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7월27일 미국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워싱턴 시내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클린턴 미 대통령과 함께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앞서 6월13일 북-미 합의에서 ‘한국형 경수로’ 표현이 빠져 불만스러워했던 김 대통령은 클린턴의 국빈 대접에 화를 풀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91
1995년 6월13일, 북한과 미국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마침내 제네바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 방식에 합의했다. 북의 김계관 대표와 미의 허버드 대표는 경수로에 특정 국가의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한국 표준형 경수로’라는 명칭 대신 지극히 중립적으로 기술적인 용어를 쓰기로 모두 5개 항의 합의문 가운데 제2항에 넣었다. ‘경수로 프로젝트는 각기 대략 1000㎿(e)의 발전용량을 가진 두 개의 냉각루프를 지닌 고압경수로 2기로 구성된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케도·KEDO)가 선정할 경수로 모델은 현재 생산중인 미국을 원산지로 하는 디자인과 기술 중 신형이 될 것이다.’
이 조항을 놓고 최근 몇달 동안 미국은 한국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미국은 곤혹스럽지만 꼼수처럼 보이는 이중적 합의안을 만들어 북한으로부터는 동의를 얻어냈다. ‘첫째, 케도와 북한은 한국형이라는 표현이 언급되지 않는 경수로를 공급한다. 둘째, 케도는 이와 별도로 한국을 경수로의 제공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한다.’ 이런 ‘꼼수’에 김영삼 대통령은 격노했다. 클린턴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김 대통령을 설득했지만 청와대는 한국의 입장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앞서 지난 2월15일 레이니 주한 미대사의 관저에서 오찬을 함께 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는 경수로의 명칭을 두고 ‘한국형’을 고집하는 완고한 냉전 전사들과 다투느라 지쳐 있었다. 원래 체면을 존중하며 소통하는 문화가 한국 전통 아닌가? 그 며칠 뒤 만났던 황병태 주중 대사 역시 우리 정부가 명칭 문제를 놓고 너무 소아병적으로 대응한다고 걱정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쪽에서 주장하는 ‘한국형 경수로’의 국산화율은 50% 정도에 불과하고 그나마 핵심 부품은 일본산·미국산이었다.
그런데 ‘경수로 합의’에 대한 국내 여론은 청와대의 판단과 달리 우호적이었다. 국민의 62%가 지지한 것으로 나왔다. 이 결과를 보고 김 대통령은 한편 안심하면서도 6월17일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앞으로 한국의 경수로 사업 주도와 미국의 협조를 요청했다. 무엇보다 김 대통령은 7월말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워싱턴 방문 때 국빈방문의 예우를 바랐다. 그다운 자존심이었다. 김 대통령은 7월25일 두번째로 워싱턴을 방문했고, 백악관은 그를 즐겁게 해주기로 한 것 같았다. 클린턴 대통령의 전술적 환대에 그는 크게 만족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이번에도 정상간 대화에서 ‘북한의 임박한 붕괴설’과 같은 성급한 평가를 쏟아냈다.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과 에너지난, 김정일의 취약한 권력 기반, 북한 권력의 무능과 부패, 김정일의 도덕적 약점 등을 거론했다. 마치 북은 운을 다해 최후의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처럼 과장했다.
그러자 노련한 클린턴은 아주 현명한 처방을 내놓았다. 그는 북한의 위기 상황을 한·미가 협력해 잘 관리해야 함을 강조했고 이에 김 대통령도 동의했다. 클린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위기관리는 북한의 변화를 점진적으로 유도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대단히 세련된 대응전략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미국 정부는 북한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면서 한반도 안정과 안보를 동시에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급속한 붕괴를 미국은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중국도, 러시아도, 심지어 일본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미국은 경수로 제공에 따른 비용을 한국에 떠넘기면서도, 한국표준형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합의문에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을 안심시켰다.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클린턴은 노회하고도 지혜로운 지도자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선 북-미 관계와 한-미 관계가 제로섬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도와주는 상보관계가 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나아가 경수로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남북관계까지 개선된다면 한반도 평화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내다보고 있는 것 같다.
현재 문민정부 안에는 총리를 비롯해 비서실장과 안보수석까지, 누구보다 미국을 잘 아는 참모들이 있는데, 왜 우리 대통령의 인식은 50년대에 머물러 있도록 보좌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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