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사실이 공식 발표되자 김영삼 대통령은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을 뿐 조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7월25일로 예정됐던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고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은 한층 보수화됐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9)
1994년 6월18일 남북은 해방 이후 첫 정상회담에 전격 합의했다. 평양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통해 전한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을 김일성 주석이 받아들인 것이다. 7월25일로 예정된 역사적인 회담을 앞두고 김 대통령은 신바람난 듯 분주해 보였다.
나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세계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반도가 냉전의 외딴섬으로 남아 있는 한, 세계는 아직도 냉전 상태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번에 남북 정상이 한반도 비핵화와 더불어 냉전체제의 종식을 선언한다면, 그리고 그 선언이 효력을 발한다면 그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평화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할 것이다.
6월30일 마침 한겨레신문사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나와 최장집 교수의 대담을 주선했다. 이 대담에서 나는 ‘코리안 독트린’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남북 정상이 함께 냉전 해체를 선언한다면 세계사에 자랑스럽게 새겨질 일이 아닌가. 그런 세계사적 기념비를 김 대통령이 세울 수 있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했다.
“지난달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는 길에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면서 확실히 냉전적 대결의 시대는 지났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세계는 자국과 민족의 이익을 위해 국제화 시대로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만 거꾸로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20여일 만에 귀국해보니 국내에서는 여전히 북한에 대한 강경제재 목소리가 드세더군요. 그러다 불과 몇주 사이에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국면이 완전히 전환됐습니다.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찾기에 앞서 우선 슬픕니다.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나마 최선은 아니되 차선은 된다고 봅니다. 또 한가지 마지막 냉전의 대립을 이번에 극복하지 못한다면 남북은 모두 20세기의 마지막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부담입니다. 이 역사적 부담을 두 정상이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사실 김 대통령이 이인모 노인 북송 직후 북핵 문제에도 불구하고 ‘남북 화해’라는 취임사의 비전을 착실하게 실천했다면 남북 정상회담은 좀더 일찍 가능했을 터이고, 그래서 북핵 문제를 민족 당사자 원칙 아래 풀어가면서 남북관계 개선뿐만 아니라 북-미 관계 개선에 이바지했다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평화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한반도 탈냉전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아예 부족했다. 게다가 그 주변에는 한반도 냉전 강화로 국내적 정치이익을 도모하려는 냉전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문민정부가 주도적으로 냉전 해체에 적극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만시지탄이 있으나 크게 환영하고 기뻐할 일이다. 최장집 교수도 바로 이런 점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냉전·반공·보수화의 분위기가 전체적인 민주화의 개혁을 가로막는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서 이런 민주화 진전을 막았던 장애를 타개함으로써, 급변하는 바깥세계에 대해, 이제 국내의 민주개혁으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합니다.”
그렇다, 한반도 냉전 해체는 한반도 전역에서 민주개혁을 촉진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선진국으로 나아가면서 평화민족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멋진 꿈인가. 그런데 7월8일 돌연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그 모든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낮 12시30분께 뉴코리아 클럽의 그늘막에서 ‘김 주석 급서’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아찔해짐을 느꼈다. 그때 제네바에서 북-미 3차회담을 진행하고 있던 갈루치를 비롯한 미국 회담 대표 일행은 제네바 북한 공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가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당장 군 경계령부터 내렸다. 그는 정상회담이 무산된 것만을 아쉬워했다. 이영덕 통일부 장관으로 하여금,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역임을 새삼 발표하게 했다. 그러니까 김일성에게 조문을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심심한 애도’ 소식을 듣고, 나는 우리 정부도 훗날의 정상회담을 위해서라도 조문사절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7월12일 국회에서 이부영 의원(민주당)의 ‘조문 촉구 발언’은 수구냉전세력을 격분시켰다. 문민정부답지 않게 극우반공세력의 비난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김 대통령은 또 한번 불규칙하게 우경화했다. 북한 당국은 조문해준 클린턴과 조문을 거부한 김 대통령의 차이를 깊이 유의하는 듯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