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8월26일 당시 이홍구 통일부총리가 관훈토론회에서 초청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앞서 8일 통일연수원 특강에서 ‘흡수통일 가능’ 발언으로 북한의 반발 등 파문이 일자 ‘북한의 붕괴 같은 비상사태를 가정한 안’이라고 해명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82
1994년 7월말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49명의 양심수 가운데 고상문(전 수도여고 교사)씨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러자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납북자 조기송환 대책을 강구하고 나섰다. 정말 신속한 대응이다. 물론 잘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는 몇가지 의심쩍은 구석이 보였다.
우선 오늘날 북한의 인권유린을 개탄하고 비난하고 나선 인물이나 집단들이 지난 군부독재 시절 남한의 인권유린 정책과 행동을 지지했거나, 집행했거나, 아니면 짐짓 구경했던 냉전세력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양두구육식 위선 아닌가. 이번 앰네스티의 보고서에는 남쪽 정부의 냉전식 통제로 구금된 사람들의 실태도 균형있게 담고 있었으니 우리 스스로 자기성찰부터 할 일이었다.
최근 미국 정부는 다가오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어떻게든 북핵 문제를 일괄타결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를 빌미로 남북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면서 우방이요 동맹국인 미국과 쓸데없이 삐걱대고 있는 것이다. 문민정부에 포진하고 있는 그 많은 ‘친미 인사’들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당장 이홍구 통일부총리, 한승주 외무장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모두 미국통 박사들 아닌가.
사실 내키지 않는 얘기지만, 그즈음 이홍구 총리의 발언을 보면 그 세련된 이중적 표현에 감탄을 금지 못할 정도였다. 지난 5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무효론’을 슬그머니 끄집어내어 수구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이런 발언으로 진보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면 슬쩍 “오보”라고 해명하곤 했다. 남북관계가 갖는 모순이기도 한 ‘상황의 이중성’을 유달리 강조하면서, 자신의 발언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며 재빨리 합리화한다. 겉으로는 비둘기처럼 행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독수리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야 이 땅의 매카시스트들이 보장해주는 안전망 안에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8월9일에도 국회에서 ‘흡수통일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한 데 이어 교수들과 토론회 자리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조선일보>가 이를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하며 환영했다. 이에 파문이 일자 ‘불가피하게 북이 자멸하게 되면 북을 흡수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북한인권 실태도 국회에서 직접 보고했다. 남북관계 개선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부총리가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것이 뻔한 사안을 앞장서 떠든 셈이다.
언젠가 레이니 대사는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한 박사, 북한은 당신의 동족이 아닌가요?” 북-미 관계가 개선되어 한반도에 평화가 오면 한민족 전체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일인데, 왜 문민정부가 일괄타결을 반대하고 나서는지 따지듯 반문했다. 나는 정말 당황했고 부끄러웠다.
8월15일 김영삼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이른바 ‘신통일방안’으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선언했다. 언뜻 보기에 지난해 2월 새 정부 출범 당시 내가 내세웠던 ‘3단계 3기조’와 유사한 듯하다. 특히 3단계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런데 냉전 지향적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3기조 정신(민족복리·공존공영·국민합의)이 자유민주주의란 표현으로 대체된 것이다. 북한의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정치이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문민정부의 기조로 삼는 것은 남북 대결을 고조시킴은 물론 북한을 흡수통일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오해받기 쉽다. 그런 뜻에서 새로운 통일방안은 대결적이요 반민족적인 발상으로 오히려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어 우려스러웠다.
게다가 민족 복리의 철학은 사라지고 이제 체제경쟁은 끝났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이는 간접적으로나마 남한이 승리했다는 우월감의 공식적 표시로 읽힐 수 있다. 결코 지혜로운 행동이라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이번 ‘8·15 선언’은 한민족공동체를 강조했지만, 그 내용을 찬찬히 천착해보면 냉전대결 의지가 강고함을 확인하게 된다. 김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혔던 탈냉전·평화·민족복리 의지가 불과 1년 반 만에 일교차 심한 가을날 아침의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듯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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