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미국 망명 시절 워싱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펴냈던 김정순 선생이 96년 새해 초 서울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82년 12월 뉴욕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김 선생(오른쪽부터)과 장혜원 박사(장기려 박사의 조카), 김형 전 서울YWCA 회장(필자의 부인), 임순만 목사(장 박사의 남편)가 함께한 모습이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90)
1995년 5월1일 저녁 이철 의원(민주당)의 <길은 사람이 만들고>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혹독한 군사독재시절 그가 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고통과 고뇌를 담아낸 소중한 증언을 펴낸 것이었다. 민주당에서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치열한 때라 신경이 쓰였지만 그는 내 제자 이철군이기도 하기에 스승으로서 마땅히 축하의 덕담을 해주었다.
마침 가정의 달을 맞아, 이군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도피중일 때 여러 번 서울대 연구실로 찾아오셨던 그의 부친을 떠올렸다. 그분은 진실하고 용기있는 아버지였다. 자식의 처지를 걱정하면서도 스승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항상 겸손하게 몸을 낮추곤 하셨다.
이군은 유인태 의원과 함께 유신체제에서 죽음의 위협을 온몸으로 겪었으나, 그들의 기개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용기있으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소탈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다. 그의 책 제목처럼 길은 사람이 만든다. 길을 처음 만드는 사람의 아픔은 크다. 허나 그만큼 값지고 보람있는 일이다. 그가 새로운 정치문화를 여는 새 길을 우리의 삭막한 정치풍토에서 단단하게 닦아주기를 기대했다.
5월3일에는 우리 다섯 형제가 다 함께 아버님(한영직)께서 20대 중반 청년시절 교편을 잡았던 충남 당진의 신평초교를 찾아갔다. 한반도가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고통당하던 34~37년 사이 형과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신평초교의 복도 벽에는 마침 34, 35, 36년도에 찍은 졸업생들의 기념사진도 걸려 있었다. 사진 맨 앞줄 가운데 아버님의 모습이 보였다. 20대 후반의 단정한 미남 청년의 모습이다.
신평초교에는 서울대 농대 학장인 이은웅 교수와 두 분의 어르신도 함께 와 계셨다. 아버님의 제자인 세 분과 함께 점심을 하면서 아버님에 대한 회고담을 들었다. 아버님은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엄하면서도 대단히 자상하고 인간적이었다고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아버님이 60전을 주고 이발기계를 사서는 한 학생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었다. 그런 다음 그 학생에게 방법을 가르쳐줘서 다른 친구의 머리를 깎아주도록 하는 방법으로 서로 돌아가면서 이발을 하게 했단다. 이발 수고를 한 학생에게는 점심을 사주었다. 너무 가난해서 이발소에 갈 수도 없거나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그렇게 베풂과 나눔을 가르친 것이다. 어머님(김석임)도 늘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했다.
아버님은 36년 내가 태어난 뒤 곧 온양초교로 전근을 했다. 아버님이 신평초교를 떠날 때 학생들이 정말 아쉬워했는데, 특히 세 어르신은 자전거를 타고 당진에서 온양까지 아버님을 뵈러 무모한 모험 여행을 나서기도 했단다. 아직 키가 작아 자전거에 올라탈 수 없자 다리를 바퀴 옆으로 넣어 운전했다고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얼마나 스승이 보고 싶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회고담을 들으며 나는 과연 아버님만큼 학생들을 돌보았는가를 자성해 보았다. 하기야 대학교와 초등학교는 다르다. 그러나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사랑과 권위를 동시에 베풀며 진리로 그들을 인도하는 일은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사실 이 학장과 아버님의 인연은 어느날 신문을 보고 우연히 알게됐다. 한 일간지의 ‘잊을 수 없는 스승’ 난에 아버님을 추모하는 글이 실려 놀랐는데 그 필자가 같은 서울대 교수여서 더욱 반가웠다. 그래서 곧장 전화를 걸었고 그로부터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일화를 더 들을 수 있었다.
“한영직 선생님은 방학 전날이면 어김없이 검정 두루마기를 입으셨어요. 방학 동안 열심히 놀고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시면서 두루마기를 입으신 것은 은연중 민족의 얼과 혼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죠. 30년대 중반은 일제가 가장 혹독하게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수탈하던 때여서 우리말도 못 쓰게 하고, 심지어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압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의 검정 조선 두루마기는 일종의 상징적 저항의 몸짓인 셈이었어요.”
우리 형제는 이번 당진 여행을 통해 아버님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함께 느끼고 함께 나눴다. 뿌듯하면서도 살아생전 불효했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새삼 부끄러웠다. 나는 특히 94년 6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뉴욕에서 망명중이었기에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객지에서 보낸 그날 밤,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 생각에 잠을 설쳤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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