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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만델라 대통령의 ‘자기 비움’에 감탄 / 한완상

등록 2012-08-26 19:46

1994년 5월10일 필자(왼쪽)는 대통령 특사로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오른쪽)의 취임 장면을 지켜봤다. 이날 저녁 대통령 집무실로 초청받은 주요 아시아 나라 특사들과 함께 만델라를 직접 접견한 필자는 진심으로 그의 건강과 정치적 성공을 기원했다.
1994년 5월10일 필자(왼쪽)는 대통령 특사로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오른쪽)의 취임 장면을 지켜봤다. 이날 저녁 대통령 집무실로 초청받은 주요 아시아 나라 특사들과 함께 만델라를 직접 접견한 필자는 진심으로 그의 건강과 정치적 성공을 기원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6
1994년 5월10일 저녁 8시 우리 일행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새 대통령으로 막 취임한 넬슨 만델라를 접견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 온 특사들을 모두 초청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싱가포르, 브루나이, 베트남 그리고 한국 특사를 불렀다. 베트남 말고는 모두 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 있는 나라들이다.

만델라 대통령은 76살 노인답지 않게 활기차 있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안을 전하고 우리 대통령의 방한 초청장 친서를 전달했다. 그는 특사들에게 새 정부에 투자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혹시나 자기가 지난 정권에 의해 억울한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 야당의 줄기찬 민주화 투쟁, 인종차별 체제와의 지루한 싸움 등을 잠시나마 자랑삼아 언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상처받았던 과거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자기 자랑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신남아공의 미래 번영을 말하고 걱정하는 듯했다. 그는 남아공이 비록 아프리카 대륙에 있으나, 교육제도와 은행체제와 통신 분야에서는 유럽 수준이라고 지적하면서, 안심하고 투자해달라고 했다. 투자에서 나오는 이익금은 틀림없이 송금해주겠다고 했다. 장기수 만델라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러자 일본 특사가 만델라 대통령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듯이 조언을 했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면 민간부문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경제적 인센티브가 확실하게 제시되고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너무나 당연한 지적이었다. 만델라는 측근들에게 그가 누군가 묻더니만, 일본 특사라고 하니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싱가포르 특사 역시 한 수 가르쳐주는 식으로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라고 제안했다. 나는 동석한 최 대사의 조언대로 전혀 다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만델라 대통령 각하, 오늘 취임식은 인간 존엄성·정의·평화 같은 높은 이상과 가치의 취임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남아공 국민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희망의 실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통령 각하, 오늘 와서 보니 우리 김영삼 대통령과 각하는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는 두 분께서 평생에 걸쳐 인권, 민주화 그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셨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그 긴 투쟁의 결과 두 분은 모두 적법하고 당당하게 대통령으로 당선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투자를 비롯한 양국의 경제협력 문제는 제 곁에 있는 한국 대사를 부르시어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소상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각하의 역사적 취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만델라는 만족해했다. 헤어질 때 내가 만델라의 손을 잡고 건강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호방하게 웃으며 동쪽에 있는 자연으로 나아가 사냥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계속 건강해서 건강한 남아공과 건강한 세계를 만드는 일에 지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때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만델라의 뛰어난 지도력을 듣고 새삼 감탄했다. 당시 그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데클레르크의 국민당과 줄루족의 잉카타자유당의 지지도를 압도하는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델라는 이런 압승을 원치 않았다. 투표 결과는 그의 소망대로 63%의 지지였다. 왜 그랬을까?

그는 우선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가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게 되면 국민당이 거국연립정부 참여를 두려워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백인들과 화합을 원했고, 데클레르크를 존중하고자 했다. 한풀이나 보복 정치의 싹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보복은 또다른 보복을 낳을 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성숙한 정치의식인가!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또한 만델라는 흑인 집권당일지라도 선거에서 압승해 헌법을 맘대로 개정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국민들은 또다시 객체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폭력화되고, 국민들은 반드시 고통을 받게 될 것임을 역사를 통해 깨달았기에 만델라는 스스로 압승과 압승에 의한 절대권력을 취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놀라운 자제력의 결단이요, 감동적인 권력의 자기 비움이다. 그 덕분에 남아프리카는 하루아침에 정치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되었다. 정말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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