불평등 문제 등 해결할 수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스스로 소통의 도구를 갖고 소통하는 수평적 네트워크 문화는 분명 새로운 현상입니다. 책에서도 촛불시위에 나왔던 여성들을 의미있게 평가하셨는데요. 그런데 당시 그렇게 강렬하게 집적됐던 힘들이 일상생활의 변화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강 변호사는 먹을거리의 문제에서 촉발된 그 시위를 여성들의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풀이하셨지요. 물론 그런 요소도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사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렇게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쌍용차 문제라든지, 좀 떨어진 이슈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심을 쏟지 않잖아요. “각 개인이 자기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가 바로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돼 있음을 각성하고, 그 각성이 공동체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억압의 기제가 너무 강합니다. 촛불집회에서 젊은 학생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먹을거리 수입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즐거운 축제의 형식으로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 이후 사찰을 하는 등 굉장히 억압적으로 나왔어요. 박정희 정권 이래 지속돼온 군사문화의 반영인 국가권력의 이런 폭압적 행태가 다른 쟁점들에 대한 관심을 억누르게 만든 것이지요.” 박근혜 과거사 사과 수세 몰려 했지만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에 진전
보수가 헌법적 가치 훼손하면
진보는 새로운 가치 말하기 어려워 -우리 사회를 억누르고 있는 억압의 기제가 박정희 시대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시나요? “연원을 따지자면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가겠지만 근대화 이후 박정희 패러다임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지금 당장의 문제입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후배들이 선배 앞에서 맘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도 그런 문화와 관계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아직도 권력 중심, 권위 중심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상당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 한켠에는 박정희 신화가 여전한 위력을 갖고 있고 그 딸인 박근혜씨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근대화 시기를 평가하기에는 역사적으로 시간이 좀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박정희 체제 속에서 근대화를 이뤘으니, 박정희 덕분에 잘살게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박정희 식의 경로로만 근대화가 가능했느냐는 문제제기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근대화가 인권을 억압하는 방식으로만 이뤄져야 하는가, 저는 그런 길밖에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선거 국면에서 인혁당 문제가 논란이 되고 박근혜씨가 그에 대해 사과하면서 잘못된 가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소한 우리가 이만큼 잘살게 됐으니 인권 탄압도 괜찮은 거란 말은 이제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 거네요. “사과가 진심이냐 아니냐를 떠나, 박근혜씨가 사과를 한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진전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에서 헌법 가치를 파괴했고 인권을 억압한 것이 사실임을 인정한 것이니까요. 적어도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따위의 말은 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이 책을 쓰면서 과거사를 성찰하고 반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과거가 정리되어야 현재를 이야기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데, 최소한 이제는 잘못됐다는 것에는 합의가 됐으니 엉뚱한 소리는 안 나오겠죠.” -안철수· 문재인 후보도 박 후보의 사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사과 이전의 발언과 지금의 사과 사이의 간격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이 진정 과거와 달라진 것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수세에 몰렸기 때문에 사과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분명한 진전입니다.” -박 후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새로운 정치에서 여성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과 여성성이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박 후보의 여성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치적 측면에서 박 후보의 경우 여성성이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커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 리더십에는 선진국형과 후진국형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나 스리랑카처럼 족벌을 배경으로 한 여성들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과 자기의 능력과 전문성으로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다르겠지요.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여성들이 정치· 경제·노동 등 분야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정치인이 나와야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도 우리 사회에서 주류의 길을 걸었지만 소수 여성이었기 때문에 소수자나 약자로서의 인식을 갖게 됐다고 했는데, 박 후보의 경우는 어떨까요? “누구도 자신의 성장배경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박 후보에 대해 대화와 소통이 안된다는 보도들이 나오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후보는 독재자였던 아버지의 일방적인 힘의 정치에 익숙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박정희 패러다임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수평적 네트워크에 익숙한 우리 이후 세대들이 주류가 된 이 사회와 전혀 맞지 않는 패러다임이기 때문입니다. 그 폐해를 심각하게 보여준 게 이명박 정부입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해, 새들이 지저귀듯이 즐기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 젊은 세대들에 맞서 이명박 정부가 한 일을 산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명박산성과 촛불집회는 우리 사회의 두 패러다임의 충돌을 상징합니다. 이제는 수평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포용하고 소통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가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의 순간이 됐으면 합니다.” 공동체로부터 권력 위임받은 소수가
억압적 존재로 바뀐 건 문명적 문제
인간 본성의 문제서 비롯된 건 아냐
생명의 정치로 해결할 수 있다 생각 -하지만 사람들은 단기적인 이익에 급급하고 중장기적인 생각은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 사익과 공익을 가능한 한 일치시켜 국민들이 가치의 혼란을 겪지 않게 해주는 것 역시 정치권의 책임이 아닐까요? “사회 공동체가 합의하고 장기적으로 같이 갈 수 있는 공존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은 정치권보다는 대학이나 언론의 책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점에서도 박정희 패러다임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학과 언론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성장제일주의에 더해진 신자유주의 열풍으로 인해 대학은 하루하루의 성과에 급급한 실정입니다. 폭압적 권력은 언론을 시녀로 만들려고 했고요. 박정희 패러다임을 계승한 이명박 정권 아래서 문화방송이 겪고 있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부도덕한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참다못한 700명이 넘는 기자들이 거리로 나가 파업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있는 게 이 정권입니다. 이런 상태에선 대학이나 언론이 본연의 책무를 다하긴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책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을 헌법적 가치에 두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 가치를 수호하려는 세력이 보수이고 그 가치를 좀더 풍성하게 발전시키려는 쪽을 진보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보수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헌법적 가치 따위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5·16 쿠데타와 유신에 관한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그 예라 할 수 있는데요. “바로 그 점이 이번 대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사회나 보수가 건강해야 진보도 그것을 기반으로 비판을 하면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보수가 이처럼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도 마다 않으면 진보는 거기에 저항하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쳐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하기 어렵게 됩니다. 한국 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새누리당이 수구성을 벗고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게 필요합니다.” -책과 관련 없는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안철수 후보 캠프의 배후에 강 변호사가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요. “제 주변의 친구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캠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캠프에 합류함으로써 그렇게 보이는 것 같은데요. 배후는 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리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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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명박산성’이 적나라한 상징
이번 대선은 미래세대 위한 선택의 장 -공부를 하겠다며 정치를 떠난 지 4년 만이죠. 최근 <생명의 정치>란 책을 출간하셨는데, 이 책을 펴내게 된 까닭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작년 여름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여학생들이 강의가 끝났는데도 남아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여성으로서 어떻게 사회적 삶을 잘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갈급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여성들도 남성과 차별 없이 교육을 받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면 여전히 장벽에 직면해야 합니다. 로펌에 근무하는 여성 변호사들조차 출산, 육아 등의 문제에 부닥쳐서 로펌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니까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욕구가 목까지 차올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침 사회의 중장기적 비전을 준비하고 결정하는 과정인 대선이 치러지는 마당이니 이런 문제의식에 바탕한 여성 의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이 전 국민이 참여해서 우리 정치의 방향에 관한 논의를 벌이는 장이니 저도 제 나름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토론에 부쳐보자는 생각이라고나 할까요.” -생명과 생태를 정치의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셨는데, 이런 가치는 단순히 여성의 어젠다를 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주제이고, 어떻게 보면 정치 또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닿아 있는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법을 공부하신 분으로서 이런 근원적 질문에 눈을 돌린 이유라도 있는지요? “2011년 <오래된 영혼>이라는 기행문 서문에도 썼지만 오랜 사회적 삶 속에서 지속돼온 고민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판사로 임용됐는데, 판사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익적 가치를 최종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위치임에도, 당시는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법원이라고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단독판사들을 중심으로 법관 성명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법부가 과거를 반성하고 정의와 인권 실현이란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는 기관으로서 거듭나야 한다는 근본적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대법원장 퇴진운동이라는 식으로 해석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법무부 갔을 때도 마찬가지 고민에 직면했습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와 실제 권력관계에 있어서의 갈등이 똑같이 반복된 겁니다.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갔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제 개인적인 체험들이 궁극적으로 도대체 권력이 뭐냐는 질문에 이르게 한 것이죠. 정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진보와 보수가 나뉘지만 권력을 행사하는 양 진영의 행위양식에는 굉장히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으면서, 이게 도대체 뭐냐, 인간은 왜 권력 앞에서 이렇게 무력한가 하는 고민을 줄곧 하게 됐고 나름의 답을 추구해온 것이지요.” -권력과 권한을 구분하고, 권력은 국민이란 공동체 전체 구성원에 속할 뿐이고 그 누구도 권력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공동체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권력을 위임한 사람들을 배신하는 역사가 되풀이돼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 도착된 권력관계를 바로잡을 방법을 발견하신 건가요. 생명이란 가치로 돌아가자는 게 그 답인가요? “답을 찾았다기보다는 찾아가는 과정이겠지만, 최근 우리 사회와 세계사적 변화를 보면서, 권력이란 이름으로 국가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힘이 진정한 힘이 아니란 부정의 선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귀천이 없고 모두가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소수가 힘을 장악하면서 폭력이 생겨났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왕의 출현이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봉사하고 베푸는 존재였던 지도자가 억압하는 존재로 바뀐 것은, 원래 인간이 그런 게 아니라 문명적 문제였다는 깨달음이 우리 전체한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런 권력관계가 바뀔 가능성이 보입니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 등 새로운 소통 도구의 출현으로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평적 네트워크 문화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펌 근무하는 여성 변호사들조차
출산·육아 등 문제 부딪혀 그만둬
여성 문제 자각한 정치인이 나와야
성 불평등 문제 등 해결할 수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스스로 소통의 도구를 갖고 소통하는 수평적 네트워크 문화는 분명 새로운 현상입니다. 책에서도 촛불시위에 나왔던 여성들을 의미있게 평가하셨는데요. 그런데 당시 그렇게 강렬하게 집적됐던 힘들이 일상생활의 변화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강 변호사는 먹을거리의 문제에서 촉발된 그 시위를 여성들의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풀이하셨지요. 물론 그런 요소도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사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렇게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쌍용차 문제라든지, 좀 떨어진 이슈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심을 쏟지 않잖아요. “각 개인이 자기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가 바로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돼 있음을 각성하고, 그 각성이 공동체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억압의 기제가 너무 강합니다. 촛불집회에서 젊은 학생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먹을거리 수입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즐거운 축제의 형식으로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 이후 사찰을 하는 등 굉장히 억압적으로 나왔어요. 박정희 정권 이래 지속돼온 군사문화의 반영인 국가권력의 이런 폭압적 행태가 다른 쟁점들에 대한 관심을 억누르게 만든 것이지요.” 박근혜 과거사 사과 수세 몰려 했지만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에 진전
보수가 헌법적 가치 훼손하면
진보는 새로운 가치 말하기 어려워 -우리 사회를 억누르고 있는 억압의 기제가 박정희 시대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시나요? “연원을 따지자면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가겠지만 근대화 이후 박정희 패러다임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지금 당장의 문제입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후배들이 선배 앞에서 맘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도 그런 문화와 관계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아직도 권력 중심, 권위 중심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상당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 한켠에는 박정희 신화가 여전한 위력을 갖고 있고 그 딸인 박근혜씨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근대화 시기를 평가하기에는 역사적으로 시간이 좀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박정희 체제 속에서 근대화를 이뤘으니, 박정희 덕분에 잘살게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박정희 식의 경로로만 근대화가 가능했느냐는 문제제기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근대화가 인권을 억압하는 방식으로만 이뤄져야 하는가, 저는 그런 길밖에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선거 국면에서 인혁당 문제가 논란이 되고 박근혜씨가 그에 대해 사과하면서 잘못된 가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소한 우리가 이만큼 잘살게 됐으니 인권 탄압도 괜찮은 거란 말은 이제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 거네요. “사과가 진심이냐 아니냐를 떠나, 박근혜씨가 사과를 한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진전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에서 헌법 가치를 파괴했고 인권을 억압한 것이 사실임을 인정한 것이니까요. 적어도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따위의 말은 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이 책을 쓰면서 과거사를 성찰하고 반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과거가 정리되어야 현재를 이야기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데, 최소한 이제는 잘못됐다는 것에는 합의가 됐으니 엉뚱한 소리는 안 나오겠죠.” -안철수· 문재인 후보도 박 후보의 사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사과 이전의 발언과 지금의 사과 사이의 간격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이 진정 과거와 달라진 것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수세에 몰렸기 때문에 사과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분명한 진전입니다.” -박 후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새로운 정치에서 여성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과 여성성이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박 후보의 여성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치적 측면에서 박 후보의 경우 여성성이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커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 리더십에는 선진국형과 후진국형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나 스리랑카처럼 족벌을 배경으로 한 여성들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과 자기의 능력과 전문성으로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다르겠지요.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여성들이 정치· 경제·노동 등 분야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정치인이 나와야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도 우리 사회에서 주류의 길을 걸었지만 소수 여성이었기 때문에 소수자나 약자로서의 인식을 갖게 됐다고 했는데, 박 후보의 경우는 어떨까요? “누구도 자신의 성장배경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박 후보에 대해 대화와 소통이 안된다는 보도들이 나오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후보는 독재자였던 아버지의 일방적인 힘의 정치에 익숙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박정희 패러다임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수평적 네트워크에 익숙한 우리 이후 세대들이 주류가 된 이 사회와 전혀 맞지 않는 패러다임이기 때문입니다. 그 폐해를 심각하게 보여준 게 이명박 정부입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해, 새들이 지저귀듯이 즐기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 젊은 세대들에 맞서 이명박 정부가 한 일을 산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명박산성과 촛불집회는 우리 사회의 두 패러다임의 충돌을 상징합니다. 이제는 수평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포용하고 소통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가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의 순간이 됐으면 합니다.” 공동체로부터 권력 위임받은 소수가
억압적 존재로 바뀐 건 문명적 문제
인간 본성의 문제서 비롯된 건 아냐
생명의 정치로 해결할 수 있다 생각 -하지만 사람들은 단기적인 이익에 급급하고 중장기적인 생각은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 사익과 공익을 가능한 한 일치시켜 국민들이 가치의 혼란을 겪지 않게 해주는 것 역시 정치권의 책임이 아닐까요? “사회 공동체가 합의하고 장기적으로 같이 갈 수 있는 공존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은 정치권보다는 대학이나 언론의 책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점에서도 박정희 패러다임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학과 언론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성장제일주의에 더해진 신자유주의 열풍으로 인해 대학은 하루하루의 성과에 급급한 실정입니다. 폭압적 권력은 언론을 시녀로 만들려고 했고요. 박정희 패러다임을 계승한 이명박 정권 아래서 문화방송이 겪고 있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부도덕한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참다못한 700명이 넘는 기자들이 거리로 나가 파업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있는 게 이 정권입니다. 이런 상태에선 대학이나 언론이 본연의 책무를 다하긴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책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을 헌법적 가치에 두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 가치를 수호하려는 세력이 보수이고 그 가치를 좀더 풍성하게 발전시키려는 쪽을 진보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보수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헌법적 가치 따위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5·16 쿠데타와 유신에 관한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그 예라 할 수 있는데요. “바로 그 점이 이번 대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사회나 보수가 건강해야 진보도 그것을 기반으로 비판을 하면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보수가 이처럼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도 마다 않으면 진보는 거기에 저항하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쳐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하기 어렵게 됩니다. 한국 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새누리당이 수구성을 벗고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게 필요합니다.” -책과 관련 없는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안철수 후보 캠프의 배후에 강 변호사가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요. “제 주변의 친구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캠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캠프에 합류함으로써 그렇게 보이는 것 같은데요. 배후는 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리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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