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새해 초부터 필자는 ‘4·11 총선’을 앞두고 야당인 통합민주당으로부터 ‘전국구 1번’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받았다. 사진은 95년 12월13일 민주당과 개혁신당의 통합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장을병·김원기 공동대표가 강창성 의원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97
1996년 연초부터 한달 내내 본의 아니게 ‘선거 바람’에 휘둘려야 했다. 1월2일 서경석 목사와 이삼열 박사가 찾아왔다. 새해 인사차 온 줄 알았더니 올 4·11 총선 때 나보고 전국구 의원(민주당)으로 출마하란다. 나는 일단 정당정치와는 거리를 두기로 작정했고, 다만 기존 정치세력이 건강한 시민운동권으로부터 새 피를 수혈받고자 할 때는 주저 없이 격려해주겠다고 에둘러 거절했다. 두 사람 모두 보수적인 예수교장로회(통합)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람들인데 과연 과감하고 개혁적인 정치문화를 세울 수 있을까. 다소 불안하다.
1월12일 오전에는 김원기 민주당 대표가 방송대 총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와 동갑이요 오랫동안 서로 친구처럼 지내왔다. 그는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내공을 지닌 정치인이다. “지둘려!”(기다려)는 그의 성품과 정치행태를 잘 요약해주는 그만의 말이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을 설득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전국구 후보로 들어오라고 재차 강권했다. 그러나 명색이 문민정부의 개혁 청사진을 그리는 데 일조했고 통일 부총리를 지낸 내가 어떻게 야당 의원으로 나가겠느냐며, 김 대통령과 인연을 들어 완곡하게 거절했다.
마침 이날 경남대 박재규 총장, 곽태환 박사, 구영록 교수와 함께 오찬을 하면서 내 고민을 얘기했더니, 모두들 ‘전국구 1번’이라면 민주당에 입당해 내 뜻을 펴는 것도 좋겠다고 조언했다. 사실 남북관계의 악화를 가슴 아파해온 나로서는 문민정부보다는 훨씬 평화지향적인 민주당의 대북정책만 놓고 본다면 제법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국무위원 시절 겪어본 정당정치·의회정치의 현실에 절망했던 까닭에 나는 미련을 떨치기로 했다. 더구나 나는 도무지 이런 일로 김 대통령과 만나기가 싫었다. 그의 허락을 받고 야당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그랬다.
1월15일, 아니나 다를까 ‘실세 소산’(김현철)이 만나자고 했다. 신라호텔 1023호실, 안기부 차장이 쓰는 방이다. 민주당에서 내게 전국구 출마를 권유한다는 정보를 들은 모양이다. 그는 내가 민주당으로 나간다면 김 대통령을 배신하는 것이고 절연하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경고했다. 그는 총선 전에 민주당을 ‘집권당의 제2중대’로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배신으로 말하자면 이미 김 대통령 스스로 취임사를 배신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할 일이다. 공인도 아닌 그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1월18일 오전, 감사원에서 내부 비리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추방된 이문옥 전 감사관이 찾아왔다. 민주당 노원을구 후보로 출마하겠단다. 그는 내가 민주당에 들어와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보다 정의감이 투철한 그를 실망시키기가 난처했지만, 점잖게 거절했다.
1월20일, 전남 고흥 출신 국회의원 박상천 의원과 유철상 고흥군수 등과 얼어붙은 레이크사이드에서 모처럼 골프를 쳤다. 박 의원은 내게 지금 민주당에 들어가기보다는 4월 총선 이후 정계가 크게 재편될 때 결단을 내리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충고했다. 일리 있는 조언이다.
그 다음날 저녁에는 홍성우 변호사가 통합민주당 수석 최고위원 자격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정치개혁시민연합에 합류해 개혁신당의 창당 대표를 맡아 지난해 12월21일 기존 민주당 잔류세력과 함께 통합민주당을 창당해냈다. 민주당 대표들은 모두 지역구로 나가기로 해서 ‘전국구 1번 후보’가 전국을 돌며 선거 독려를 해야 한다면서 그 역시 나보고 당에 들어오라고 했다. 사실 홍 변호사와 나는 같은 교회에서 함께 성가대 봉사도 하는 가까운 사이다. 그는 베이스이고 나는 지휘를 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 없어 김 대통령과 협의한 뒤 결정하겠다고 에둘러 거절했다.
그런데 그 무렵 김 대통령은 이회창 감사원장을 집권 민자당으로 영입해서 총선 과반수 확보를 자신하고 있는 듯했다. 이 원장은 세와 명분을 놓고 세를 택할 듯하다. 그렇게 되면 그도 언젠가는 머리칼 잘린 삼손의 신세로 떨어지지 않을까….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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