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15일 오전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남북인간띠잇기대회본부의 사무실 개소식과 현판식이 열렸다. 상임회장 최희섭 목사를 비롯해 강원용·박형규·권호경 목사 등 개신교 지도자들이 적극 참가해 문민정부와 손잡고 민관협력 통일운동의 선례를 만들고자 애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42)
1993년 8월이 되자 내게 또하나의 위기가 다가왔다. 단초가 된 사건은 남북 인간띠 잇기 운동이었다.
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북한기독교연맹은 8월15일 광복절에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인간띠를 이어 휴전선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이어 예전 군사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법한 일이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니 국민과 정부가 손잡고 함께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그에 앞서 남북 교회 대표자들은 86년 세계교회협의회 주선으로 처음 만났다. 88년에는 95년을 ‘평화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해마다 8월15일 직전 일요일을 평화통일을 위한 공동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합의했다. 이런 배경에서 93년 4월19일 한국교회협의회는 남북 인간띠 잇기 대회를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범기독교적인 ‘평화통일 희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대회를 준비했다. 이어 7월19일에는 추진본부가 공식적으로 발족했고, 여기에 한국와이엠시에이(YMCA), 한국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흥사단,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천도교 등 100개가 넘는 민간단체가 참가했다. 대회장으로는 강원용 목사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북한은 인간띠 잇기 대회와 범민족대회를 병행해서 추진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어렵게 되자 남북 공동 개최를 막판에 거부해버렸다. 결국 남쪽에서만 46개 개신교 교단과 55개 사회단체, 그리고 여러 종교단체가 참여해 반쪽 행사로 진행했다. 또하나는 정부 안에 인간띠 잇기 운동 자체를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통일원이 시민단체와 연대하는 것에 반대하며 김영삼 대통령을 부추겨 운동 자체를 좌절시키려 했다.
이 때문에 나는 대통령과 여러 차례 불편한 대화를 해야 했다. 행사가 가까워질수록 대통령과 나 사이에 긴장도 고조되기 시작했다. 8월7일 토요일 밤 별안간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김 대통령이 직접 한 것이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인간띠 잇기 대회를 왜 통일원이 주동하여 이렇게 성급히 추진하느냐고 나무라듯 얘기했다. 마치 불온세력과 손잡고 정부의 다른 부처들과 협의도 없이 내가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처럼 책망했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랍고도 의아했다. 이미 대통령과 두어 차례 독대한 자리에서 인간띠 잇기 대회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장로인 김 대통령의 당선을 적극 지원했던 기독교 진영이 모두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문민정부에서 당연히 통일·평화·인권운동을 민관 합동으로 추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도 왜 문민정부가 이 대회를 성공시켜야 하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같은 설명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대통령이 이처럼 역정을 내다니, 기억 못할 리 없을 텐데….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또다시 인간띠 잇기 운동의 의미를 설명해야 했다. 특히 대통령이 지난날 기독교 민주화운동 단체에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 운동을 도와주는 것이 신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79년 대통령이 신민당 총재 시절 국회에서 제명당했을 때 교회협의회의 활약을 상기시켰다. 당시 산하 ‘교회와 사회위원회’에서 즉각 비판 성명을 발표했는데 나도 박형규·김상근 목사, 이재정 신부와 함께 그 성명서 작성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서울시경 특수수사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서울에 와 있던 유종하 주유엔대사로부터 먼저 연락이 와 만났더니, 대뜸 ‘살아남는 문제에 신경을 쓰라’고 충고를 했다. 고교(경북고) 동창으로서 격의 없이 하는 말이라 해도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는 박관용 비서실장을 비롯한 대통령 주변 인물들을 만나보니 내 입지가 위태롭다고 느꼈던 것 같았다. 유 대사도 박 실장처럼 대북강경론자라는 사실은 짐작했지만, 두 사람이 언제 그렇게 가까워졌는지는 지난달 뉴욕에서 만났을 때까지도 미처 몰랐다. 도대체 어떤 귀띔이 있었기에 유 대사가 내게 그렇게 오만한 충고를 했을까, 대북정책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생존이 역사적 생존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정치적 생존에 성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가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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