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15일 미국을 공식 방문한 필자(왼쪽)는 워싱턴에서 같은 워터게이트호텔에 묵고 있던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 지명자(가운데)와 부인 버타 레이니(오른쪽)와 반갑게 재회했다. 두 사람은 70년대 초부터 인연을 맺어온 오랜 지기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40)
1993년 7월14일 뉴욕 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간 나는 주한 미대사로 지명된 제임스 레이니 부부를 워터게이트호텔에서 만났다. 두 사람도 나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
레이니 박사는 일찍이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해방 직후 남한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미국의 군사정보 분야에서 일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해 여운형·송진우·장덕수 등 정치지도자들이 줄줄이 저격범의 손에 쓰러질 때 젊은 레이니는 이들을 조사하는 일에 참여했다. 제대한 뒤에는 예일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신학 공부를 했다. 그리고 60년 무렵 선교사로 한국에 다시 왔다. 그때 그는 연세대 신학과에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쳤다. 한국 기독교 학생운동을 통합시키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기생)을 세우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생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청년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진보적 조직이었다. 70~90년대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학생운동 단체이기도 하다.
60년대 중반 예일대 신학부로 돌아가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남부 명문대인 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트대학 신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 감리교 지도자로 손꼽히는 박봉배 전 목원대 총장과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인 서광선 박사, 그리고 숭실대(숭전대) 총장을 지낸 고범서 박사 등이 그의 제자다.
그가 밴더빌트대 교수로 있던 67년 무렵 나도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박사를 받은 뒤 내슈빌 인근의 테네시공대에서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레이니는 그 뒤 에모리대 신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학장으로 봉직했다. 학장 시절 그는 미국의 한 신학교가 문을 닫자 그 학교 장서를 몽땅 구입해 도서관을 확충하고 목회 경험을 살려 신학대학을 내실있게 키웠다. 우리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은 내가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직후인 70년 초반, 에모리대 총장으로 발탁된 그가 한국의 동문과 친구들을 만나러 온 자리였다. 그는 17년간 총장으로서 대학의 연구 기능을 크게 높여 3천여개 미국 대학 중에 20위 안에 드는 명문대로 키웠다.
그는 그러는 와중에도 늘 한국을 잊지 않았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 까닭에 정계나 기독교계 지도자들 중에 친구가 많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김관석·문익환·문동환·박형규·강원용 목사가 모두 그의 친구들이다.
나는 하루 저녁 일정을 비우고 레이니 부부와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아직 상원 인준 절차가 남았지만, 타노프 국무부 정무차관의 말대로 그의 청문회 통과는 문제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주한대사 부임을 미리 축하했다. 30년 전에는 선교의 사명이었으나, 이제는 한반도 평화의 사명을 갖고 오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기쁜 일이 아닌가. 마침 내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추진해야 하는 국무위원으로 있으니 서로 힘을 합쳐보자고 했다.
그는 내가 김영삼 정부에서 일종의 피뢰침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민정부로 떨어지는 천둥번개를 내가 막아주는 임무라는 얘기였다. 나는 새 정부가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앞세우고 있으나, 과연 이 개혁을 관철해낼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시인했다.
그 역시 주한대사인 자신에게 미국 정부가 전적인 권한을 줄지 염려하는 듯했다. 그에게는 이른바 ‘애틀랜타 인맥’이 있었다. 애틀랜타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메카로서 마틴 루서 킹 목사 계열의 흑인 지도자인 앤드루 잭슨 목사 등이 그의 친구요 동지였다. 에모리대 인맥도 그에게는 큰 자산이었다. 상원 국방위원장 샘 넌 의원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그의 지기다. 에모리대 총장 시절 그는 카터를 국제정치학 교수로 초빙하고 부설로 카터센터를 설립해 세계평화 중재자로 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에는 한승수 주미대사가 관저에서 레이니 박사와 나를 위해 만찬을 베풀어주었다.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있던 찰스 카트먼도 초청했다. 그는 훗날 레이니 대사를 보좌하는 부대사로 수고했다. 워싱턴에 있는 한국 학자들도 참석해 정말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나는 레이니 대사가 하루빨리 부임해 이때까지 한국 지식인들이 생각해온 ‘총통 같은 미국대사’ 이미지를 멋지게 씻어내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겸손하고도 끈기있게 일하는 ‘한국의 친구 미국대사’의 전형을 직접 보여주기를 기원했다. 실제로 레이니 대사는 3년 임기 동안 한번도 총통처럼 군림하려 한 적이 없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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