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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등돌릴라’ 노심초사하는 청와대에 헛웃음 / 한완상

등록 2012-09-11 20:29수정 2012-09-11 21:32

1995년 6월27일 34년 만의 민선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필자는 시장 출마 여부로 청와대와 야당 모두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나 고사했다. 사진은 9월1일 김대중 총재 추천으로 민주당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조순 시장(오른쪽 세번째)의 취임식 장면으로, 김 총재(맨 오른쪽)는 며칠 뒤 창당할 새정치국민회의의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1995년 6월27일 34년 만의 민선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필자는 시장 출마 여부로 청와대와 야당 모두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나 고사했다. 사진은 9월1일 김대중 총재 추천으로 민주당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조순 시장(오른쪽 세번째)의 취임식 장면으로, 김 총재(맨 오른쪽)는 며칠 뒤 창당할 새정치국민회의의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88
1995년 을해년은 해방 50돌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해방 아닌 분단의 쓰라림을 가슴 깊이 안고 아파해온 지 반세기가 되는 해이다. 진정한 해방이 되려면 먼저 민족 분단의 현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월1일 첫날이 마침 주일이어서 나는 교회에 가서 해방과 희년의 기도를 드렸다.

“샬롬의 주님, 올해는 휴전선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하시며 휴전선이 평화 공원의 울타리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 올해는 주님 샬롬의 도구가 되어 주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셨던 그 희년의 기쁜 소식을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선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분단의 족쇄에서 우리 민족이 벗어나게 하소서.”

1월3일 나는 방송대 시무식에서 세 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린 대학으로, 항상 배울 수 있는 평생대학으로, 밝은 미래를 환하게 열어주는 첨단대학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1월22일 집권 민자당의 대표인 김종필(제이피)씨가 당에서 쫓겨났다. ‘정치 9단’이라는 김 대통령의 솜씨가 퍽 미숙하다. 애초에 그를 원칙 없이 ‘정치 동반자’로 우대한 것이 잘못이다. 앞으로 그가 당 밖에서 냉전·반공·수구세력을 총집결시킨다면 차라리 ‘희망의 징조’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일종의 대안으로 평화·인권·민주세력이 뭉칠 수 있기 때문이다.

1월말께 나는 한국민속씨름협회 총재인 김재기씨의 초청을 받아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새해맞이 장사씨름대회를 보러 갔다. 그즈음 서울시장 출마 후보에 오르내리는 인사들이 여기저기서 보여 내심 당황했다. 그런데 법제처장 자리로 배정된 내 옆자리에 강창성 의원(민주당)이 앉아 있었다. 내게 할 얘기가 있어 일부러 그 자리에 앉은 듯 조만간 나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직감으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설 때문임을 알았다.

그때 김대중 총재는 조순 전 서울대 교수를 후보로 밀고 있었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정치 지도자들이 역사건망증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70년대 후반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의 관심을 받았던 교수들 가운데 하나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유신 말기 실세였던 차 실장은 청와대에서 매일 오후 6시 태극기 하강식을 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교수들을 특별히 초대하곤 했다.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이아무개 교수와 함께 그도 가끔 불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김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도 김 총재는 그를 서울시장 후보로 점찍은 게 아닐까.

약속한 대로 2월2일 오후 강 의원이 방송대 총장실로 찾아왔다. 그와 나는 80년 서대문교도소에서 잠시 옥살이를 함께 한 감방동지이기도 했다. 육사 8기의 장군 출신인 그는 하나회를 적발한 악연으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구속됐었다. 아무튼 그는 김 총재는 조 전 교수를, 이기택씨는 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전하고는 이회창 전 총리를 만나 그의 생각을 확인한 뒤 내게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왜 그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심 헛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 자신 서울시장 자리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김 총재가 결코 나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흘 뒤 2월5일에는 김 대통령의 사돈인 이춘근씨 부부가 찾아왔다. 80년대 초반 미국 망명 시절 인연을 맺은 뉴욕 목요기도회의 동지였다. 86년 3월 그의 셋째 아들과 김 대통령의 막내딸이 결혼을 했다. 결혼식 끝나고 두 사돈 내외와 우리 부부 이렇게 여섯이 오찬을 함께 했던 기억이 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이씨는 유능한 치과의사로, 사돈인 김 대통령이 역사에 자랑스럽게 기록되기를 원했다. 그런 열망이 강한 만큼, 혹시 반대로 실패한 대통령이 될까 노심초사했다. 그는 김 대통령이 조만간 유능한 민주인사들을 다시 기용할 것이라고 운을 떼더니 혹시 내가 민주당에 입당하려는 것이 아닌지 타진했다. 그 순간, 김 대통령 쪽에서 그를 내게 보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인환 공보처 장관도 비슷한 일로 걱정하면서 전화를 했다. 하기야 청와대에서도 걱정은 될 것이다. 87년 대선 때 ‘두 김씨’가 갈라졌을 때 후보단일화를 추진했던 민주화세력의 태반은 고심 끝에 김 대통령을 지지했다. 예춘호·김상현씨마저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이들 대부분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으니 내 거취에 신경이 쓰일밖에. 내 마음을 모르고 불안해하는 청와대의 보수인사들을 생각하니 또다시 헛웃음이 났다.

한반도의 냉전 해체와 평화통일이 가장 절박한 이 시대의 과제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단 말인가.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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