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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YS, 북미합의 막으려 ‘귀순 강명도 회견’ / 한완상

등록 2012-09-02 19:41수정 2012-09-02 21:00

1994년 7월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북한 강성산 총리의 사위라고 밝힌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강사로 알려진 조명철씨가 귀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북한이 이미 핵탄두 5개를 개발했다”는 이날 강씨의 폭로 발언은 제네바에서 진행중인 북-미 3차 회담의 합의를 막으려는 김영삼 정부의 ‘몽니’였다.
1994년 7월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북한 강성산 총리의 사위라고 밝힌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강사로 알려진 조명철씨가 귀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북한이 이미 핵탄두 5개를 개발했다”는 이날 강씨의 폭로 발언은 제네바에서 진행중인 북-미 3차 회담의 합의를 막으려는 김영삼 정부의 ‘몽니’였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81
1994년 7월27일 아침 공보처의 한 과장이 전화를 했다. 북한의 <중앙방송>에서 나를 문익환 목사가 만든 ‘7천만 겨레 통일맞이 운동’의 부이사장으로 소개하는 보도가 나왔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금시초문,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해 2월25일 김영삼 정부 출범 때 대사면 조처에 따라 석방된 문익환 목사는 앞으로 통일운동을 정부와 맞싸우면서 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문 목사만이 아니라 지난날 군사권위주의와 맞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기독교세력은 대체로 문민정부 출범을 환영했고 협력하고자 했다. 문 목사의 그런 ‘친정부 노선’을 두고 통일운동권의 극단적 세력은 오히려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안기부 프락치’라는 매도까지 당한 그는 지난 1월 억울한 화를 가슴에 안은 채 돌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여하튼 느닷없는 전화에 기분이 불쾌해진 나는 통일원의 송영대 차관과 ‘7천만 겨레 통일맞이 운동’의 부이사장인 김상근 목사에게 전화해 나의 불편한 심기를 전달했다. 문 목사가 오늘 살아있다면 문민정부 아래서 펼쳐지고 있는 매카시즘적 광풍에 어떻게 반응할지 눈에 선했다. “이것이 진짜 문민정부인가?”라고 분개할 것이다.

이튿날 미국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클린턴 대통령의 주선으로 뜻깊은 화해의 선언을 했다. 그런데 서울의 조간신문들은 북한 강성산 총리의 사위라는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전임강사로 알려진 조명철씨가 귀순해 전날 연 기자회견 내용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2개월 전에 귀순했다면서 이제야 기자회견을 한 그들은 “북한이 이미 핵탄두 5개를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왜 이 시점에 이런 폭탄선언을 했을까? 김일성 주석 사망 전에 귀순한 이들을 우리 정보당국에서 이제야 공개한 이유로 몇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첫째, 8월 초에 열릴 3차 북-미 회담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냉전세력의 저의가 감지된다. 문민정부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미 일괄타결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한반도 문제에서 종속변수로 밀려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반도 문제는 북-미 관계의 변화가 독립변수이며, 남북관계 변화는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강씨의 기자회견은 결과적으로 북-미 회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미국은 이미 북한과 경수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핵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강씨의 주장이 근거없는 것이라 믿고 있었고 그만큼 김영삼 정부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갈루치 등이 후일 써낸 책 <북핵 위기의 전말>을 보면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이 문제에 대해 판단하고 있다. “그(강명도)의 주장은 근거가 없을뿐더러 북한과의 대화를 훼방하기 위한 의도를 깔고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강명도의 주장은 소문에 의거한 근거없는 말일 뿐이라고 물러섰다.” 당시 청와대의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 백악관의 토니 레이크와 한 시간이나 전화로 강씨의 주장을 해명했던 모양이다. 미국이 얼마나 강력하게 청와대에 항의했기에 이처럼 ‘백기 해명’을 해야 했을까. 김 대통령 주변이 새삼 염려스러웠다.

8월5일 레이니 대사의 초청을 받아 미 대사관저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그는 퍽 외로워 보였다. 미국 정치권이나 행정부의 반북 인사들한테도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거기에 김 대통령 측근들마저 대북 강경론으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민족 자존이나 한반도 평화를 위한 명분에서 주한 미 대사와 대립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기에 나는 오히려 부끄러웠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이날 레이니 대사도 강씨의 강경 발언을 걱정했다. 강씨의 기자회견에 앞서 미국의 대표적 보수 신문인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그의 폭로를 예고하는 듯한 기사가 나왔고, 그 때문에 국무부와 백악관이 아주 불쾌해하고 있었단다.

짐작건대 한국 내 냉전 수구세력이 의도적으로 그 신문에 정보를 흘린 듯했다. 클린턴 행정부로서는 김 대통령의 심술로, 아니면 그 측근들이 그런 간교한 술수를 쓴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다면 한·미 냉전세력이 일종의 내밀한 소통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레이니 대사의 마음이 무거운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 마음도 그 못지않게 무겁고 우울했기 때문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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