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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5·6공세력, 5·17 처벌 시도를 좌파음모로 / 한완상

등록 2012-09-20 20:15

1995년 11월28일 필자(왼쪽 넷째)는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부추련) 창립준비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 같은 ‘권력형 비리’ 근절 운동의 취지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다. 부추련은 96년 1월26일 서울 사직동에 사무실을 마련해 현판식을 하고 본격 출범했다.
1995년 11월28일 필자(왼쪽 넷째)는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부추련) 창립준비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 같은 ‘권력형 비리’ 근절 운동의 취지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다. 부추련은 96년 1월26일 서울 사직동에 사무실을 마련해 현판식을 하고 본격 출범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95)
1995년 11월12일, ‘노태우 비자금 4천억원 은닉 사건’으로 연일 국민들의 규탄 여론이 비등했다. 새삼 육사 교육의 효율성 문제를 걱정하게 된다. 육사에서 명예와 국가 위신을 군인의 생명처럼 소중한 가치로 가르쳤다면, 어떻게 전두환·노태우 같은 ‘부패한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가. 그들에게 대통령 재임기간 5년은 비자금만 모으는 데도 짧았을 것 같다. 돈세탁에, 수많은 가·차명 계좌의 이자 챙기기에, 여러 복잡한 중간관리자들 감독까지, 퇴임 뒤에도 부단히 감시의 눈을 번뜩여야 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러다 이현우 경호실장 같은 부하와 불화가 생겨 오늘의 비리가 더 빨리 노출된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80년 5월17일 중앙정보부의 남산 지하실에 갇혔을 때를 떠올렸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하느라 두달 동안 밤낮으로 들볶으며, 신군부 졸개들은 입버릇처럼 우리에게 “국가관이 도무지 없는 인간들”이라고 욕을 해댔다. 민주화와 인권의 가치를 구현하라고 독재정부를 비판했던 우리의 행위를 북한의 위협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 없음의 증거로 확신하면서 그렇게 나무랐다. 국가의 명예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반국가적 행동을 했다고 우리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과연 ‘5·6공’의 신군부 실세들이 대권을 잡은 뒤 열중했던 비자금 모으기가 국가와 군인의 명예를 더 높이는 일이었던가, 나는 새삼 묻고 싶다.

또 한가지가 생각났다. 80년 봄 잠깐 서울대에 복직했을 때 대학본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김상진 열사 추모제’를 열었다. 정부에 민주화를 촉구하는 집회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복직된 해직교수 대표로 그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외쳤다. “지금 군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함정을 파놓고 여러분들이 그곳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함정에 빠지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불행하게도 내 예감은 적중했다. 신군부는 5월17일 24시를 기해 본격 쿠데타 작전에 돌입했다. 나는 17일 밤 10시45분께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정체 모를 체포조에 끌려 남산 지하실에 갇혔다. 알고 보니 그날 우리에 대한 ‘일망타진’을 명령했던 장본인은 바로 육사 출신 장군들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집권당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다. 11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의 당명을 바꾸도록 김윤환 대표에게 지시했다. 야당은 ‘호박에 줄을 그었다고 수박이 되느냐’고 비아냥거렸다. 하기야 눈 가리고 아웅이다. 지난 9월 동교동계를 이끌고 민주당을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 총재는 이번 비자금 비리를 문민정부를 공격하는 데 잘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양김’이 비자금 사건을 서로를 비난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과거 군사문화와 독재권력의 비리를 청산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11월28일 오전 서울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 창립준비위원회 기자회견을 했다. 이세중 변호사와 함께 공동위원장을 맡은 나는 그 자리에서 ‘5·17 쿠데타’와 노태우 비자금 비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악의 꽃이라고 했다. 김승훈 신부, 이문옥 전 감사관, 홍준표 변호사 등 41명이 동참했다. 그런데 언론은 온통 ‘비자금 스캔들’이라는 선정적 사건에만 쏠려 명분 있는 비정부 시민단체(NGO)의 태동에는 무관심했다.

이날 오후에는 마침 <문화방송>에 출연해 80년 신군부의 반동에 얽힌 가슴 아픈 기억들을 풀어놓았다. 그해 봄 신군부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각료들의 안일한 상황인식, 4월26일 당시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과의 만찬, 그리고 5월17일 밤의 체포 등을 회고했다. 그해 7월 중순까지 남산 지하 2층에서 지옥심문을 당할 때 나는 구약성서의 <에스더기>를 온몸으로 읽으며 견뎌냈다. 페르시아 제국의 실세가 유대인을 처형하고자 세웠던 기둥에서 훗날 자신도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이야기에서 사필귀정의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신군부 실세들이 역사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그런데 이틀 뒤 민자당은 ‘5·18 특별법 제정을 위한 개헌’을 해서 5·17 쿠데타 관련자들을 사법처리하겠다고 큰소리쳤다가 야당의 ‘정략적 꼼수’라는 반발에 부닥치자 하루 만에 철회했다. 전두환 등 5·6공 세력들은 이런 움직임을 좌파의 음모로 몰아세웠다. 정말 뻔뻔스러운 가해자들의 공세다.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노력을 좌파의 음모로 몰아갈 때 김 대통령은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물러선 것인가. 나는 불안하게 사태를 주시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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