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22일 첫 북-미 고위급회담의 북쪽 대표인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 국제부장(뒤쪽 가운데)이 미국 대표인 아널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과 만나기 위해 뉴욕의 주유엔 미국대표부에 도착하고 있다. 이후 집권한 클린턴 행정부가 차관보 격으로 대표를 낮추는 바람에 김 부장도 교체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49
1993년 10월 미국의 사설 연구기관인 노틸러스 퍼시픽연구소의 피터 헤이스 소장이 5~19일 세계은행팀을 인솔해 북한을 방문한 뒤 서울에 왔다.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북핵 문제 전문가인 그는 지난 5월초에도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인 김용순의 초청으로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는 16일 김 비서를 만나 오후 5시부터 밤 11시30분까지 자유롭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고 했다.
헤이스는 내 자문관인 길정우 박사를 통해 김 비서와의 면담 내용을 자세히 전해왔는데, 크게 간추려도 무려 10가지에 이르렀다.
“첫째, 한반도의 핵문제가 지연되면 일본은 재무장을 위해 위험한 짓을 할 것이고 아시아 전역에서 군비경쟁이 야기될 것이다. 나아가 95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연장을 논의하는 데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만큼 미국의 국익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둘째, 경수로 건설 문제는 3차 북-미 회담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경수로가 성공적으로 해결되면 북한은 핵조약 체제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대안이 없으니 자체 핵기술을 활용해 에너지원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경수로가 건설되면 북-미 국교 수립에도 기여할 것이다.
셋째, 북한은 경수로의 기술이 미국이든 러시아든 남한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미-북 직접 협의에 의한 것이면 좋겠다.
넷째, 북한은 미국이 경수로 건설을 위해 남한 회사에 기술 이전의 라이선스를 부여해도 좋다. 또 북한에 수출하려면 한-미 간에 원조, 투자 및 교역 등에 적용되는 갖가지 법적 정치적 제약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북-미 고위급회담이 조속한 시일 안에 필요하다.
다섯째, 올해 북한의 곡물 수확은 괜찮은 편이다. 북한은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1년 이상은 버틸 힘이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대북 군사제재를 한다면 미국·남한·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을 것이다.
여섯째, 북한의 ‘노동 1호’ 발사가 일본 보수강경세력에게 재무장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염려를 잘 알고 있다. 북한은 한국·일본·러시아 3자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을 염려한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북한으로서는 3자 관계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곱째, 이를 고려할 때 북한과 미국은 경수로 기술 이전 합의를 통해 포괄적인 양자협력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여덟째, 북한과 미국이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을 고려할 때 미국은 이 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상호이익을 확보하고 지역내 특정 강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특정 강국이 중국을 뜻한다면 아주 대담한 발언이라 하겠다. 이 역시 ‘통미’의 소망이자 김 주석의 뜻이기도 하다.)
아홉째, 북한은 제네바에서 미국과 약속한 것을 이행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및 남한과 대화를 시작했다. 오히려 원자력기구가 북한과 불공정성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이중 척도가 북한에 진정한 우려를 안겨준다. 남북대화는 계속할 테지만, 북-미 고위급회담이 성사된 뒤에야 진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열째, 북한은 핵문제를 정치적 카드로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 일국이 다른 국가의 정치체제나 생활양식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각기 국가 이익만을 기준으로 상대해야 한다.”
김용순은 마지막에 미국 쪽 수석대표인 갈루치 차관보가 협상을 아주 잘하고 있다며 92년 1월22일 뉴욕에서 열린 첫 북-미 회담 때 자신과 상대했던 아널드 캔터 차관보다 낫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헤이스 소장이 내게 남긴 ‘관찰적 분석’도 흥미롭다. 그는 92년 1월 이후 미국이 대북한 접촉창구를 차관보로 격하한 것은 전략적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김정일 주변의 강경세력이 핵문제를 장악하게 되었고, 김일성 주석에게 더 가까운 김용순 같은 인물들이 주도권 다툼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것 같다고 했다. 또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강경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확보하고자 핵문제를 막다른 상황까지 몰고 갈 것으로 예측한 그는 그 때문에 북한이 합리적인 정책을 채택할 기회를 놓칠까봐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