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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YS, 레이니 대사 환영연 참석 세번이나 말려 / 한완상

등록 2012-08-01 19:20

1993년 11월5일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가 취임 환영연에서 축하 건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에모리대 동문들과 함께 환영연을 주최한 필자는 김영삼 대통령의 강한 만류로 참석하지 못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11월5일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가 취임 환영연에서 축하 건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에모리대 동문들과 함께 환영연을 주최한 필자는 김영삼 대통령의 강한 만류로 참석하지 못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58)
1993년 10월 하순 마침내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가 부임했다. 미국 의회 청문회가 질질 끄는 바람에 서울행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나를 포함해 몇몇 지인이 초청인으로 나서 11월5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환영연을 준비했다. 그중에는 이재은 기독교방송 사장과 박봉배 목원대 총장도 있었다. 두 사람은 레이니 박사가 지난 60년 한국에 선교사로 왔을 때부터 교제해온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표용은 감리교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에모리대 출신인 이홍구 평통 수석부의장은 레이니와 예일대 대학원 동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얄궂은 일이 생겼다. 청와대의 주돈식 정치담당 수석이 전화로 레이니 대사 환영연에 가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간다고 대답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친한 동지가 미대사로 부임했는데 환영연에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꽤나 당황스러웠다. 환영연까지 일주일이나 남았으니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 수석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한 나라의 부총리가 차관급인 미 대사의 환영연에 가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얘기했단다.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부총리가 아니라 레이니 대사의 친구로서 초청인을 맡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주 수석도 꽤나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로서는 대통령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외롭게 투쟁할 때 레이니는 에모리대학 총장으로서 그를 미국에 초청해 강연을 맡기기도 했다. 그때도 내가 강연 원고를 작성해주었다. 김 대통령도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미국 정계와 민간에 알릴 수 있게 해준 레이니를 내내 고마워했다. 그럼에도 내가 환영연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한다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반대해도 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환영연 전날 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참으로 불편하고 불쾌했다. 최근 미국의 대북정책에 불만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11월5일 조간신문에 레이니 대사 환영연에 대해 ‘관례 벗어난 레이니 환영연’, ‘서글픈 사대주의 잔영’, ‘레이니 대사 환영 초대형 연회에 사대 시비’ 등등 비난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환영회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 첫번째 비판이었다. 초청 대상자에 총리 이하 장차관들,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회 상임위원장들, 각 정당 간부들, 대법관 이상의 사법부 간부와 대한변협 간부들 등 700명이 들어 있다는 것도 꼬투리를 잡았다.

무언가 냄새가 났다. 신임 미 대사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려고 누군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면, 북한과 일괄타결을 추진하려는 미국의 의지를 꺾을 심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미 대사와 문민정부의 진보적인 자유주의자 사이의 결속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의 마음과도 거리가 먼 행위였다.

나는 초청인들에게 공무로 바빠 환영연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씁쓸히 뉴스로 소식을 전해들었다. 순간 문득 두 가지 일이 머리를 스쳤다.

하나는 레이니 대사 부임 직전 주간지 <뉴스 피플>(10월호)에서 레이니 박사와 한국의 깊은 인연을 소개한 기사였다. ‘한반도 통일 문제에 뚜렷한 입장을 표시하고 있는 김대중 전 총재, 한완상 부총리와 교감을 나눠 두 사람에 대한 통일정책을 뒷받침할 것으로 보인다. 레이니 대사가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와 한 부총리와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두 사람이 추진하고 있는 통일문제에 상당히 진솔한 대화와 의견교환이 오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이 기사의 뜻을 부풀려 대통령에게 전했다면 매우 속이 상했을 것이다. 김 전 총재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그가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불편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또 하나는 레이니 대사가 에모리대학 총장 시절 김 전 총재에게만 명예박사 학위를 주고 김 대통령에게는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혹시 이 일로 김 대통령의 자존심이 상했다면, 레이니 대사 환영연을 성대하게 준비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고 거기에 내가 초청인이 된 것도 불편했을 듯했다. 하여튼 씁쓸한 일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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