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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리종혁의 쌀 요청’ 전하자 YS는 싸늘 / 한완상

등록 2012-10-02 19:44

1996년 4월말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북기독학자회의에서 필자는 리종혁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세차례 단독 면담을 통해 북의 심각한 식량난 상황을 전해듣고 귀국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지원을 건의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사진은 2002년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청년학생 통일대회에서 조우한 필자(왼쪽)와 리 부위원장의 모습.
1996년 4월말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북기독학자회의에서 필자는 리종혁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세차례 단독 면담을 통해 북의 심각한 식량난 상황을 전해듣고 귀국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지원을 건의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사진은 2002년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청년학생 통일대회에서 조우한 필자(왼쪽)와 리 부위원장의 모습.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01
1996년 4월24~25일 미국 카터센터에서 열린 남북기독학자회의에서 나는 리종혁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이틀간의 대화를 통해 그가 북한의 고위관료란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말이 잘 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클린턴 행정부와 북-미 관계의 전망에 대한 그의 의견이 궁금했다.

“지금 여러 갈래로 진행중인 북-미 대화를 통해서 미사일 문제, 유해송환 문제, 연락사무소 문제가 직간접으로 논의될 것이다. 올여름 휴가 이전에 이 모든 대화들이 성과있게 끝나서 11월 미 대통령 선거 전에 잘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북-미 관계가 어긋나면 한반도의 긴장도 고조될 수밖에 없기에 대화가 잘 진행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평양은 워싱턴을 격앙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그의 얘기에서 흥미로운 일치점을 발견했다. 평양과 워싱턴 간의 외교적 대화 실패로 관계가 악화되면 북한 군부의 강경책이 정당화될지 모른다는 그의 우려 속에서 ‘적대적 공생관계’는 남북만이 아니라 북-미 관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원칙은 모든 적대적 관계의 국가들에서 어김없이 적용될 것이다. 이른바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통설이다.

리 위원장은 94년 10월의 제네바협정을 미국 쪽에서 너무 느리게 이행하고 있다고 불만스러워했다. 그런데 그는 그 이유 역시 남한 당국의 탓으로 보고 있어 나를 난감하게 했다.

나는 귀국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면 반드시 전달해야 할 내용을 세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북한의 식량 사정은 소문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 5·6월의 식량 위기를 해소하는 데 민족적 결단을 내려 지원하는 것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절대로 바람직하다.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우리가 먼저 동족애를 발휘해 북을 도와줌으로써 평화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쌀 지원과 4자회담을 연계시키되 먼저 쌀을 지원해서 4자회담으로 이어가게 해야 한다. 셋째, 남북 정상 사이에 실효성 있는 소통라인을 설치하는 것이 시급하다. 냉전대결 상황에서는 뜻하지 않은 긴장과 마찰이 조그마한 오해로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위기관리를 위해서도 핫라인은 꼭 필요하다.’

리 부위원장과 세 차례 순조로운 만남을 통해 나는 북한 체제 안에서도 이렇게 열린 대화를 할 수 있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상황을 ‘역지사지’ 성찰할 수 있는 인사가 있다는 것이 놀랍고 반가웠다.

4월25일 저녁 카터센터 로비에서 개막한 남북기독학자회의에서 나는 남쪽 대표로, 리 부위원장은 북쪽 대표로 나란히 주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둘이서 나눈 대화 내용과는 사뭇 달랐지만, 으레 그러하리라 예상했기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귀국한 지 사흘 뒤인 4월30일 오후 4시40분에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애틀랜타에서 리 위원장이 내게 들려준 북한의 참상, 특히 지난해 대홍수로 입은 피해상황을 메모해온 수치를 곁들여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최근 참모를 통해 들었던 수치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했다. 이어 나는 문민정부가 대국적·민족적·인도적 관점에서 북한을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그런데 김 대통령의 반응은 너무나 싸늘했다. 그는 북한이 남한을 무시한 채 미국만을 상대하려 한다는 기존 인식에서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통미’만 바라며 ‘봉남’에 열을 올리던 북한이 이제 경제 상황이 아주 어려워지니까 다급하게 ‘통남’에 매달린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북한이 내부에서부터 급격하게 붕괴할 것이라는 ‘흡수통일의 가능성’을 실제로 믿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김 대통령의 냉전적 불신이 더 차갑게 강화되었는가, 도대체 누가 대통령 주변에서 북한의 임박한 경착륙 가능성을 계속 주입하고 있는가, 나는 당혹스러움과 의아함만 가득 안은 채 청와대를 나와야 했다. 자리를 물러나며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사실은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조용히 말씀드렸다. “대통령님의 손안에 한반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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