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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화해주의자’ 투투 대주교에 농담 같은 질문 / 한완상

등록 2012-08-27 19:49수정 2012-08-28 19:40

1994년 5월11일 필자(오른쪽 둘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웨토에 있는 자택을 찾아가 만델라 대통령의 멘토인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맨 오른쪽) 부부를 예방했다. 사진은 대주교의 부인 레아 노말리조(맨 왼쪽)가 필자 일행이 선물한 한국산 비단 옷감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모습이다.
1994년 5월11일 필자(오른쪽 둘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웨토에 있는 자택을 찾아가 만델라 대통령의 멘토인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맨 오른쪽) 부부를 예방했다. 사진은 대주교의 부인 레아 노말리조(맨 왼쪽)가 필자 일행이 선물한 한국산 비단 옷감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모습이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7
1994년 4월말 나는 대통령 특사로서 서울을 떠나기 전, 한국 성공회의 김성수 주교로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국 성공회는 93년 103년 만에 독립관구로 승격된 기념으로 투투 대주교를 초청하기로 했다.

투투 대주교는 누구인가. 그가 있었기에 오늘 만델라의 영광스러운 대통령 취임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 그는 만델라와 데클레르크보다 먼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그의 헌신적 노력,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그의 희생적 지도력을 노벨평화위원회는 높이 평가했다.

만델라 대통령 취임식 이튿날인 5월11일 나는 소웨토로 향했다. 우리 외교부를 통해 미리 면담을 요청한 투투 대주교에게 가는 길이었다. 대주교는 관저에서 나를 반갑게 맞았다. 하기야 나는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전날 취임식 때 먼발치에서나마 똑똑하게 지켜봤다. 만델라 옆에서 그는 취임식 내내 흥에 겨워 춤추듯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나는 약간 심각한 질문부터 던졌다. 앞으로 흑백의 정치적·법적 동거가 과연 심리적 동거로 나아갈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예상대로 그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당장은 정치적·법적 평등을 이뤘으나, 경제적으로 흑인 대다수가 빈곤상태인데다 문맹률도 높아, 흑백간의 불신과 갈등은 하루아침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앞으로 만델라의 신정부가 ‘살찐 고양이들’, 즉 정치자금을 많이 낸 부자들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쓴다면 자신은 단호하게 친구의 정부를 비판하겠다고 했다. 투투는 영원한 예언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화해주의자다. 평화를 만드는 일꾼이다. 그는 만델라와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탄압받을 때 신랄하게 백인정부를 비판했다. 서로 협력하라고 촉구했다. 만델라 석방을 위해 노심초사했고, 그가 석방된 뒤에는 줄루족과 아프리카민족회의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앞장섰다. 줄루족의 잉카타자유당은 한때 대통령 선거에 불참한다고 선언하고 유혈폭동까지 일으켰다. 이런 흑인들 사이의 마찰이 격화되면 극단적인 백인 분리주의자들도 이를 빌미삼아 폭력으로 선거를 방해할 수 있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투투는 줄루족의 왕을 직접 찾아가 설득했다. 잉카타자유당의 지도자 부텔레지도 만나 화해를 촉구했다. 마침내 이들은 막바지에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후에도 대주교는 집권당 내 신구세대의 갈등을 해소하는 화해자 노릇도 잘 감당했다.

“대주교님께서 화해자로서 하실 일 하나가 더 남아 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과 그의 부인 위니 여사의 화해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도 특별히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담 같은 내 질문에 투투는 진지하게 답했다. “만델라 대통령도 속으로 진심으로 위니를 사랑하는 줄로 압니다. 다만 위니가 해당 행위를 했다는 비판이 아직도 집권당 내에 강하게 남아 있으므로, 당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도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울 수 없겠지요. 당에 대한 그의 충정은 대단합니다. 앞으로 적절한 때에 두 사람은 화해할 것입니다.”

마침 대주교의 책상 위에 미국의 애틀랜타시에 관한 책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애틀랜타에서 시작된 흑인인권운동과 에모리대학, 그리고 그 총장이었던 레이니 주한 미 대사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대주교는 반색을 하며 나를 마치 십년지기를 만난 것처럼 더욱 반가워했다. 자신도 레이니 대사와 절친해서, 그의 초청으로 에모리대학 신학대학에서 강의도 했다고 했다. 자신의 딸이 에모리 의대에 다닌다는 자랑도 했다. 그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더 격의없고 화기애애해졌다. 대주교의 사모도 우리가 선물한 한국 비단을 그 뚱뚱한 몸에 휘감아 보이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비극의 20세기 끝자락에서 가장 감동적인 역사적 희망봉으로 우뚝 선 남아공은 정말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로 보였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3명의 지도자는 하나같이 폭력과 독선을 거부하고 양보·용서·자기비움을 통해 화합의 큰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이 잔치에 내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특사로 참여하게 된 것은 끝없는 영광이요 기쁨이라 하겠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곧장 나이로비로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창문에서 남아공의 땅을 다시 내려다보며 나는 조용히 자신에게 기도하듯 이렇게 물었다.

“왜 우리에게는 투투가 없는가? 왜 우리에게는 만델라가 없는가? 왜 우리에게는 데클레르크가 없는가?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멸종되고 말았던가? 누가 멸종시켰는가? 아니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인물들이 한반도에 나타난다면 제일 먼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틀림없이 이룩할 것이 아니겠는가!”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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