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13일 서울에서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남쪽 대변인 이동복 안기부장 특보(왼쪽)가 북쪽 안병수 대변인과 나란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특보는 이듬해 9월 8차 회담 때 ‘훈령 묵살’을 이유로 대변인 보직에서 경질됐으나 뒤늦게 ‘훈령 조작’으로 드러나 93년 11월 전격 해임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57)
1992년 9월28일에 작성된 최영철 당시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의 보고서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청훈 관련 통일부총리의 입장’에도 이동복 당시 남쪽 대표단 대변인의 훈령 조작 사실과 그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서 나는 몇 가지 역사적 교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북 강경정책만 고수하면 이산가족의 아픔을 덜어주는 인도주의 교류사업은 실패하고 만다. 한쪽의 강경책이 상대의 강경책을 자극해 남북의 강경세력은 서로의 입지를 강화시키면서 남북관계를 더 악화시킨다.
둘째, 강경수구세력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법과 편법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어떻게 한낱 대변인이 대통령의 뜻을 마음대로 묵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 체제 안에 깊숙이 뿌리내린 냉전세력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셋째, 수백만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줄 기회를 무산시킨 이 땅의 수구세력은 이산가족들에게 미안해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이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고 안보에 관한 중요한 국가기밀을 유출한 사건으로 몰아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넷째, 시간이 흐를수록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이 강경 방향으로 기울면서 노태우 정부 시절보다 더 남북관계를 후퇴시키고 있다. 어떻게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이 이전 군사정부 때보다 더 냉전적이고 수구적일 수 있는가. 남북관계 악화는 안으로 자유와 인권을 훼손하는 반민주적 정치행태로 쉽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점검해야 한다. 평화의 가치와 인권의 가치는 항상 서로 도우면서 실현된다는 진리를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소중히 체화해야 한다.
다섯째, 노태우 정부 당시 외교안보수석이 적절히 지적하고 정리한 대로, 훈령 조작으로 대통령의 지시도 무시되고 남북관계도 악화되었음이 명백한데도 이런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에게 그동안 청와대나 안기부에서 적절한 조처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회담 대표였던 총리가 사건을 은폐하기 급급하고 문제가 불거질까봐 전전긍긍했던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괴이한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개혁을 통한 역사 진전이 이뤄질 수 있겠는가.
사건을 폭로한 이부영 의원(민주당)의 요청에 따라 감사원은 93년 11월23일부터 12월11일까지 통일원과 안기부에 대한 감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훈령 조작 과정, 청훈과 훈령 지연 보고, 훈령 조작 사실 은폐, 지휘보고체계 미확립, 국가기밀 유출 경위, 조치사항 등에 대한 감사 결과를 12월21일 당시 이회창 감사원장이 직접 발표했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훈령 조작이 확실하다고 입증해냈다. 평양의 상황실장이 조작 사실을 감추기 위해 “원본은 파기하여 없는 상태에서 당시 보관중인 사본을 근거로 평양에서 사용한 예비전문을 서울에서 온 것처럼 서울 발신용 전문으로 새로 만들고 나머지 발·수신 번호 내용을 일부 수정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감사에서는 국가기밀의 취급 소홀 등 보안의식의 결여를 지적하면서 임동원 당시 차관과 이동복 대변인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히 이 대변인의 보안의식 결여를 부각시켰다. ‘이동복 특보는 Ⅲ급 비밀의 내용이 그대로 인용된 보고서를 국회의원 등에게 해명자료로 제공함으로써, 국가기밀이 제3자에게 불법 유출되어 공개되는 등 사회 물의를 야기했다’고 적시했다.
한편 내가 11월13일 오후 김덕 안기부장에게 요청했던 안기부 자체감사 결과도 11월21일 나왔다. 김 부장은 훈령 조작이 사실로 드러났다며 안기부에서 이동복 특보를 해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나는 이 사실을 직접 통보받고 이것이 정치적 쟁점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기부가 신속히 자체감사를 통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힌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김덕 부장의 결단이 주효했다. 안기부는 조용히 이씨 문제를 정리했다. 나도 통보받은 내용을 가슴에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그 며칠 뒤 놀랍게도 이 특보가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해임 사실을 알려왔다. 그의 해임은 11월26일 김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단행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냉전 전사들이 통일 부서 안에 건재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 근심이 깊어졌다. 강경한 대북정책이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이라는 이름 아래 더 이어질 듯했다. 크리스마스는 다가오는데, 평화의 주님은 왜 이리 멀리 계시는가 싶어 안타까웠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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