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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김 주석, 방북 애커먼에게 YS 꼬집는 농담 / 한완상

등록 2012-07-18 19:46수정 2012-07-18 21:03

1993년 10월12일 평양을 방문했던 게리 애커먼 미 하원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 일행이 한국전쟁 이후 미국인으로는 처음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그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대화록에는 흥미로운 정보가 많았다.
1993년 10월12일 평양을 방문했던 게리 애커먼 미 하원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 일행이 한국전쟁 이후 미국인으로는 처음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그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대화록에는 흥미로운 정보가 많았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48
1993년 10월 웃지 못할 소동이 한가지 있었다. 당시 미국 하원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은 민주당 하원의원인 게리 애커먼이었다. 그는 10월9일부터 12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면담했다. 미국 소식통들은, 김 주석이 애커먼 의원에게 흥미롭고 솔직한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김 주석은 ‘미국인 중에는 북한 사람이 머리에 뿔 달린 귀신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더라’고 농담을 하면서도, ‘북한은 핵무기를 제조할 능력도 살 돈도 없으며, 핵무기를 가질 필요도 그럴 의지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 주석은 또 앞서 4월에 발표한 ‘10대 강령’에 친필 서명을 한 뒤 애커먼에게 주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이 강령을 읽지 않은 유일한 사람 같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한 부를 남쪽 당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사실 ‘10대 강령’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김 주석이 그 사본을 선물로 주면서 김 대통령을 비꼰 것은 지난봄 조동진 목사와 만났을 때 ‘김 대통령 각하’로 부르며 깍듯이 예우했던 것과는 다른 태도였다.

12일 평양에서 판문점을 넘어 곧바로 서울로 온 애커먼 의원은 13일에 나와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오전 10시 약속 시간이 되도록 그는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찰스 카트먼 주한 미 부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최대한 점잖게 불쾌감을 표했다. 카트먼은 지난 7월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레이니 주한 대사 지명자와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오전 11시20분에야 애커먼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했다. 그 뒤 한달쯤 지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국 민주당의 한 행사에서 애커먼 의원은 <한국일보> 기자에게 “당시 한완상 부총리와 약속을 취소하는 등 한국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절대로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지역구인 뉴욕에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북 때 애커먼을 수행했던 케네스 퀴노네스 국무부 북한담당관이 나중에 전해준 김 주석과의 영문대화록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여럿 나왔다. 김 주석은 자신의 10대 강령이 김 대통령의 취임사보다 먼저 작성되었다며, 아마도 자신의 이 통일 관련 제안을 참고해 취임사를 작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전해들은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다. 또 취임사 가운데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부분에서 동맹국이 어느 나라를 지칭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취임사를 작성할 때는 ‘동맹국은 변수이나 민족은 상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북한의 동맹국인 소련과 중국을 지칭한 표현이었다.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그 동맹국을 미국과 일본으로 ‘오독’하고 내게 맹공을 퍼부었는데, 정작 김 주석은 ‘동맹국이 어느 나라를 지칭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다니 또한 의아한 노릇이었다.

김 주석은 애커먼에게 다른 농담도 했다. 애커먼이 비무장지대를 넘어 서울로 갈 텐데 이 행위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임수경을 예로 들었다. 임수경은 남한 당국에 체포되어 감옥에 갔는데, 애커먼이 국경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만일 당신이 감옥에 안 간다면 남한 당국이 미국인을 보통사람보다 더 높은 존재로 대접하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이라며 웃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그리고 곧바로 심각하게 통일 문제를 언급했다. 미국에 도움을 청하며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할 의지가 없고 남한 체제를 훼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북한도 남한으로부터 동일한 존중을 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뜻을 남쪽에 전해달라고 호소하듯 부탁했다.

한국어에도 능숙한 퀴노네스가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이 대화록을 보면서, 애커먼의 경솔한 약속 위반으로 소통의 기회를 놓친 것이 새삼 아쉬웠다. 어쨌거나 애커먼과 김 주석이 나눈 대화가 정확하게 미국 당국에 전달되어 북-미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북-미 관계가 호전되면 그만큼 남북관계도 좋아질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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