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3월29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 특집기사. 문학평론가이자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병익은 청년문화에서 무기력한 선배와 폐쇄적인 현실, 정치적 좌절과 사회적 패배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았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⑮ 새로운 민요-청년문화와 포크송
세시봉에서 일본군가풍 건전가요를 불렀다면…
⑮ 새로운 민요-청년문화와 포크송
세시봉에서 일본군가풍 건전가요를 불렀다면…
70년대 초 독재타도를 외칠 때
통기타의 낭만은 환영받지 못했다
누군가는 “외래문화에 빠져
비판정신을 잃었다”고 비판했고
누군가는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고 반박했다 젊은이들이 못마땅했던 박정희는
금지곡을 만들고 가수를 구속하고
대신 건전가요를 들이밀었다
‘유신찬가’ ‘새마을노래’ ‘나의 조국’
심지어 ‘국민교육헌장’도 있었다 한국 시계와 세계 시계는 늘 어긋났지만, 1968년은 어긋나도 너~무 어긋났다. 한국의 1968년은 청와대 뒷산 세검정의 총소리로 시작되었다. 영화 <실미도>의 첫 장면, 이북 특수부대가 박정희의 목을 따러 내려온 것이다.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을 설치하고, 국민 개개인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주민등록 제도를 강화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도록 했다. 박정희가 전 국민을 단 한명의 열외도 없이 집합시켜 병영국가를 만들 때, 세계 시계는 이른바 68혁명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세계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반대하여 평화를 외칠 때, 한국의 골목에는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러” 월남에 간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찬양하는 노래가 넘쳐흘렀다. ‘뽕짝’과 달랐던 윤복희·한대수·트윈폴리오
흔히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나타난 시점을 1970년대 초반으로 보지만, 문화연구가 이영미는 청년문화 시대의 개막을 1968년으로 잡는다. 미국에서 한대수가 돌아오고 신중현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고 송창식과 윤형주가 트윈폴리오란 이름의 듀엣으로 데뷔한 해이기 때문이다. 68혁명 이전에 4월 혁명과 6·3사태로 미리 기운을 빼버린 탓일까, 전세계적인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응답하라 코리아’에 보인 반응치고는 미미한 것이었다. 1970년대는 해방 이후 태어나 일본의 영향보다 미국의 구호물자를 제대로 먹고 자란 사람들이 20대 초·중반에 들어선 시기였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20대에 접어든 세대는 그 이전 부모나 형들 세대에 비해 조금은 숨 쉴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을 갖고 있었다. 일제 말기에 20대에 접어든 세대는 일제의 징병이 시작되면서 ‘묻지마라 갑자생’(1924년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생했고, 1930년대 초반 출생자들은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었다. 1960년대 후반은 월남 파병과 1968년의 무장공비 대소동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약발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가는 시기였다. 군국 일본의 전쟁가요가 아니라 미국의 팝송을 듣고 자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비로소 젊음이라는 것, 낭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 얘기할 수 있게 된 세대였다. 시대의 변화가 빠른 탓일까, 이들의 감수성은 흔히 4·19세대나 6·3세대라 불리는 형들 세대와도 많이 달랐다. 그러니 구리구리한 부모 세대와는 맞을 턱이 없었다. 윤복희가 미국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고, 한대수도 치렁치렁 머리를 늘어뜨리고 돌아왔다. 청년문화는 특히 음악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영남, 서유석,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은 통기타를 들고 ‘뽕짝’(지금은 트로트라 부르는)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새롭고 세련된 노래를 불렀다. 최근 선풍적인 복고 열기의 중심이었던 세시봉은 바로 이들 세대들이 즐겨 찾던 문화적 해방구였다. 청년문화란 말은 여기저기서 많이 쓰였지만, 사회적인 논쟁으로 번진 것은 문학평론가이자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병익이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란 특집기사를 <동아일보> 1974년 3월29일치에 쓰면서부터였다. 1938년생 4·19세대인 김병익은 청년문화의 상징인 통기타와 블루진과 생맥주를 “확실히 염색한 군복과 두툼한 사상계와 바라크의 막걸리가 상징”하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풍경으로 꼽았다. 김병익은 넉넉한 형으로서 동생들의 청년문화를 여유를 갖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단절되었던 가면의 전통극으로부터 고고춤에 이르기까지, 마르쿠제로부터 안인숙(영화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 역을 맡은 배우)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는 청년문화가 “퇴폐적인 발산이나 이유 없는 반항으로 그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김병익은 청년문화에서 무기력한 선배와 폐쇄적인 현실, 정치적 좌절과 사회적 패배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블루진과 통기타와 생맥주를 “육당과 춘원,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4·19와 6·3데모로 연연이 이어온 청년운동이 70년대에 착용한 새로운 의상”이라고 규정하였다.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임희섭(1937년생)은 김병익과 같은 4·19세대였지만, 청년문화를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다. <조선일보>를 통해 그는 기타와 청바지와 생맥주로 표상되는 청년문화란 “일부 부유층 자제들, 일부 재수생들, 소수의 대학생들, 소수의 ‘공돌이와 공순이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고고족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의미를 한정했다. 그는 이런 고고족 문화 이외에 대학문화와 근로청년의 문화가 있으며 청년문화의 중심은 대학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생으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같은 소설을 써서 당시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히던 최인호는 엘리트와 대중의 이분법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는 ‘청년문화선언’이란 글에서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 대표되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며 “고전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불평”하지 말고 “대중의 감각이 세련되어 가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음악에 몸을 맡기고 종전처럼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격식도 없이 몸을 흔들어 대는 춤추는 젊은이들의 감은 눈을 보라. 노름판에 끼어들려면 최소한도 판돈을 대고 덤벼들어야지!” 청년문화 논쟁에 대해 당시 대표적인 통기타 가수였던 대학생 양희은은 ‘청바지 가수도 할 말 있다’란 글에서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다”며, 자신들을 “우울하고 가난하게 자란 미운 오리 새끼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적어도 교육과 문화적인 면에서는 선택받은 소수였다. 1970년대 초반에 대학생은 동년배 인구의 10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아직도 훨씬 많은 젊은이들은 청년문화로 불리는 ‘포크송’보다는 남진과 나훈아에 열광했다. 민중들의 현실은 청년문화의 작품을 통해 나타난 것보다 더 어려웠다. 호스티스 경아는 현실에서 자살하거나 창녀로 전락했고, ‘난장이’들은 하염없이 굴뚝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버터에 깍두기” vs “청년운동 새로운 의상”
동년배들이 만드는 대학언론 역시 청년문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고대신문>은 “靑바지와 기타”(1974년 4월9일 1면)에서 청년문화는 6·3세대의 계승이 아니라 왜곡이라면서 대학생들이 비판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외래 스타일에만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서울대 <대학신문>은 청년문화 특집에서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기는 하되 실체가 없는 도깨비”라면서 이를 ‘버터에 버무린 깍두기’라고 매도했다. 일부 대학생들이 통기타와 청바지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를 곱게 보지 않은 것은 때가 때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청년문화를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기사를 내보낸 직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대학생이 1000명이 넘게 잡혀가 조사를 받고 200여명이 구속 기소되는 판에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운운하는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예뻐 보일 수는 없었다. 유신헌법을 고치자는 말만 해도 사형에 처하겠다는 저들과 맞서다 보니 저항세력도 경직되어 갔다. 수백명이 감옥에 끌려간 대학가는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대학가에서 초상집다운 경건함과 비장함을 요구하는 것은 청바지 대신 여전히 군복 물들여서 입고 고무신 신고 다니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허황된 생각을 가진 독재자를 만난 탓에 친구였던 젊은이들은 한데 모여 감미로운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위로를 보내는 대신 서로 물어뜯곤 했다.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 청년문화에 대해서 꼭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은 세계 시계와 한국 시계의 불일치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은 여전히 자유나 민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위해 절박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 68혁명은 우리가 갖지 못한 자유니 민주니 풍요니 하는 것들의 바탕이 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한 히피들과 친구가 되기에는 한국의 학생운동 주역들은 너무 근엄하고 진지한 범생이들이었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의 출생의 의미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규정해 버렸다. 이 시기 박정희는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대범한 총사령관으로, ‘대한국민학교’의 너그러운 교장 선생님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쪼잔한 내무사열관으로, 자기 학생 시절만 기억하는 ‘학주’로 군림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박정희는 젊은이들과 매우 불편한 사이였다. 생리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식 사고방식이 꽉 박힌 박정희와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는 맞지 않았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최소한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몸으로는 아니더라도 머리로는 받은 세대였다. 시대착오적인 박정희는 그런 젊은이들을 황국신민과 황군병사를 조련하는 방식으로 키워내려 했다. 박정희는 장발과 미니스커트 같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머릿속과 마음도 못마땅해했다. 중단 없는 전진을 위해 너나없이 나서야 할 때에 젊은것들이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라고 한가히 노닥거리는 꼴도 보기 싫었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한눈팔지 말고 앞으로 달려가야 할 때에 젊은것들이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이나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 따위나 들여다보는 것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금지곡의 시대, 민중을 찾아 광야로
인혁당 사람들을 사형시킨 1975년 박정희 정권은 무려 225곡의 가요를 금지곡으로 묶었고, 대마초 단속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절정의 가수를 포함한 27명을 구속했다. 금지곡의 기준은 특별히 없었다. 김민기나 신중현은 이름이 들어가면 무조건 금지되는 영예를 누렸다. ‘아침이슬’도 금지곡이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은 검열관의 귀에는 태양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고, 묘지는 박정희 치하의 남조선이고, 붉게 타오르고는 적화통일로 들렸던 모양이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월북을 기도하는 노래처럼 들렸고, 가는 데마다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던 시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패배주의의 상징으로 퇴출되었다. 한마디 저항의 말도, 하나의 저항의 몸짓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 동해 바다로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잡으러 가겠다던 젊은이들의 꿈은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국가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것으로 금지되었다. 험한 시대에 벌어졌던 청년문화 논쟁은 1975년 대부분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고 대마초 파동과 여러 가지 이유(김민기의 입대, 월남전을 비판했던 서유석의 방송 출연 금지)로 대표 주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소리 없이 끝이 났다. 젊음은 또다시 젊음을 빼앗겼다. 애창곡을 빼앗긴 젊은이들에게 독재정권은 수백곡의 ‘건전가요’를 들이밀었다. “일하시는 대통령 이 나라의 지도자” 같은 ‘유신찬가’나 ‘대통령찬가’ 같은 노래에 심지어 ‘국민교육헌장’ 노래까지 출현했다. 그분께서 손수 콩나물 대가리를 다듬으셨다는 ‘나의 조국’이나 ‘새마을노래’ 같은 일본 군가풍의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흥얼대질 만큼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서 들려나왔다. 일부에서는 청년문화의 주역들이 박정희에게 저항하지 않은 것을 탓하지만, 나는 자유의 종을 난타하던 4·19세대의 형들이 앞다퉈 박정희의 품에 안길 때 이들이 너절한 노래를 직접 부르지 않은 것이 고맙다. 그랬으면 세시봉 콘서트는 열릴 수 없었다.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포크송이라 하는데, 이는 원래 민요라는 뜻이다. 포크송은 미국 민요이지 우리의 민요는 아니었다. 양희은은 “내 노래는 우리들의 노래 우리 젊은이의 노래이며 우리 모든 사람들과 민중의 노래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민요”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고백했다. 당시의 악동들이 “길이길이 보전해서 내 딸에게 물려주세”라고 가사를 바꿔 불렀던 그분의 ‘나의 조국’은 사라졌지만, 그 시대의 금지곡 ‘아침이슬’은 이제는 가히 ‘새로운 민요’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서양음악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했다고 나무라는 어른들에 대해 양희은은 언제 학교에서 판소리, 가야금 등 우리 음악을 가르쳐준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청년문화의 기수들은 노래를 만들다가 뒤늦게 이런 데 눈을 떠 구전가요를 찾아 나서고 국악의 가락이나 악기를 자신들의 노래와 접목 시켰다. 1968년에 교통사고로 숨진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버드 비숍의 여행기를 영어로 읽다가 득도하듯이 단절된 전통과 만나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는 절창(‘거대한 뿌리’)을 남겼다. 그 후배들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더러워진 전통, 흩어져버린 민중과 다시 만났다. 청년문화 논쟁은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심화시켜 우리가 잃어버린 ‘민중’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도 한층 심화시켜 주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한편에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김지하의 ‘황톳길’이나 ‘서울길’이 있었다. 이제 박정희의 ‘잘 살아 보세’도, 대중가요 ‘흙에 살리라’도 불편해했던 도시적 감성에 맞는 ‘아침이슬’이 나와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김지하가 ‘아침이슬’을 처음 듣고 예견했듯이 젊은이들이 저 거친 광야로 나섰다. 앞으로 무엇이 올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은 광야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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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외래문화에 빠져
비판정신을 잃었다”고 비판했고
누군가는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고 반박했다 젊은이들이 못마땅했던 박정희는
금지곡을 만들고 가수를 구속하고
대신 건전가요를 들이밀었다
‘유신찬가’ ‘새마을노래’ ‘나의 조국’
심지어 ‘국민교육헌장’도 있었다 한국 시계와 세계 시계는 늘 어긋났지만, 1968년은 어긋나도 너~무 어긋났다. 한국의 1968년은 청와대 뒷산 세검정의 총소리로 시작되었다. 영화 <실미도>의 첫 장면, 이북 특수부대가 박정희의 목을 따러 내려온 것이다.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을 설치하고, 국민 개개인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주민등록 제도를 강화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도록 했다. 박정희가 전 국민을 단 한명의 열외도 없이 집합시켜 병영국가를 만들 때, 세계 시계는 이른바 68혁명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세계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반대하여 평화를 외칠 때, 한국의 골목에는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러” 월남에 간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찬양하는 노래가 넘쳐흘렀다. ‘뽕짝’과 달랐던 윤복희·한대수·트윈폴리오
흔히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나타난 시점을 1970년대 초반으로 보지만, 문화연구가 이영미는 청년문화 시대의 개막을 1968년으로 잡는다. 미국에서 한대수가 돌아오고 신중현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고 송창식과 윤형주가 트윈폴리오란 이름의 듀엣으로 데뷔한 해이기 때문이다. 68혁명 이전에 4월 혁명과 6·3사태로 미리 기운을 빼버린 탓일까, 전세계적인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응답하라 코리아’에 보인 반응치고는 미미한 것이었다. 1970년대는 해방 이후 태어나 일본의 영향보다 미국의 구호물자를 제대로 먹고 자란 사람들이 20대 초·중반에 들어선 시기였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20대에 접어든 세대는 그 이전 부모나 형들 세대에 비해 조금은 숨 쉴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을 갖고 있었다. 일제 말기에 20대에 접어든 세대는 일제의 징병이 시작되면서 ‘묻지마라 갑자생’(1924년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생했고, 1930년대 초반 출생자들은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었다. 1960년대 후반은 월남 파병과 1968년의 무장공비 대소동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약발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가는 시기였다. 군국 일본의 전쟁가요가 아니라 미국의 팝송을 듣고 자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비로소 젊음이라는 것, 낭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 얘기할 수 있게 된 세대였다. 시대의 변화가 빠른 탓일까, 이들의 감수성은 흔히 4·19세대나 6·3세대라 불리는 형들 세대와도 많이 달랐다. 그러니 구리구리한 부모 세대와는 맞을 턱이 없었다. 윤복희가 미국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고, 한대수도 치렁치렁 머리를 늘어뜨리고 돌아왔다. 청년문화는 특히 음악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영남, 서유석,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은 통기타를 들고 ‘뽕짝’(지금은 트로트라 부르는)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새롭고 세련된 노래를 불렀다. 최근 선풍적인 복고 열기의 중심이었던 세시봉은 바로 이들 세대들이 즐겨 찾던 문화적 해방구였다. 청년문화란 말은 여기저기서 많이 쓰였지만, 사회적인 논쟁으로 번진 것은 문학평론가이자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병익이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란 특집기사를 <동아일보> 1974년 3월29일치에 쓰면서부터였다. 1938년생 4·19세대인 김병익은 청년문화의 상징인 통기타와 블루진과 생맥주를 “확실히 염색한 군복과 두툼한 사상계와 바라크의 막걸리가 상징”하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풍경으로 꼽았다. 김병익은 넉넉한 형으로서 동생들의 청년문화를 여유를 갖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단절되었던 가면의 전통극으로부터 고고춤에 이르기까지, 마르쿠제로부터 안인숙(영화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 역을 맡은 배우)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는 청년문화가 “퇴폐적인 발산이나 이유 없는 반항으로 그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김병익은 청년문화에서 무기력한 선배와 폐쇄적인 현실, 정치적 좌절과 사회적 패배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블루진과 통기타와 생맥주를 “육당과 춘원,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4·19와 6·3데모로 연연이 이어온 청년운동이 70년대에 착용한 새로운 의상”이라고 규정하였다.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임희섭(1937년생)은 김병익과 같은 4·19세대였지만, 청년문화를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다. <조선일보>를 통해 그는 기타와 청바지와 생맥주로 표상되는 청년문화란 “일부 부유층 자제들, 일부 재수생들, 소수의 대학생들, 소수의 ‘공돌이와 공순이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고고족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의미를 한정했다. 그는 이런 고고족 문화 이외에 대학문화와 근로청년의 문화가 있으며 청년문화의 중심은 대학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생으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같은 소설을 써서 당시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히던 최인호는 엘리트와 대중의 이분법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는 ‘청년문화선언’이란 글에서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 대표되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며 “고전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불평”하지 말고 “대중의 감각이 세련되어 가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음악에 몸을 맡기고 종전처럼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격식도 없이 몸을 흔들어 대는 춤추는 젊은이들의 감은 눈을 보라. 노름판에 끼어들려면 최소한도 판돈을 대고 덤벼들어야지!” 청년문화 논쟁에 대해 당시 대표적인 통기타 가수였던 대학생 양희은은 ‘청바지 가수도 할 말 있다’란 글에서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다”며, 자신들을 “우울하고 가난하게 자란 미운 오리 새끼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적어도 교육과 문화적인 면에서는 선택받은 소수였다. 1970년대 초반에 대학생은 동년배 인구의 10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아직도 훨씬 많은 젊은이들은 청년문화로 불리는 ‘포크송’보다는 남진과 나훈아에 열광했다. 민중들의 현실은 청년문화의 작품을 통해 나타난 것보다 더 어려웠다. 호스티스 경아는 현실에서 자살하거나 창녀로 전락했고, ‘난장이’들은 하염없이 굴뚝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트윈폴리오 멤버였던 윤형주(왼쪽)와 송창식. 이들은 통기타를 들고 새롭고 세련된 노래를 불렀고, 이들이 활약한 음악감상실 ‘세시봉’은 젊은 세대의 문화적 해방구였다.
동년배들이 만드는 대학언론 역시 청년문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고대신문>은 “靑바지와 기타”(1974년 4월9일 1면)에서 청년문화는 6·3세대의 계승이 아니라 왜곡이라면서 대학생들이 비판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외래 스타일에만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서울대 <대학신문>은 청년문화 특집에서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기는 하되 실체가 없는 도깨비”라면서 이를 ‘버터에 버무린 깍두기’라고 매도했다. 일부 대학생들이 통기타와 청바지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를 곱게 보지 않은 것은 때가 때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청년문화를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기사를 내보낸 직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대학생이 1000명이 넘게 잡혀가 조사를 받고 200여명이 구속 기소되는 판에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운운하는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예뻐 보일 수는 없었다. 유신헌법을 고치자는 말만 해도 사형에 처하겠다는 저들과 맞서다 보니 저항세력도 경직되어 갔다. 수백명이 감옥에 끌려간 대학가는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대학가에서 초상집다운 경건함과 비장함을 요구하는 것은 청바지 대신 여전히 군복 물들여서 입고 고무신 신고 다니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허황된 생각을 가진 독재자를 만난 탓에 친구였던 젊은이들은 한데 모여 감미로운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위로를 보내는 대신 서로 물어뜯곤 했다.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 청년문화에 대해서 꼭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은 세계 시계와 한국 시계의 불일치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은 여전히 자유나 민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위해 절박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 68혁명은 우리가 갖지 못한 자유니 민주니 풍요니 하는 것들의 바탕이 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한 히피들과 친구가 되기에는 한국의 학생운동 주역들은 너무 근엄하고 진지한 범생이들이었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의 출생의 의미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규정해 버렸다. 이 시기 박정희는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대범한 총사령관으로, ‘대한국민학교’의 너그러운 교장 선생님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쪼잔한 내무사열관으로, 자기 학생 시절만 기억하는 ‘학주’로 군림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박정희는 젊은이들과 매우 불편한 사이였다. 생리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식 사고방식이 꽉 박힌 박정희와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는 맞지 않았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최소한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몸으로는 아니더라도 머리로는 받은 세대였다. 시대착오적인 박정희는 그런 젊은이들을 황국신민과 황군병사를 조련하는 방식으로 키워내려 했다. 박정희는 장발과 미니스커트 같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머릿속과 마음도 못마땅해했다. 중단 없는 전진을 위해 너나없이 나서야 할 때에 젊은것들이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라고 한가히 노닥거리는 꼴도 보기 싫었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한눈팔지 말고 앞으로 달려가야 할 때에 젊은것들이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이나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 따위나 들여다보는 것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금지곡의 시대, 민중을 찾아 광야로
인혁당 사람들을 사형시킨 1975년 박정희 정권은 무려 225곡의 가요를 금지곡으로 묶었고, 대마초 단속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절정의 가수를 포함한 27명을 구속했다. 금지곡의 기준은 특별히 없었다. 김민기나 신중현은 이름이 들어가면 무조건 금지되는 영예를 누렸다. ‘아침이슬’도 금지곡이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은 검열관의 귀에는 태양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고, 묘지는 박정희 치하의 남조선이고, 붉게 타오르고는 적화통일로 들렸던 모양이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월북을 기도하는 노래처럼 들렸고, 가는 데마다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던 시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패배주의의 상징으로 퇴출되었다. 한마디 저항의 말도, 하나의 저항의 몸짓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 동해 바다로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잡으러 가겠다던 젊은이들의 꿈은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국가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것으로 금지되었다. 험한 시대에 벌어졌던 청년문화 논쟁은 1975년 대부분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고 대마초 파동과 여러 가지 이유(김민기의 입대, 월남전을 비판했던 서유석의 방송 출연 금지)로 대표 주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소리 없이 끝이 났다. 젊음은 또다시 젊음을 빼앗겼다. 애창곡을 빼앗긴 젊은이들에게 독재정권은 수백곡의 ‘건전가요’를 들이밀었다. “일하시는 대통령 이 나라의 지도자” 같은 ‘유신찬가’나 ‘대통령찬가’ 같은 노래에 심지어 ‘국민교육헌장’ 노래까지 출현했다. 그분께서 손수 콩나물 대가리를 다듬으셨다는 ‘나의 조국’이나 ‘새마을노래’ 같은 일본 군가풍의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흥얼대질 만큼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서 들려나왔다. 일부에서는 청년문화의 주역들이 박정희에게 저항하지 않은 것을 탓하지만, 나는 자유의 종을 난타하던 4·19세대의 형들이 앞다퉈 박정희의 품에 안길 때 이들이 너절한 노래를 직접 부르지 않은 것이 고맙다. 그랬으면 세시봉 콘서트는 열릴 수 없었다.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포크송이라 하는데, 이는 원래 민요라는 뜻이다. 포크송은 미국 민요이지 우리의 민요는 아니었다. 양희은은 “내 노래는 우리들의 노래 우리 젊은이의 노래이며 우리 모든 사람들과 민중의 노래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민요”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고백했다. 당시의 악동들이 “길이길이 보전해서 내 딸에게 물려주세”라고 가사를 바꿔 불렀던 그분의 ‘나의 조국’은 사라졌지만, 그 시대의 금지곡 ‘아침이슬’은 이제는 가히 ‘새로운 민요’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서양음악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했다고 나무라는 어른들에 대해 양희은은 언제 학교에서 판소리, 가야금 등 우리 음악을 가르쳐준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청년문화의 기수들은 노래를 만들다가 뒤늦게 이런 데 눈을 떠 구전가요를 찾아 나서고 국악의 가락이나 악기를 자신들의 노래와 접목 시켰다. 1968년에 교통사고로 숨진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버드 비숍의 여행기를 영어로 읽다가 득도하듯이 단절된 전통과 만나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는 절창(‘거대한 뿌리’)을 남겼다. 그 후배들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더러워진 전통, 흩어져버린 민중과 다시 만났다. 청년문화 논쟁은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심화시켜 우리가 잃어버린 ‘민중’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도 한층 심화시켜 주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한편에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김지하의 ‘황톳길’이나 ‘서울길’이 있었다. 이제 박정희의 ‘잘 살아 보세’도, 대중가요 ‘흙에 살리라’도 불편해했던 도시적 감성에 맞는 ‘아침이슬’이 나와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김지하가 ‘아침이슬’을 처음 듣고 예견했듯이 젊은이들이 저 거친 광야로 나섰다. 앞으로 무엇이 올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은 광야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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