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9월13일 필자는 통일원 장관 집무실에서 북-미 고위급 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인 로버트 갈루치(가운데) 차관보 일행을 맞아 면담했다. 3차 북-미 회담을 앞두고 한국과 조율하고자 방한한 갈루치에게 정부 내 강경파들은 남북 대화 선행을 구실로 미국의 발목 잡기를 시도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45)
1993년 9월이 되어도 북-미 회담에 대한 정부 내 강경파들의 염려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유보’에 합의한 1차 회담의 결과에 다소 격한 반응을 보였던 이들은 2차 회담에서 북한이 요구한 경수로 문제에도 시큰둥했다. 이 때문에 지난 8월 초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임시사찰단이 영변을 방문했을 때도 미국은 안전조치의 계속성 보장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우리 정부는 ‘기술적 차원’에 불과하다고 과소평가하며 내내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 와중에 3차 회담을 앞두고 미국 쪽 협상 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차관보가 9월9일 방한할 예정이었다. 정부는 그를 맞기에 앞서 외교안보 비서관이 주재하는 실무자 회의를 열었다. 청와대에 파견 나가 있는 통일원 비서관과 정책실장, 외무부 제1차관보, 국방부 군비통제관, 안기부 대북전략기획국장이 참석했다.
실무자들은 3차 회담에 대한 북한의 전략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야만 갈루치의 행보를 늦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북한은 미국과 직접 협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정치적 관계 개선에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따라서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협상이나 남북대화는 최대한 지연시키거나 회피하려 할 것이고, 3차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형식적 대화에 매달릴 것이다.” 이것이 북한에 대한 실무자들의 평가였다. 그래서 북-미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이제껏 내세운 사항을 다시 강조하기로 했다. 국제원자력기구와 추가 협의를 진행하고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3차 북-미 회담을 성사시켜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다시 확인한 셈이었다. 그리고 북한이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을 때는 9월22일 열릴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만일 3차 북-미 회담이 열리게 되면, 북한은 1차와 2차 회담에서 자신들이 요구한 사항을 다시 거론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이행을 촉구할 것이라고 실무자들은 판단했다. 북한의 요구 사항은 ‘94년부터 팀스피릿 훈련 중지, 경수로 지원, 테러국가 지정 삭제’ 등이었다. 이들은 또 만일 3차 회담에서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을 회피하려고 남북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핵 투명성을 보여주겠다고 제의하더라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또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보다 ‘비핵지대화’를 요구한다면, 이는 핵사찰 문제와 무관하다는 점과 함께 비핵화 문제가 해결된 이후 검토해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비핵지대화 문제는 미국의 핵무기가 한반도에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경수로 지원 관련 협의도 북핵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만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사실 북한이 경수로 지원을 제의한 것은 핵 투명성을 밝히려는 나름의 새로운 제안이었다. 그런데 우리 정부 실무자들은 이 문제도 부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경수로 문제는 법적으로나 기술적 측면에서 의견 교환은 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것도 괜찮다고 보았다.
또 한가지 웃지 못할 논의는 갈루치 쪽에 우리 내부에 이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민주정부 안에는 이견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미국은 이미 우리 정부 안에 강경파와 온건파 간에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실무진은 3차 회담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미국에 알리자고 했다. 특히 남북간에 실질적 대화 없는 상태에서 3차 회담을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을 갈루치에게 전달하자고 했다.
실무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들의 건의가 북-미 회담을 더 어렵게 하고 나아가 남북관계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설사 우리가 미국 정부의 발목을 잡으려 해도 미국은 국익을 위해 북한과 일정한 수준에서 대화와 협상을 이어나가려 할 것이다. 이른바 ‘깡패국가’에 의해 핵무기가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흘러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따라 북한을 적극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정부의 발목잡기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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