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19일 필자는 서울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2차 북-미 회담의 결과를 평가하는 통일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북한에 대한 경수로 지원에 앞서 남북대화를 먼저 재개해야 한다는 미국의 원칙을 지지하기로 했다. 왼쪽부터 한승주 외교부 장관, 필자, 이해구 내무부 장관.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44
1993년 8월 중순 제네바의 2차 북-미 회담이 일단락되었다. 미국은 북한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경수로 기술 지원을 포함해서 북한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면 먼저 국제원자력기구(IAEA) 및 남한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8월19일 통일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미국의 입장을 존중하기로 했다. 따라서 이제는 특사교환보다 남북간 핵통제위원회를 가동시키는 문제를 놓고 남북대화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뒤이어 3차 북-미 회담을 앞두고 한국·미국·일본의 실무자 회의가 열렸다. 우리 쪽에서는 외무부 신기복 차관이 참석했다. 3국 실무자 회의는 활발한 논의 끝에 9개항의 합의에 도달했다.
‘첫째,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와의 대화에서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을 의제로 삼는다. 둘째, 미국은 한국에 의제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융통성 있는 남북대화 재개를 요청한다. 셋째, 3차 북-미 회담이 열리려면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그리고 남한과 대화를 개시해야 한다. 넷째, 미국은 특별사찰이 여의치 않을 때는 4단계로 나아가는 중간단계로서 북한으로부터 몇가지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2개의 미신고 시설 주변 방사능 측정 허용, 2개의 미신고 시설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정보 제공, 플루토늄 저장량 설명 등이다. 다섯째, 특별사찰 수용 여부를 두고 북한 내부에 강온파가 대립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여섯째,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내린 적이 없다. 일곱째, 미국은 3차 회담에서 경수로와 관련된 법적 기술적 절차를 북한에 설명한다. 여덟째, 갈루치 대표가 9월8일께 서울을 방문해 ‘남북 상호사찰 문제’에 대한 의견을 조율한다. 끝으로 3차 회담 시기는 대체로 9월 중순께가 될 것이다.’
나는 실무자 회의를 지켜보면서 그동안 한국과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과의 대화에 미국보다 더 주저하고 소극적이고 때로는 비관적이었음을 실감했다. 미국은 북한이 과민반응하는 팀스피릿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왔다. 이에 비해 우리는 팀스피릿 훈련을 대북 압박책으로 활용하고 싶어했다. 냉전강경세력은 특히 북-미 고위 정치회담이 열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미국도 바로 이 점을 불편해하는 듯했다. 미국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고자 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에 먼저 협력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해 8월 한달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그 무렵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기사에서 나를 두고 ‘매버릭 미니스터’라고 불렀다. 꼭 나쁜 뜻으로 쓴 말은 아니다. 매버릭은 ‘홀로 튀긴 하지만 다수가 안일한 선택을 할 때 용기있게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뜻한다. 앞서 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비주류 대통령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별명이 바로 ‘매버릭’이었다. 그는 이 별명을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의 정치 이미지로 활용했다.
그 기사에서 나를 ‘매버릭’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민정부 안에서 내가 홀로 햇볕정책 같은 대북 온건정책을 견지하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외로운 한 목소리가 북한에 대한 지원책을 요구하고 있다’는 기사 제목이 이 점을 선명히 부각시켰다. 기자는 나를 비둘기파라 부르면서 김영삼 정부 안에 있는 독수리파들이 나를 염려한다고 했다. 곧이어 미국의 대표적 보수언론인 <월스트리트 저널>도 나의 대북 유화책과 보수파들의 강경대응을 기사화했다. 미국과 우방국들은 북한 제재를 논의하는데 통일원은 협력을 주장하는 어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이런 지적은 민주국가에서 각 부처의 대표로서 국무위원이 정책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는 기본 상식에는 어긋나는 일이다. 각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더 멀리, 더 넓게, 더 깊게 보고 올곧은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 대통령이 할 일이다. 생각해 보라. 통일원 장관이 안보담당 장관들보다 더 강경한 대응을 외친다면 남북관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도 <월스트리트 저널>은 세계적인 권위지답게 국내 보수언론처럼 편향되고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한국 국민의 약 80%가 북한을 더 이상 경쟁자나 적대적 존재로 보지 않고 북한과 협력을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함께 나의 대북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흥미로운 기사였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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