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17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기택 대표와 이부영 의원(오른쪽 세번째)을 비롯한 최고위원들이 이동복 안기부장 특보의 해임을 촉구하고 있다. 이 의원은 전날 국회 예결위에서 ‘92년 9월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이동복 남쪽 대표단 대변인이 노태우 대통령의 훈령을 조작하고 은폐함으로써 이산가족 상봉을 무산시켰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55
1993년 11월12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부영 의원(민주당)이 노태우 정권 말기인 92년 9월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이동복 남쪽 대표단 대변인의 대통령 훈령 조작 사건’을 다시 거론하며 통일부를 압박해왔다.
그는 나를 지목해 당시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국회의원의 거듭된 요구를 국무위원으로서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무실에 돌아와 차관에게 자료를 찾아보라고 했다. 통일원에 없으면 안기부에서 자료를 구해보라고 했다. 처음에 직원들은 그런 자료는 없으며 구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지난해 회담 대표로 현장에 있었던 임동원 당시 통일원 차관이 누구보다 실상을 잘 알 것이라 생각되어 집무실로 불렀다. 그는 질린 표정이었다.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이동복 대변인(안기부장 특보)이 훈령을 조작했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마도 정부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냉전수구세력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통일원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그가 계속 차관으로 일해주길 바랐으나 수구세력의 반대로 포기했다. 그래서 그가 두려워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하는 이 의원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느꼈기에 이번에는 훈령 조작에 관한 자료를 꼭 찾고 싶었다. 나 역시 진실을 알고 싶었다. 혹여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지 않는 세력에 의해 진실이 은폐된 것이라면, 이는 새 정부의 민주개혁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 차관을 설득했다. 그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결국 자료를 건네주었다.
나는 자료를 찬찬히 읽어보다가 경악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어떻게 이런 조작이 가능했는지, 왜 당시 노태우 정권에서 문제를 삼지 않았는지, 어떻게 지금까지 은폐해왔는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문민정부 안에도 이데올로기적 편향으로 얼마든지 진실을 왜곡하고 끝까지 은폐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탓이리라. 그 순간 나 역시 지금 이들 세력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왜 임 차관이 그렇게 주저하고 두려워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에 의한 진실 은폐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 우리는 미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비극에서 확인했다. 그가 탄핵 대상이 되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당한 것은 미국 민주당 사무실에 불법으로 들어가 문서를 훔친 행위 자체보다 그 사실을 끝까지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만일 닉슨이 처음부터 자신의 지시였다고 깨끗하게 시인했더라면 탄핵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훈령 조작 사건의 문제점을 짚어보았다. 우선 국가안보를 볼모로 진실 은폐를 정당화하는 일이 문민정부에서도 계속된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더이상 안가나 밀실 같은 곳에서 정치공작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하고 정치개혁을 추진해온 민주정부에서는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또 지난 정부 최고위층이 이런 조작 사실을 알고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니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였던 국무총리가 당사자를 불러 정식으로 문책을 했어야 마땅했다. ‘훈령 조작’은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무산시키고 긴장관계를 조성함으로써 다음 대선에서 집권 연장을 하려는 의도로 빚어진 일로 짐작했다. 그런 기막힌 사실을 이산가족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 것인가. 인도적 교류를 정치적 목적으로 희생시키거나 악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입증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투명한 국정운영의 본보기를 위해서, 진정한 민주개혁을 위해서, 분단으로 말미암은 민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이 사건은 반드시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료를 국회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외로운 결정이었지만, 뜻깊고 의미있는 결단이라고 판단했다. 이날 오후 2시 무렵 이 의원을 만나 요청했던 자료를 제출했다. 그리고 4시께 김덕 안기부장에게 사건의 심각성을 알리면서 안기부 자체 감사를 통해 진상을 조사하고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국회는 감사원에 이 사건에 대한 정식 감사를 요청한 상태였다. 더불어 나는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 여러 곳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조작되었고, 언론에 유출되었다면 어떤 경로로 유출되었는지 소상히 밝혀주길 바랐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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