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왼쪽)과 북한의 전금철 아태경제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이 ‘남의 쌀 15만톤 북에 제공’에 합의·서명한 뒤 회담장을 나오고 있다. 이듬해 5월 필자를 만난 이 차관은 통일원에서 당시 회담에 비협조적이었다는 비사를 털어놓았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02
1996년 5월1일. 권영해 안기부장과 오찬을 했다. 노태우정권에서 국방차관이었던 그는 문민정부 초대 국방장관으로서 군부 내 최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발탁은 아마도 소산(김현철) 계열의 추천이었던 것 같다. 그는 교회 장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북한의 변화 조짐은 모두 철저하게 전술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언했다. 내가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남북기독학자회의에서 만난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의 솔직한 얘기를 전하자 그는 그 역시 전술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북이 지금 처해 있는 경제적 궁핍, 특히 큰 물난리로 인한 식량난 모두 위장된 것이라고 했다. 북한 군부의 비축미만 4개월을 버틸 수 있는 양이라고 했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술과 여자에 빠져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뿐더러 주변에서 아무도 바른말을 못한다고 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냉전적 불신이 어떻게 입력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대통령과 안기부장 그리고 통일 부총리까지 만나서 북한의 경제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으나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지금 우리 정부는 고장난 비행기 같은 북한 체제가 마침내 경착륙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만일 그와 같은 성급한 기대가 사실로 나타난다면, 경착륙이 가져올 가공할 결과를 과연 우리 정부가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그 결과는 한반도 주변국들에는 물론이고, 우리 남한에 가장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북의 경착륙이 불러일으킬 파편들의 파괴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현실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안일한 흡수통일론이 이토록 깊숙이 정부 핵심까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정말 으스스하다.
이날 오후 4시에는 미국대사관저에서 레이니 대사를 만났다. 이번주 나온 시사주간지 <타임>을 통해 ‘4자회담’의 아이디어가 원래 레이니 대사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만, 클린턴 대통령이 정치적 포용으로 김 대통령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표현했던 것 같다. 클린턴은 정말 놀랄 정도로 유연하게 김 대통령을 기분 좋게 해준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게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배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대통령은 자신이 4자회담 제안의 장본인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일본 정부가 리종혁 부위원장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다. 일본 정부는 북한 당국에서 4자회담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면 리 부위원장의 방문을 거부할 듯하다. 혹시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이런 복잡미묘한 상황에서 만일 중국이 북한에 쌀 100만톤 정도를 유상 또는 무상으로 제공해준다면, 평양은 4자회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올까, 아니면 오히려 문민정부와 대화를 더 기피할까, 차분히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5월6일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과 오찬을 함께 했다. 뱃심 있는 경제관료로 알려진 그는 지난해 5월 재정경제원 차관으로서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쌀회담에 나서 15만톤 지원에 합의했던 대표였다. 그는 북한의 식량난을 걱정하며 이렇게 어려울 때 도와야 앞으로 관계 개선과 평화를 위한 대화와 협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베이징 회담 때 통일원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얘기다. 통일원의 송영대 차관이 마치 안기부 간부처럼 통제를 했다니 나로서는 듣기에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특히 송 차관이 그랬다고 하니, 그를 발탁한 내 책임도 없다 할 수 없으니.
5월21일치 <뉴욕 타임스> 사설을 보니 또 한번 부끄럽다. 지금 북한의 기아상태가 미국과 동맹국들에 정치·도덕적 도전이 되고 있는데, 북한 당국이 4자회담을 수용하기 전까지 미국이 대북 식량지원을 보류하도록 한국 정부가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결국 이 사설은 우리 정부가 비인도적, 비도덕적 정부이며 반민족적인 정권임을 은근히 시사한다.
북한에 쌀을 지원하려는 인도적 움직임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필리핀도 동참했고 국제기구들도 호응해올 듯하다. 그럴수록 냉전적이고 비정한 한국 정부를 보는 국제사회의 눈은 싸늘해지고 있다. 역사가 정말 후퇴하는 것인가!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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