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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즉흥·즉각·즉물성 YS정치’ 개각서 확인 / 한완상

등록 2012-09-10 20:05

1994년 12월23일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1년8개월 사이 세번째로 정부 조직개편에 따른 전면 개각을 단행해 이홍구 총리를 비롯한 18개 부처 장관을 바꿨다. 이날 대통령 비서진 가운데 함께 경질된 박관용 비서실장(왼쪽부터),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김정남 교육문화사회수석도 이임식을 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1994년 12월23일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1년8개월 사이 세번째로 정부 조직개편에 따른 전면 개각을 단행해 이홍구 총리를 비롯한 18개 부처 장관을 바꿨다. 이날 대통령 비서진 가운데 함께 경질된 박관용 비서실장(왼쪽부터),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김정남 교육문화사회수석도 이임식을 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87
1994년 11월의 첫날부터 국회에서는 벌써 썰렁한 겨울바람 같은 발언들이 난무했다. 여당인 민자당 의원인 노재봉 전 총리가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북한의 통미봉남 정책에 이용당할 뿐이라며 남북 정상회담의 환상을 버리라고 김영삼 정부를 대놓고 비판했다. 김종필 대표가 김 대통령에게 사과를 한다는 둥 여권에서도 큰 파문이 일었다.

그의 시각은 비록 냉전수구적이긴 하나, 예리하고 정확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책임을 현 정부에 돌리는 것도 일면 타당한 판단이다. 문제는 북한의 통미봉남 정책을 부추긴 장본인들이 이것을 문민정부만의 잘못으로 탓하니 ‘적반하장’ 아닌가. 김 대통령은 누가 지금 자신을 어렵게 만들고 역사적으로 자신의 미래까지 위태롭게 하는지를 헤아려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 보는 것 같다.

11월15일 저녁 ‘신한국 모임’에서는 박관용 비서실장 중심으로 12월 개각 때 새로 입각할 인물들에 대한 하마평이 화제였다. 대체로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튀는 발언을 하지 않을 사람, 북한에 대해서는 대책 없이 강경한 노선을 선호하거나 선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추천할 모양이었다. 대통령에게 직언할 만한 배짱 있는 사람은 고려 대상이 아닌 듯했다.

지난 10월말부터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음에도 검찰(총장 김도언)은 ‘전두환·노태우의 12·12 반란 사건’에 대해 11월23일 끝내 기소유예 처리를 했다. ‘명백한 국가반란 행위’로 규정하고도, 엄격한 사법처리와 처벌 대신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다. 또 한번 문민정부의 역사는 뒷걸음치는 듯하다.

김 대통령은 12월23일 이영덕 총리를 비롯한 18개 부처 장관을 경질한 대신 이홍구 부총리를 총리로 발탁했다. 나는 이번 개각을 보면서 ‘김영삼식 정치’의 세가지 성격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즉흥성, 둘째로 즉각성, 셋째로 즉물성이다. 즉흥성의 정치이기에 예측하기 쉽지 않다. 정치의 즉각성을 강조하기에 장기적 비전이나 철학적 성찰을 거부하게 된다. 정치의 즉물성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기 힘들다. 그만큼 반대자들과 역지사지의 소통을 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의 주변에서 “대통령 각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강력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요청하는 인사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만큼 그는 복잡하게 돌아가는 국내외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터이다. 자기가 듣고 싶은 정보만 상세하게 제공하는 사람들을 주변에 더 많이 포진시킬 것이다. 그럴수록 실세 아들(김현철)의 권한이 강해지리라는 것을 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즈음 김대중 총재의 행보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만한 정치 경륜을 갖춘 거목 정치인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에 안타까운 노릇이다. 최근 그는 부쩍 티케이(TK·대구경북) 수구세력 쪽에 ‘아첨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나? 물론 그에게는 대구·경북세력의 지지가 필요하다. 허나 어디까지나 명분과 원칙의 바탕 위에서 그들을 당당히 설득해야 한다. 박정희 추모위원을 맡는다거나, 전 정권의 티케이 실세인 박철언 의원을 만나 위로했다든지 하는 행위는 대범한 인도주의적 관용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정치 꼼수’로 여겨질 위험이 더 커보인다, 어쩐지.

김 대통령처럼 김 총재에게도 최대 거침돌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탐욕’ 말이다. 92년 대선 실패에 이어 영국에서 칩거와 자기성찰을 거쳤으니, 이제 더 원숙한 지도자 이미지를 살려내야 한다. 되돌아보니, 82년께 미국에서 함께 외로운 망명생활을 하던 시절, 나는 그에게 간디의 품위를 지닌 민족 지도자가 되기를 여러 번 말씀드리곤 했는데 그는 언짢아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나는 늘 ‘양 김씨’만큼은 정치지도자로 존경받게 되기를 바랐다. 아니 간절히 소망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권력과 기회를 먼저 잡았음에도 수구세력들에게 교묘하게 이용당하며 오히려 그들의 기득권을 강화시켜가고 있다. 거기에 김 총재마저 ‘꼼수와 술수의 대가’로 인식되어 그의 경륜과 비전을 훼손당하고 있으니 서글픈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양 김씨’의 성숙한 협력이야말로 한국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와 한국 사회의 민주적 통합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어줄 터였다. 김 대통령이 먼저 김 총재를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로 예우하면서 무엇보다 그 평화와 통일의 비전을 배운다면 어떨까. 김 총재도 김 대통령이 냉전수구세력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친한 벗처럼 조언을 아끼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나만의 환상일 뿐이라는 엄연한 현실이 나를 더욱 아프게 한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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