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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YS의 대북정책 보수화는 ‘DJ 콤플렉스 / 한완상

등록 2012-09-04 19:48수정 2012-09-05 10:17

1994년 8월25일 남북대화사무국에서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에 참석한 한승주 외무장관과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북핵 특별사찰 여부 등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불협화음을 빚고 있던 한 장관은 이 무렵 필자와 만났을 때 이미 김영삼 정부를 떠날 결심을 내비쳤다.
1994년 8월25일 남북대화사무국에서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에 참석한 한승주 외무장관과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북핵 특별사찰 여부 등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불협화음을 빚고 있던 한 장관은 이 무렵 필자와 만났을 때 이미 김영삼 정부를 떠날 결심을 내비쳤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83)
1994년 8월16일 아침 미국 애틀랜타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북미기독학자회의 참석도 하고 <시엔엔>(CNN) 본사를 방문해 뉴스전문 케이블채널인 <와이티엔>(YTN)의 협력 문제도 타진할 목적이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 나는 퍽 울적했다. 일종의 신공안정국이 스멀스멀 사회 전반에, 특히 대학가에 퍼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이해>란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이 엮어낸 책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도 문민정부 아래서 말이다. 대통령 주변의 세력들이 역사의 시계를 매카시 광풍이 불던 1950년대로 되돌리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정말 우울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화나게 하는 것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반공적 광기다. 그들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반공적 확신을 강화하면서 공안정국을 반기며 부추긴다. 종교 신앙의 열정이 세속적 정치감정에 접목되면 정말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냉전 원리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가 결합되면 그곳에는 죽음을 향한 거친 보복의 악순환이 작동한다. 증오·대결·저주·박살이 난무한다. 한반도에서 이 악순환의 비극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지 않은가.

8월19일 오전 시엔엔 본사를 방문해 톰 존슨 사장과 조던 수석부사장 등과 의견을 나누었다. 전세계를 움직인다고 할 만큼 강력한 뉴스방송사치고는 그 공간 규모가 크지 않았다. 좁은 공간을 정말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건물 꼭대기의 펜트하우스에는 설립자인 테드 터너와 부인 제인 폰다가 살고 있었다.

다음날은 하루 종일 북미기독학자회의에 참석했다. 테네시공대 교수로 있던 1960년대 후반 북미 기독학자 모임이 시작할 즈음 나는 소중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승만·은준관 목사, 김동수·함성국 박사, 서광선 교수 등이다. 우리는 그때 기독자 지식인들은 카뮈가 말하는 ‘반항자의 구실’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기득권에 끊임없이 귀찮게 도전하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나는 이날 저녁 만찬에서 연설을 했다. 지난 5월 아프리카 순방 때 느낀 소감을 증언하며 ‘왜 한반도에는 20세기 냉전 전체주의를 극복해낼 피스메이커들이 없는지,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냉전 용사들은 많은데 왜 평화일꾼은 드문지, 기독자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귀국해 보니 정부의 대북정책은 한층 더 위태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북한에서 전단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며, 마치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조짐으로 속단하며 언론과 정부가 대대적으로 나발을 불고 있었다. 정보와 첩보의 차이를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 공개부터 하는 것은 정말 현명치 못한 짓이다.

남한이 북한보다 월등하게 부강하기에 남북간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하는 문민정부의 자신감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남한은 맏형처럼 북한에 대해 아량과 포용의 힘을 겸손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왜 문민정부는 그런 넓고 깊은 자신감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그 점에서 나는 김대중(디제이) 총재와 김 대통령(와이에스)의 대북관이 퍽 흥미롭게 대조적이라고 생각한다. 김 총재의 접근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평화지향적이다. 그럴수록 김 대통령은 그 반대방향으로 치닫는 것 같다. 그것도 충동적으로 말이다. 김 총재의 대북정책이 뚜렷하게 탈냉전적 지향성을 드러낼 때마다 문민정부는 냉전적 지향성을 강화해가는 식이다. 야당 시절부터 김 대통령에게는 이른바 ‘디제이 콤플렉스’가 조건반사처럼 작동하곤 했다. 물론 김 총재도 김 대통령에게 일정한 콤플렉스를 보이곤 했지만 대북정책은 그런 개인적 감정과는 무관한, 자신의 철학적 성찰과 평화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 같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8월31일 한승주 외무장관과 오찬을 했다. 그는 언제나 딱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세련된 간접화법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지금 퍽 외로워 보였다. 때때로 좌절감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보다는 더 현실주의적인데도, 미국의 대북정책과 청와대의 대북전술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았다. 워싱턴의 정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참모들에게 둘러싸인 대통령을 모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이미 그는 자리를 떠날 결심을 한 듯했다. 결국 그는 94년 말 문민정부에서 벗어나 대학 강단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10월에는 국내 첫 유네스코 석좌교수가 되기도 했다.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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