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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이동복 대변인이 멋대로 훈령 바꿔치기 / 한완상

등록 2012-07-30 19:44

1992년 9월17일 오전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표 정원식 총리 일행이 북한 연형묵 총리의 안내로 대동강 하구의 서해갑문을 둘러보고 있다. 이동복 대변인은 이날 아침 일찍 서울에서 보낸 ‘괴전문’도, 오후에 보낸 ‘진짜 전문’도 대표단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결국 이산가족 상봉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2년 9월17일 오전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표 정원식 총리 일행이 북한 연형묵 총리의 안내로 대동강 하구의 서해갑문을 둘러보고 있다. 이동복 대변인은 이날 아침 일찍 서울에서 보낸 ‘괴전문’도, 오후에 보낸 ‘진짜 전문’도 대표단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결국 이산가족 상봉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56
이쯤에서 훈령 조작 사건의 개요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992년 9월25일 당시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기초로 했다.

그해 9월15일에서 9월18일까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릴 예정이었다. 회담 준비 기간에 고위급회담 우리쪽 대표인 정원식 국무총리가 휴대하고 간 훈령에는 당시 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시했던 이산가족 재회 문제가 있었다. 연말연시에 맞춰서 이산가족 상봉이 꼭 이뤄질 수 있게 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이번 8차 회담에서는 각 분과위원회의 부속합의서를 채택하고 발효시키는 것이 주임무였다. 평양으로 떠나기 하루 전인 9월14일에는 총리 주재로 고위 전략회의가 열렸고, 북쪽에서 이인모씨 송환을 요구하면 3가지 조건을 제시하기로 했다.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의 정례화, 판문점에 이산가족면회소와 우편물교환소 설치 및 상설 운영, 동진호 선원의 송환’을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이 조건을 관철시키되 협상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도록 했다.

9월15일 평양에서 열린 본회담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면서 북쪽은 남쪽이 제시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 철회와 이씨 북송을 공식으로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이면에서는 이씨 송환만 보장되면 올해 안에 이산가족면회소를 판문점에 설치할 수도 있다고 시사했다. 북쪽이 이렇게 융통성을 보이자 우리쪽 대표단은 서울에 새로운 훈령을 요청하기로 했다. 청와대와 통일원, 안기부가 협의하여 새로운 지침을 내려달라고 청훈하기로 한 것이다. 청훈 결정은 9월17일 0시30분께 내려졌다.

이어 그날 아침 7시15분께 서울로부터 답신이 왔다. “이인모씨 건에 관하여 3개 조항이 동시에 충족되지 않을 경우 협의하지 말 것. 즉 기존 지침대로 행동할 것”이라는 융통성 없는 내용이었다. 전문이 조작된 것을 모른 채 우리 대표단은 그날 다시 북쪽과 교섭을 시작했다. 북쪽의 태도는 분명했다. 동진호 선원들은 모두 자진하여 월북한 자들이니 노부모 방문단과 연계하지 말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다음날 북쪽은 우리쪽에서 제시한 3가지 전제조건을 순차적으로 해결하자고 조금 누그러진 제의를 했다. 즉 남북면회소 설치 및 운영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이씨 귀환 문제를 다루고, 그다음에 노부모 방문단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쪽은 동진호 귀환 때만 이씨 북송이 가능하다는 기존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회담은 결렬됐고 그렇게 이산가족 상봉의 기대는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외교안보수석의 보고서를 보면, 9월17일 0시30분 이동복 남쪽 대표단 대변인이 독단으로 안기부 통신망을 이용해 또다른 ‘훈령 지시 건의’ 전문을 서울로 타전했다. “이인모 건에 관하여 면회소 설치, 이산가족 방문 정례화, 동진호 사건 해결 등 3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협의할 수 있다는 지침을 재확인하여 주시기를 건의합니다.” 이 전문에 대한 긍정적 회신 역시 발신자 불명으로 같은 날 아침 7시15분에 평양의 우리쪽 대표단에게 도착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서울의 이상연 안기부장, 최영철 통일부총리, 김종휘 외교안보수석 중 누구도 평양에서 청훈이 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안기부장이 청훈 내용을 처음 보고받은 시각은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였다. 이어 통일부총리·외교안보수석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협의한 시간은 오후 2시께였다. 그러니까 이날 아침 7시15분께 평양으로 ‘원칙 고수’ 회신을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진상은 이랬다. 9월17일 오후 2시께 외교안보수석은 안기부장으로부터 평양의 청훈 내용을 전화로 처음 통보받았다. 이어 안기부장은 통일부총리, 김 수석과 협의해 오후 3시께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평양에 새 훈령을 타전했다. ‘첫째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 정례화, 둘째 판문점 이산가족면회소 및 우편물교환소 설치와 상설 운영, 셋째 동진호 선원 12명 귀환. 3개 조건의 동시관철이 바람직하나 불가할 때는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 또는 첫째와 셋째만 관철돼도 이씨 북송을 허용할 수 있음.’ 북쪽과 협의가능한 융통성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 통일부총리·안기부장·외교안보수석이 작성해서 보낸 이 새 훈령을 이 대변인이 전달받고도 회담 대표인 총리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끝까지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경악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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